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74화 (74/200)

나만 1회차 074화

“허억!”

“깨어났습니까, 범철.”

헤르탄이 나를 업고 있었다.

퍼뜩 고개를 들고 살피니 향연의 산맥 새하얀 숲속이었다.

“언제…… 거기서 나왔던 거죠?”

“한 10분 전쯤. 명계의 문이 사라지기 직전, 간신히 뛰쳐나왔습니다.”

나는 찌푸린 채 미간에 손을 짚는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헤르탄이 넌지시 물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헤르탄이 날 업고 와준 겁니까?”

“강에 의식을 잃은 범철이 떠오르더군요. 일찍 구조하지 않았다면 물살에 쓸려가 버렸을 겁니다. 창고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창고에서 생명그릇을 집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쓰러지는 바람에 기어서 나왔던 것 같은데.’

생명그릇을 훔친 나는 사력을 다해 창고를 나와 강물에 몸을 던졌다. 헤엄칠 힘은 없었으니 분명히 부력에 의해서 몸이 떠올랐던 것이리라.

그때 내 눈이 크게 떠졌다.

“생명그릇! 그건 어떻게 됐죠?”

“범철의 왼손은 장식이 아닙니다.”

그제야 내가 왼손에 생명그릇을 꽉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나 그것을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이 쥐가 날만큼 아팠다.

‘다행이군.’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헤르탄이 흘깃 보며 의아해했다.

“범철이 깨어나기 전, 그걸 깨뜨리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제 힘으로는 부서지지 않더군요.”

“이 생명그릇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 부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회귀자 살해 재능에서 도출됐다는 변수입니까?”

“예. 정확히 네 번째 정보입니다.”

“이번 삶의 범철은 절대 적으로 두고 싶지 않군요.”

아크 리치의 생명력을 품고 환히 빛나는 생명그릇을 조심히 품에 넣었다.

“그런데 용케 강물에서 절 건졌습니다. 밴시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강물에 직접 들어가진 않았고, 드루이드의 산림주술을 이용했습니다. 소지한 씨앗을 자라나게 해서 범철의 몸을 넝쿨로 묶고 건져냈지요.”

역시 헤르탄이다.

그때 거의 핏덩이가 되어버린 헤르탄의 팔뚝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해했습니까? 그대로 두면 곪겠는데요.”

“밴시가 서식하는 강에서 사람을 구하려면 공포를 이겨내야 합니다.”

“내려줘 봐요. 치료해줄 테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술도 금방 깨는 놈입니다, 나는.”

내가 툴툴대자 헤르탄이 나를 내려 놓고 나무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자해한 것치곤 꽤 심각하군.’

본인의 손톱으로 그었다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팔뚝이 피로 물들어 있다.

나는 손길에 마나를 담아 부상 부위를 조심스럽고 오래도록 쓰다듬는다.

1서클 마법, 별빛회복.

카티에의 치유마법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응급처치는 될 것이다.

‘나중에 카티에한테 괜찮은 회복마법이나 몇 개 배우든지 해야겠군.’

팔의 상흔을 치유하는 동안, 헤르탄이 나에게 천천히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범철.”

“그건 제가 해야 할 소리입니다.”

“전생에서 그대가 내 목숨을 구해 줬던 일들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하, 제가 헤르탄의 목숨을 구해줬던 적도 있었습니까?”

문득 그가 겪어온 120번의 인생에 관해서 궁금증이 피어났다.

헤르탄이 하늘을 바라보며 그 시절을 회상하듯 추억에 잠겨 말했다.

“함께 살아남고, 같이 죽기도 했습니다.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었죠.”

“헤르탄은 전생에서부터 나와 함께 했던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꽤 됐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큼.”

“하, 그랬습니까?”

“굴곡진 생사를 함께했으니까요.”

“짧게 하나만 들려줄 수 있어요?”

나는 옛날동화에 빠진 아이처럼 그의 전생 얘기를 잠시 듣고 싶어졌다.

“생(生)과 사(死) 중에 어느 것을?”

“생보단 사가 훨씬 재밌겠는데요. 조금 있다 우리가 죽을지도 모르고.”

“가장 슬픈 죽음을 아십니까?”

“뭔데요? 가족의 죽음?”

“복상사입니다.”

“푸흡!”

그에게서 나온 예상치 못한 답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헤르탄도 드물게 깊은 미소를 지었다.

“왜, 복상사입니까?”

“쾌락 속에서 죽지만, 가장 슬픕니다. 사망할 때의 절정을 잊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회귀한 뒤에 특히 우울증이 깊게 남고는 합니다.”

“어쩐지 직접 겪어본 말투인데요?”

“물론입니다. 범철과 함께였지요.”

내가 경악해서 입을 쩍 벌리자, 헤르탄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동침했단 말이 아닙니다.”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면 뭐였습니까?”

내가 붕대를 감아주며 의아해했다.

헤르탄은 눈을 감고는 말했다.

“인상 깊었던 죽음이었습니다. 구미호에게 복상사를 당한 경우였는데, 죽기 직전까지 함께 웃었습니다.”

“확실히 인상이 깊기야 했겠네요.”

“황당한 황홀경에 황송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실없이 웃게 된다.

헤르탄이 지그시 눈꺼풀을 올렸다. 그리고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함께 죽고 싶군요. 그때처럼.”

“…….”

갑자기 웃음기가 싹 가신다.

망할, 새삼스레 회귀자는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걸 실감하였다.

헤르탄이 응급처치가 끝난 팔뚝의 붕대를 탁 때리며 잡담을 끊었다.

“치료 끝났습니다! 어서 가죠.”

하여간 회귀자한테 전생 얘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우린 둘 다 지쳤지만,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나는 창고에서 벌어졌던 일을 그에게 말했다.

“창고는 이차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곳에서 미래의 사건을 단편적으로 봤어요.”

헤르탄의 짙은 눈썹이 가느다랗게 올라갔다.

“미래를 직접 보았단 말입니까?”

“예. 짧게 스쳐 지나가는 수준이었지만요. 그중엔 헤르탄도 있었어요.”

나는 헤르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정이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죽어가던 그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나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헤르탄이 죽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 것을 봤던 사람, 많습니다.”

“…….”

참 회귀자다운 답변이군.

“나보다 일찍 죽지는 마십쇼.”

“범철이 죽으라고 하지 않는 이상,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습니다.”

헤르탄은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그러면 제가 어떤 과정에 의해서 죽었는지는 목격하지 못했습니까?”

“흠. 설명하기 조금 어려운데, 당시의 단편적인 것만 기억나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헤르탄은 분명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어요. 과정은 생략되어 있으니 결과만 알겠더군요. 흡사 소설책의 페이지를 미리 넘겨서 문장 몇 줄만을 앞서 읽은 것처럼.”

“그럼 그다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확실한 미래인지 모르는 거고.”

그가 턱을 긁으며 태연히 말했다.

“무엇보다 미래라면, 지금 뭔 짓을 하든지 나중에 결국 벌어집니다.”

“…….”

자기가 죽는다는데도 저토록 담담하다니.

하긴, 회귀자라면 딱히 처음 맞는 죽음도 아닐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군. 헤르탄이 죽을 때 남긴 유언을 생각하면, 분위기가 굉장히 심각했던 것 같았는데.’

헤르탄이 주제를 돌리며 말했다.

“밴시들의 합창을 듣고서 불길한 악몽을 꾸는 것도 그렇고, 범철에게 어쩌면 예언의 재능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의심되는군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좀 밝은 미래를 보고 싶어서.”

전장의 소음이 가까워지자, 헤르탄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질문했다.

“하여간 그 깨어지지 않는 생명그릇은 어떻게 부술 계획이십니까?”

내가 생명그릇을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힘들게 생명그릇을 얻었는데, 농락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아크 리치의 불사의 생명력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설령 생명력이 줄더라도 금세 어둠의 기운으로 회복해버리고 만다.

“크라아아아-!”

평지에서 용들이 날아들며 참전했지만 끝없는 난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브레스를 내뿜으며 아크 리치에게 대적하는 용의 군세.

그러나 아크 리치는 최상급 흑마법을 쓰며 용들의 진격을 막아냈다.

“으어어……!”

“리치 님에게 복종한다……!”

게다가 죽은 원정대의 시체가 고위 언데드로 부활해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시체를 재활용해 언데드 병력으로 생성시키는 리치의 특성. 아군이 쓰러지는 족족 적이 되어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너무…… 힘겨워요!”

특히 카티에는 가장 지쳐 있었다.

아크 리치를 용들이 활동하기 적합한 평지까지 끌고 오느라, 성녀는 기적을 서너 번이나 써야만 했다.

그러나 원정대가 손 놓고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용들이 최전방서 싸우는 동안 나머지 병력은 성물의 포화에 집중했다.

전투 병단이 달려나가고, 잡역병은 혼자 서서 성물의 진열을 보전한다.

“빛의 분수대 덕분에 장비에 은이 입혀졌다! 기력도 빠르게 차올라!”

“성수의 잔비가 내려온다! 저주받는 걸 겁먹지 말고 모두 돌격하라!”

“태양의 샘물에서 흘러나온 계단을 타고 공격해! 용을 피해가며 아크 리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성물의 힘으로 규합되는 원정대.

일생에서 한 번도 보기 힘든 성물이 아크 리치에게 포화되고 있었다. 황색대륙 회귀자의 모든 전생의 지식과 노력이 집합된 결과물이었다.

[일곱 교단의 고위 성물이 한 자리에 총집결되었습니다.]

[일곱 성물의 효력이 유지될 동안, 성물히 박힌 지역은 성역으로 지정되며 악의 침입을 막아냅니다.]

[단순한 베기조차 중급 경지 이상의 신성력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아크 리치가 고위 언데드를 일으킬 권한을 상실했습니다.]

산맥에서 넘쳐흐르는 신성력.

아크 리치가 되살렸던 원정대의 고위 언데드가 다시 시체로 돌아갔다.

푸른 눈빛의 히사네가 소리쳤다.

“너는 이제 고위 언데드를 일으킬 수 없다. 포기해라, 아크 리치!”

그러자 아크 리치가 조소를 지었다.

“고위 언데드를 일으킨다니, 내가 그래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군.”

아크 리치는 히사네에게 빙의된 일레아흐의 영혼을 바로 꿰뚫어 봤다.

“일레아흐. 나를 죽이려는 네년의 노력이 가상한 것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래 봤자 네년도 회귀자이지.”

아크 리치가 뼈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용의 목을 손뼈로 낚아챘다.

“크허어억!”

손가락뼈가 비늘에 구멍을 뚫으며 용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렸다. 마법이 없더라도 대륙의 지배자인 아크 리치의 악력은 그만큼 강력했다.

“나에겐 별것 아니나, 너희 모두에게 해가 되는 하급 유령이 있다. 이번 삶에 처음으로 소환하는구나.”

“서, 설마……!”

히사네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아크 리치가 손뼈를 움켜쥐자 용의 시체에서 하얀 영혼이 삐져나왔다.

“모든 시체는 밴시가 될 것이다.”

죽은 용이 밴시가 되어 소환됐다.

* * *

크흐우으으으앗……!

커다란 용의 밴시가 전장을 날아오르며 차가운 울음소리로 절규했다.

“흐, 흐, 흐윽! 흑! 흐윽!”

“배, 밴시야! 도망쳐! 살려줘!”

“백치가 되고 싶지 않아! 제발!”

밴시가 된 용을 보자마자 회귀자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발작을 했다.

지휘를 맡고 있던 회귀자가 도망치자, 순식간에 체계가 무너져 내렸다. 오크들은 도망치는 지휘관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고, 진형은 무너졌다.

“대장. 대장. 대장. 대장……!”

카티에는 쭈그려 앉아서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뜯으며 마구 울먹였다.

“저, 저 빌어먹을 해골바가지!”

튜크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단검으로 자해했지만, 그럼에도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끄흑……!”

전방에서 싸우던 밀밭기사단은 비명을 듣고 창백한 얼굴로 기절해버렸다.

아크 리치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원정대의 시체에 손뼈를 휘저었다.

그러자 여성대원들의 시체에서 희끄무레한 밴시들이 쏟아져 나왔다.

흐우으으으……!

흐우으으으……!

흐우으으으……!

그 어느 회귀자도 서 있질 못했다.

새파랗게 질리거나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몇몇은 오줌까지 지렸다.

“레마타랄! 쉐말!”

밴시를 다루는 오크 주술사들이 나섰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리치와 주술사는 영혼의 지배력에서 막대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전투에 참전하던 용들조차 밴시가 일으키는 효과에 당황하고 말았다.

“카르말티스여! 우리를 기억하라!”

“죽은 용을 설득하려 들지 마라! 물어뜯지 말고, 마법으로 파괴해!”

“밴시부터 전멸시켜라! 회귀자들의 정신피해로 전장이 휩쓸리고 있다!”

“회귀자에게 밴시가 닿지 못하도록 하시오! 백치로 만들지 못하게끔!”

그러나 당황한 용들을 진정시켜야 할 용의 여왕은 정지해 있을 뿐이다.

“시간이 부족해 노예로 부리지는 못하겠으니,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

아크 리치는 권능으로 전쟁 초반부터 레샬피티에를 굳게 해버렸다.

최강의 언데드인 본드래곤의 정신마저 세뇌할 수 있는 아크 리치!

그 모든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질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판이군.’

내가 전쟁에 섣불리 끼지 못한 것은 생명그릇을 파괴하기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

내 옆에 있던 헤르탄은 비명을 듣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귀를 막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범철. 저는 더 이상 전장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 멀리 도망쳐 있을 겁니까?”

“여기서 세 발짝 물러나 있지요.”

“몇 발짝 도망치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돌아올 여부가 중요한 거지.”

“밤새 울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저것들이 없어지면, 그때 범철은 곁을 보십시오. 제가 서 있을 겁니다.”

“하, 제기랄. 듣던 중에 반갑군요. 뒤에서 간곡히 행운이나 빌어줘요.”

“덜 아프게 죽으십시오.”

“…….”

결국 이제부터는 모든 난관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만 하는 상황!

‘내가 생각해둔 계획을 실행하려면, 반드시 ‘그 사람’이 필요한데.’

세밀히 전장을 살피고 있을 때, 내가 찾고 있는 ‘그 사람’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다른 원정대원들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어디 한 번, 목숨을 걸어 보자고.’

상황파악을 마친 나는 생명그릇을 품고 전장을 향해서 뛰쳐나갔다.

밴시 떼를 이끄는 아크 리치가 그야말로 전장의 악마처럼 보였다.

‘아크 리치는 회귀했는데도 밴시로 인한 피해나 공포가 없는 건가.’

하기야 언데드의 왕이 밴시에 의해 백치가 돼버린다면 웃기기야 하겠다.

반복 회귀의 유일한 약점마저 봉쇄한 적이라니, 비참할 만큼 강력하군.

‘이렇게 많은 성물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압도할 수 있다니.’

과연 120회차까지 누구도 쓰러뜨린 바가 없는 황색대륙의 지배자답다.

나는 고위성물이 진열된 성역에 닿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전장에서도 밴시가 오지 못하는 구역이 분명히 있는데. 안타깝군.’

일곱 고위성물이 박힌 지역은 성역 판정을 받아서 밴시가 오지 못했다.

‘성역 내부에서는 밴시들의 비명 소리가 아주 옅군. 버티기도 좋겠어.’

그러나 대개의 회귀자는 발이 풀려서 성역으로 대피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용과 오크는 리치와 싸우느라 회귀자들을 성역까지 옮길 여유가 없다.

‘그만큼 용의 밴시가 회귀자들에게 끼치는 정신적 피해는 심각하다.’

용의 밴시가 내지르는 커다란 비명은 전장을 메우며 귀청을 찢었다. 싸움을 오래 끌면 전장에 참여한 모든 회귀자가 백치가 될 것이다.

나는 운 좋게 성역에 혼자 남아 떨면서 서 있는 사람과 얘기를 끝마쳤다.

‘좋아.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난 밴시 떼를 이끌며 원정대에 쏟아내려는 리치를 향해 소리쳤다.

“아크 리치!”

비명에 목소리가 파묻혔을 텐데, 아크 리치는 귀신같이 날 돌아봤다.

“나를 배반한 네놈이……!”

“재회하니 반갑군. 집안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인사로 이 식기 괜찮지?”

내가 생명그릇을 척 들어 보이며 도발하자, 아크 리치가 진노했다.

“어떻게…… 도대체 네가 어떻게 내 생명그릇을 손에 넣은 것이냐!”

“그릇 싫냐? 가정적이지 못한 놈.”

“해괴한 농담 집어치워라!”

이쯤 되면 말해도 관계가 없겠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진지하게 말했다.

“회귀자 살해 재능. 그것으로 너를 죽이기 위한 변수정보를 습득했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대충 이해됐는지, 아크 리치가 이를 갈았다.

“독점한 정보에 의지하다니! 그러는 네가 회귀자와 다를 것이 뭐지?”

“생명을 독점한 그릇에 의지하다니. 그런 네가 나와 다를 게 뭐냐?”

도리어 내가 되묻자 아크 리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당당히 놈을 향해 발언했다.

“네놈을 조져 버릴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 나를 비난해도 감수하겠다.”

“크아앗!”

아크 리치는 당장에라도 날 죽이고 싶어 했지만, 아무리 놈이라도 성물이 가득한 성역에 접근하진 못했다.

리치뿐만 아니라 밴시, 언데드도 감히 접근할 수가 없는 성역!

영악한 아크 리치는 인내심을 갖고 나를 향해 진득한 살의를 품었다.

“그 성역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나? 고작해야 5분 안팎이다. 성물의 효력이 하나라도 다할 시엔 네놈의 생명부터 끝장날 것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크 리치의 매서운 흑마법에 성물들이 제 빛깔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글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생명그릇을 높이 들자, 아크 리치가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멍청하긴. 네놈이 아무리 잘났더라도 절대 내 생명그릇을 부수지 못할 것이다. 애당초 그럴 수 없게 설계했으니.”

“너야말로 멍청한 착각을 하고 있군. 이걸 부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뭐……? 설마, 네놈……!”

아크 리치의 분위기가 다급해졌다.

회귀자 살해 재능을 통해서 떠오른 아크 리치의 최고급 변수 다섯 개!

그중 네 번째 살해변수가 이랬다.

[아크 리치의 생명그릇은 재능 없는 자만이 부술 수 있습니다.]

회귀자가 전생의 지식을 이용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왔던 것처럼, 나 역시 타고난 재능으로 노력한 자를 앞서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결정적인 일격, 생명그릇의 완전한 파괴는 둔재(純才)의 몫이었다.

“암론!”

“안 돼!”

아크 리치가 황급히 손뼈를 뻗었으나 성역에 막혀 침범하지 못했다.

나는 숨어 대기하고 있던 암론을 향해 생명그릇을 원반처럼 던졌다.

암론은 비장하게 칼을 뻗어 생명그릇을 깨부수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으앗!”

그리고 엎어진 그의 가슴팍에 생명 그릇이 파묻히며 파열음이 터졌다.

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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