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72화
회귀자가 1회차보다 훨씬 강한 이유는 방대한 정보의 우위 덕분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달랐다.
나는 회귀자조차 압도할 만큼 유리하고 진귀한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
내가 리치로부터 돌아서며 외쳤다.
“헤르탄, 나를 따라와요! 그리고 일레아흐는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저 비열한 쥐새끼가!”
아크 리치가 울부짖으며 나를 찢으려 들었으나 원정대가 진격했다.
“전원 진격!”
“크와아앗!”
오크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둔기를 아크 리치의 다리뼈에 내리꽂았다.
그러나 수없이 둔탁한 타격을 가했음에도 리치의 뼈에는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사라져라, 쓸모없는 잡것들!”
아크 리치가 검은 창을 소환해 나를 찌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크들이 서슴없이 몸을 던져서 내게 날아드는 창을 막아냈던 것이다.
선두에 선 밀밭기사단이 서투른 오크어로 커다랗게 소리쳐 지휘했다.
“레카탈! 아펠크!”
오크들이 서둘러 물러나자, 소리 없는 발걸음이 전장을 메웠다.
“좋아. 저 뼈가 독과 산에 녹아 가루로 뭉그러지면 비료로 써주지!”
튜크가 웃자 은신한 도둑들의 단검이 빗발처럼 리치에게 던져졌다. 독액을 묻힌 단검은 닿자마자 김을 뿜었지만 뼈를 부식시키진 못했다.
[147개의 독액 단검이 아크 리치의 뼈에 부딪혀 튕겨 나갔습니다.]
[4초마다 산성 피해를 줍니다.]
[아크 리치의 저항력이 독액에 내성을 가지며 피해를 무마합니다!]
원정대의 총공격에도 별다른 충격조차 받지 않고 태연한 아크 리치!
하지만 일레아흐는 이조차 염두에 뒀었는지 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제2번 성물은 즉시 깨부수고, 제4번 성물을 최전방에 소환해라!”
그러자 곁에 있던 보안대 대장 디코브가 화들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보, 본부장님! 제4번 성물은……!”
푸른 눈빛의 히사네는 완고했다.
“해야 한다. 그게 최선의 수니까.”
자살기도회 간부가 보관함에서 빛나는 유리잔을 꺼내서 손으로 부쉈다.
[카하팔 교단의 고위성물 대사제의 잔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사백 년간 봉인되어 있던 광휘의 정령들이 산맥에 활개를 칩니다.]
[광휘의 정령들이 깔깔거리며 햇빛의 정기를 마구 내뿜습니다.]
[아크 리치의 사용 가능한 흑마법의 수준이 한 단계 약화됐습니다.]
[광휘의 정령들은 장난기가 몹시 심합니다! 아군과 적군이 없으며 모든 생명체가 조롱의 대상입니다.]
대륙에 봉인돼 있던 광휘의 정령!
전장에 웃음소리가 들어차면서 반딧불처럼 동그란 빛이 돌아다녔다. 그 빛은 아크 리치의 흑마법을 막아 목숨을 구해주거나, 원정대원의 머리를 만져대며 전투를 방해했다.
또한, 정령들이 내뿜는 햇빛 덕분에 아크 리치의 동작이 굼떠졌다.
“으으…….”
자살기도회 간부가 망설이다가 소환서를 찢자 큰 조형물이 소환됐다.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피눈물 흘리는 기괴한 크리스탈 수녀상!
[대교황의 소환서를 찢어, 고위성물 천사의 시종이 소환됐습니다.]
[시종은 악을 처단할 때 피눈물을 한 방울씩 흘리며, 눈가에서 피눈물을 소진하면 타락해 폭주합니다.]
“아크 리치를 처단하라!”
소환서를 찢은 간부가 소리치자, 수녀상이 아크 리치를 보며 통곡했다.
기도하듯 양손을 움켜쥐고, 목청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섬광!
아크 리치는 함부로 수녀상에 다가서지 못하고 팔뼈로 섬광을 막았다.
[별의 섬광이 아크 리치의 몸체에 강력한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리치의 팔뚝 뼈가 얇아지며 잠시 동안 3%의 방어력이 손실됩니다.]
섬광에 점차 녹아드는 팔뚝 뼈!
“산만하고, 방해가 되는군.”
리치가 뼈 손아귀를 움켜쥐자 섬광이 어둠에 삼켜져 소멸했고, 빛이 찢기며 정령들의 비명이 쏟아졌다.
성물에 저항하는 황색대륙의 지배자!
카티에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대가가 큰 기적이지만 대장의 시간을 벌어주려면 어쩔 수 없네요.”
[최상위 기적을 발휘했습니다!]
[흰 손아귀가 적을 끌어갑니다.]
[적이 너무 강하고, 생명력이 넘쳐서 움직임만 잠시 봉쇄됩니다.]
바닥에서 끔찍한 빛이 솟구치며 수백 개의 흰 손아귀가 튀어나왔다.
소름 끼치는 하얀 손길이 아크 리치의 딱딱한 뼈다귀를 마구 붙잡았다.
성물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아크 리치가 처음으로 불쾌하게 몸부림을 쳤다.
“기적……! 빌어먹을 힘이……!”
수만의 오크와 천 명이 넘는 정예 도둑도 막지 못한 아크 리치를 카티에는 고작 혼자서 기적으로 봉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지켜볼 수 있는 전장의 상황은 거기까지였다.
원정대가 나를 위해서 시간을 끌어 주는 동안, 나는 후열을 빠져나가며 황급히 유령기사단을 소환했다.
「주인! 이곳에서 죽음의 기운이 마구 풍기는군. 있기 좋은 곳이다.」
「주인님이시여. 드디어 여기서 죽어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신가요?」
「크흐흐! 일찍이 죽는다면 내가 기꺼이 술 한 잔 사주도록 하지!」
나는 재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8인의 유령기사단에게 명령했다.
“됐고, 보라색 문을 찾아봐! 죽은 자의 눈으로만 찾을 수 있으니까!”
「문? 뜬금없지만, 일단 알겠다.」
유령기사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뒤늦게 따라붙은 헤르탄이 침착하게 물었다.
“범철. 무슨 계획입니까?”
“우선, 생명그릇을 찾아야 합니다.”
야수처럼 나를 찾는 아크 리치의 시선을 피해 우리는 다급히 달렸다.
회귀자 살해 재능을 통해서 획득한 첫 번째 최고급 변수는 이러했다.
[리치의 생명그릇은 명계의 문 너머에 숨겨져 있습니다. 보랏빛 문의 위치는 오직 죽은 자의 눈으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해당 문을 열려면 리치의 전용 열쇠가 필요합니다.]
아쉽지만 정보는 어디까지나 정보!
단편적으로 지름길을 알려주지만, 해결책까지 마련해주진 않았다.
‘그나마 최고급 변수라서 정보의 품질이 아주 높은 편인 거겠지. 결국 문제 해결은 내 힘으로 해야 해.’
그때 기사유령 하나가 유령마를 몰면서 나의 옆에 나타났다.
「주인이 말한 보라색 문을 찾았다! 아주 높고 두껍더군.」
우리는 기사유령을 따라서 뼛가루로 뒤덮인 음험한 산속을 뛰어갔다.
「바로 이곳이다.」
기사유령이 멈춰 섰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허, 저 문이 보이지 않나? 주인이 말했던 보라색 대문 아닌가.」
헤르탄이 골몰히 고심하더니 땅바닥에 양손을 짚었다.
“아무래도 저 문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나 보군요.”
그때 나무뿌리가 급속히 자라나 보이지 않는 문을 테두리를 전부 감쌌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문의 규모를 대충 확인할 수가 있었다.
‘형체만 보자면, 커다란 문이군.’
높이가 20미터는 넘어갈 것 같다.
분명히 아크 리치 본인이 드나들기 위해서 직접 만든 문짝이겠지.
‘하지만 구체적인 형태를 봐야 해.’
나와 헤르탄은 나무뿌리가 얽힌 보이지 않는 문에 뼛가루를 뿌렸다.
그러자 복잡한 양식의 문과 정중앙에 뚫려 있는 구멍이 드러났다.
문의 중심에 있는 열쇠 구멍은 규모에 걸맞게 아주 널찍하고 동그랬다.
“저 문을 열기 위해서는 특정한 열쇠가 반드시 필요하겠군요.”
“지금 열쇠를 훔쳐올 시간 없어요. 한시가 급하니까.”
나는 기사유령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수고했다. 돌아가도 좋아.”
전장에 참전시킬 수도 있지만, 아크 리치는 죽은 자를 지배한다. 그러니 자칫 유령기사단을 참전시켰다가 이승에서 혼이 소멸해버릴 수도 있다.
「어째 우리는 항상 길 찾고 물건 찾는 목적으로만 움직이는군. 쳇!」
기사유령이 툴툴대며 사라졌다.
나는 나무뿌리를 타고 올라가 문짝의 열쇠 구멍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SSS급 잠금 해제 재능으로 열쇠 구멍의 구조를 빠르게 파악합니다.]
[최상 난이도! 일반인의 실력으로 절대 해제할 수 없는 잠금입니다.]
[용의 혓바닥과 흑사자 발톱으로 제조된 전용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를 대체하는 락픽을 제작하기 위해선, 열쇠 구멍에 알맞은 형태와 막대한 마나가 요구됩니다.]
나는 열쇠 구멍에 양손을 얹고서 아래쪽의 헤르탄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나무뿌리가 필요해요! 얇고 곧고 딱딱한 품종으로,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언데드의 땅이지만, 뼛가루가 많아 흙의 질이 좋군요.”
실력 좋은 드루이드답게 헤르탄은 즉시 나무뿌리를 성장시켜 뽑았다.
“얇은 박달나무와 곧은 편백나무 뿌리입니다. 이걸로 괜찮겠습니까?”
“완벽해요.”
헤르탄은 무심하게 나무뿌리를 맨손으로 툭툭 끊고서 내게 던져줬다.
나는 문에 얽힌 나무뿌리에 기대어 앉아 곧고 얇은 뿌리를 묶고 다듬었다. 곧 열쇠 구멍에 적합한 모양이 갖춰졌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내구력이 부족해.’
락픽에서 내구력은 가장 중요하다.
나무뿌리가 곧을지라도 열쇠 구멍을 쑤시다 부러지면 말짱 꽝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묘수는 이랬다.
“후우!”
내가 마나를 집중하자 입에서 싸늘한 숨결이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4서클 상위마법, 한기의 숨결!
용의 브레스를 카피한 희귀마법으로, 적을 얼어 붙이는 데 효과적이다.
내가 숨을 불어넣자 얽고 얽힌 나무뿌리 락픽이 굳세게 얼어붙었다.
‘물론 숨결을 너무 오래 쓰면 내 장기가 일부 얼어붙을 수 있지만.’
순식간에 사물을 얼릴 만큼 냉기가 강력하지만, 페널티가 붙는 것이다.
난 김이 서린 헛기침을 하고 차디찬 입술을 핥으며 락픽을 들어 올렸다.
‘단번에 성공하지 않으면 다음엔 더 힘들다. 아주 조심스럽게……!’
성인 절반만 한 크기의 간이 락픽을 열쇠 구멍에 비집어 넣고 돌렸다. 락픽이 워낙 크고 열쇠 구멍의 구조가 복잡해 대검을 썼던 경험이 도움 됐다.
그저 열쇠 구멍에 락픽을 넣고 돌리는데도 마나가 마구 빨려 나간다.
[명계의 문이 열쇠의 형태를 인식하고 주인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12%…… 27%…… 41%…… 54%…… 69%…… 83%……!]
마나가 빨려 나갈수록 락픽을 쥐고 있는 내 양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닥을 드러내는 마나를 스스로도 느꼈을 즈음, 문이 거세게 진동했다.
[……100%!]
“으억!”
순간 갑작스러운 떨림에 난 뒤로 밀렸다.
땅으로 떨어지자 헤르탄이 습관처럼 능숙하게 달려와 나를 받아줬다.
내가 얼떨떨해하며 엄지를 올렸다.
“헤르탄. 역시 최고의 조수인데요.”
“이건 약과입니다. 전생에서는 범철의 시체를 닦아줬던 경험도 있었지요.”
“…….”
망할, 역시 헤르탄이 제일 미쳤어.
쩌저적!
테두리에 얽힌 나무뿌리가 찢기고, 문이 환한 보랏빛을 뿜으며 열렸다.
[명계의 문을 열었습니다.]
[2시간 동안 문이 개방되며, 그 후 잠기고 문의 위치가 바뀝니다.]
‘하여간 리치는 역시 비범하군.’
한번 열 때마다 이렇게 많은 마나가 소모되는 문을 자유롭게 드나든다니.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보랏빛 대문 너머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곳에 생명그릇이 숨겨져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원정대는 아크 리치에게 맞서 희생되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여유 따윈 없다.
“어서 가죠.”
“따르겠습니다. 범철.”
우린 명계의 문 너머로 걸어갔다.
* * *
우리는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바닥에 물결치는 파문이 보였고, 걸을 때마다 음색이 다르게 들렸다. 거기에는 물길이 흐르는 소음도 섞여 들렸는데, 거친 듯하면서도 때론 부드러웠다.
횃불을 들어도 빛이 먹혀버려서 오직 밤눈으로 주변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상당히 요사스러운 장소인데.’
별로 내 마음에 드는 곳은 아니었기에 나는 턱을 세게 긁적였다.
헤르탄은 돌아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입구에 묶은 밧줄을 끌며 왔다.
“이런 곳은 난생처음 와봅니다.”
“헤르탄도 말입니까?”
“예. 비슷한 장소라면 향유고래의 위장이 있군요. 사방이 물컹하고 물길도 흐르며 어두우니 말입니다.”
“……그런 곳에도 가봤습니까?”
“원하면, 범철도 나중에 향유고래에게 함께 먹히도록 하지요. 나올 때 번거롭지만.”
“……그건 사양하도록 하죠.”
[이승과 명계의 중간 공간입니다. 증명 불가능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형의 생물체가 서식합니다.]
[주의! 강물에 빠지면 명계로 흘러들어가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이승과 명계가 이어진 공간.
그래서일까.
불멸자의 갑의가 짙은 녹빛 불꽃을 발하며 타올랐다.
[불멸자의 갑의가 명계에 근접한 기운과 공명합니다.]
갑옷에서 피어난 명계의 잔불만은 이곳의 어둠에 전혀 먹히지 않았다.
‘갑옷 불꽃이 빛나니까 그나마 길 찾기가 수월한 편이군.’
나는 혀를 찼다.
‘이런 곳에다 숨겨놓으니까 보물탐색 재능으로도 찾을 수가 없었지.’
아크 리치는 그 누구도 자길 죽일 수 없도록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곳에 그릇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여전히 시간이 촉박해.’
명계의 문이 열려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으로 한정된다.
그 안에 우리는 이곳에서 아크 리치의 생명그릇을 찾아내야만 한다. 만일 2시간 안에 나가지 못하면, 문이 잠기고 우린 명계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되리라.
“헤르탄.”
나는 멈춰 서며 헤르탄을 불렀다.
헤르탄이 돌아서려 할 때 경고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절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어요.”
“…….”
난 칼자루를 쥐었고 그는 자세 그대로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 완벽한 대치구도로군.
나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단칼에 죽일 기회는 지금뿐이다.’
서걱!
나는 헤르탄의 목을 칼로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