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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70화 (70/200)

나만 1회차 070화

그러나 그렇게 여유를 부리던 것도 잠시였다.

“크읏……!”

가슴팍의 낙인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지금까지 겪어온 그 어떤 부상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격통이었다.

[군주를 배반하였습니다!]

[군단장 직위를 박탈당했습니다.]

[군주의 정수로 크게 상승한 능력치가 원상태로 하락하였습니다.]

[저주의 낙인이 죽음보다 끔찍한 벌을 내리며, 영혼을 유린합니다.]

[가슴팍의 낙인을 파내도 내려진 저주는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저주의 낙인!

이것은 아크 리치가 나의 배신을 방지하기 위해 새겨놓은 조치였다. 저주의 낙인이 박힌 이상 나의 배반은 즉시 처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전략에는 아크 리치조차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로군.”

쿠웅!

게거품을 물고 꿈틀대는 나의 곁으로 뼈로 이루어진 용이 내려앉았다.

본드래곤 레샬피티에!

그녀가 아가리를 확 벌리자 내게서 검은 기운이 깔끔히 뽑혀 나갔다.

[사악한 본드래곤이 몸을 옭아매는 최상위 저주를 포식했습니다.]

[본드래곤의 브레스의 파괴력이 45% 상승하며 꼬리뼈부터 두개골까지 내구력, 생명력이 증가합니다!]

[삼켜진 저주를 소화하여 본드래곤이 당분간 빛에 면역이 됩니다.]

[낙인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맛이로군.”

내게 내려진 저주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본드래곤의 브레스 파괴력, 생명력, 뼈 내구력이 동시에 올랐다.

레샬피티에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은근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맛깔스러운 저주라면 몇 번 더 맛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만.”

“……미쳤습니까?”

나는 본드래곤을 확 째려보며 식은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옷깃을 열고 가슴팍을 살피자 저주의 낙인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낯빛과 동공의 색깔도 본래의 평범한 인간의 것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가쁜 숨을 토해냈다.

‘예정대로 흘러가서 다행이군.’

저주의 낙인은 어떠한 축복으로도 지울 수 없고, 파내도 효력이 유지된다.

그래서 나는 발상을 역전시켰다.

‘치유할 수 없다면 먹이면 된다.’

본드래곤은 저주를 삼켜서 먹는다. 그 때문에 저주의 낙인 역시 삼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나마 본드래곤이나 되니까 저주를 삼켜서 먹어치울 수가 있었지.’

아크 리치의 낙인은 손쉽게 지울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만일 다른 방식으로 저주를 지우려 했다면 도리어 화를 입었을 것이다. 행여나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아 낙인을 지울 수 없었다면, 평생 고통을 받았으리라.

“저주를 삼킨 덕에 이제 빛이 두렵지 않다. 나도 참전해야겠군. 물러서라.”

레샬피티에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자 나는 풍압에 뒷걸음질 쳤다.

싸움터로 향하는 본드래곤의 뒷모습은 장엄하고 위대했다.

나는 빛의 구덩이에서 벌어지는 언데드 군단과 용들의 싸움을 보았다.

‘역사서에 남을만한 격전이로군.’

용의 위엄!

용이 브레스를 내뿜을 때마다 언데드 수백 마리가 깔끔히 쓸려나갔다.

간혹 불길에서 언데드가 기어나왔지만 몸의 태반이 전부 타버렸다.

“카아악!”

“부, 불이다! 꺼뜨……려줘!”

나는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퀸소히니베는 완전히 자란 용들에 비하면 정말 애송이에 불과했군.’

스물다섯 마리의 용은 전부 성체였는데 퀸소히니베보다 덩치가 컸다.

무엇보다 저 두터운 용의 비늘!

다양한 빛깔의 투박한 비늘은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해골 궁수의 화살에 맞고, 독기가 스며든 녹슨 칼에 베여도 튕겨낸다.

‘거기다가 비늘뿐만이 아니지.’

설사 비늘을 꿰뚫는다 하더라도 용의 생명력은 방어력을 뛰어넘는다.

수천의 언데드가 합공하더라도 오히려 압도해버리는 용의 위상!

‘물론 언데드 군단도 만만치 않다.’

향연의 산맥에 서식하는 언데드는 일반형 언데드보다 질기고 강하다.

아무리 쓰러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달려드는 되살아난 병사들!

스켈레톤은 두개골만 남아서도 적들을 깨물고, 유령계열 언데드는 전장을 떠돌며 사기를 토해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당연히…….’

최상급 언데드, 파멸의 기사!

금단의 마법을 시전하고 생기를 빨아먹는 칼날을 휘둘러 공격한다.

다섯 기의 파멸의 기사는 각 군단을 이끌며 용에게 거세게 대항했다.

그러나 그러한 언데드 군단의 기세에도 전장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바로 지리적인 불리함 때문이었다.

‘빛의 구덩이.’

구덩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광휘가 언데드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용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일부러 언데드를 구덩이 쪽에 몰아넣었다.

언데드 군단은 빛에 심하게 노출될수록 맥을 못 추고 몹시 약해졌다. 그러다 빛나는 구덩이에 추락한 언데드는 나오지 못하고 녹아버렸다.

“끄아악! 빛! 빛이 넘친다!”

[아크 리치의 언데드 군단이 신성한 빛에 노출되어 힘을 잃습니다.]

[모든 언데드의 전체 능력치가 38%씩 손실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은 능력치를 잃게 됩니다.]

‘내가 언데드 군단을 빛의 구덩이로 유인했던 것이 신의 한 수였군.’

빛의 구덩이는 언데드에게 지옥과 같은 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근처에만 있어도 능력치가 떨어지고, 가까이 접근하면 몸이 녹아내린다.

애당초 감당이 가능한 빛이었다면 리치가 진작 구덩이를 메웠겠지.

전쟁에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면 절반은 승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위압감 넘치는 전투 구경을 그만 끝내고, 근질대는 손에 칼을 쥐었다.

‘감상은 여기까지. 언제까지나 전투를 용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무엇보다 몬스터를 죽여야 능력치를 올리고 성장할 수가 있으니까!

나는 대검을 쥐고 용들이 날뛰는 매서운 전장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20마리가 넘는 대형 몬스터가 난전을 벌이니 전쟁터는 혼돈의 도가니탕!

‘멍청하게 앞에 나설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몬스터의 끝마무리.’

용들이 날뛰는 전장에 함부로 뛰어들었다가 개죽음당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득도 존재한다.

용의 꼬리에 휩쓸리고 브레스에 그슬려 반편이 된 언데드가 사방에 넘친다.

“딱딱!”

나는 발을 깨물려고 안간힘 쓰는 해골바가지를 밟아서 부숴버렸다.

파각!

[몹시 희귀한 3천 년 묵은 최하급 스켈레톤을 파괴해버렸습니다.]

[힘이 1 올랐습니다.]

이거야말로 완전히 거저먹기!

나는 용들의 주변만 교묘히 다니며 몸체를 잃은 언데드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이빨을 딱딱대며 굴러가는 해골바가지 37개를 부숴버렸습니다.]

[힘이 15 올랐습니다.]

[용의 포효에 기운을 잃은 레이스 부대를 마법으로 소멸시켰습니다.]

[마력이 12 올랐습니다.]

간간이 올라가는 중요능력치!

나는 흡족해하며 문구를 보았다.

‘장난 아니게 가성비가 좋군. 이런 전쟁터라면 수십 번도 다니겠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가끔 용들에게 짓밟혀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것!

다행히도 난 창천의 여제를 죽이며 성장한 민첩과 회피율 덕분에 어지간한 공격도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목에 걸고 있는 부적!

‘일회성 생존 부적이라고 했던가.’

카티에, 헤르탄, 퀸소히니베가 대륙에서 구해다 준 히든 피스 중 하나!

찰랑이는 은빛 동전 부적은 전장에서 커다란 위기를 예견하게 해준다. 그 부적 덕분에 난 용들의 굵직한 공격을 미리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마법은 회피불가고, 전장의 싸움이 끝나면 알아서 파괴되지만.’

나는 거인 좀비들을 휩쓰는 용의 꼬리를 미리 예견하고 피해가며 관찰했다.

‘용은 비늘의 빛깔마다 내뿜는 브레스의 종류가 천차만별이군.’

푸른 용의 브레스는 눈송이가 뒤섞였고, 노란 용은 전격, 붉은 용은 아주 뜨거운 용암, 나머지 얼룩처럼 뒤섞인 빛깔의 용들은 화염이었다.

그만큼 비늘의 빛깔은 용의 개성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리라.

개중 가장 강한 것은 단연코 본드래곤이 내뿜는 흑색의 브레스였다.

‘다른 용들과는 차원이 다르군.’

근본을 짐작할 수 없는 흑색 브레스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다. 흑색 브레스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조차 남지를 않았다.

“카아아악!”

피를 버무린 괴생물체는 겁 없이 본드래곤을 녹여 삼키려다가 브레스에 흔적도 없이 궤멸되고 말았다.

용에게 짓밟힐수록 언데드 군단은 구덩이에 밀접한 곳까지 밀려 버렸다.

완전히 빛에 노출된 언데드 군단!

[아크 리치의 언데드 군단이 신성한 빛에 노출되어 힘을 잃습니다.]

[모든 언데드의 전체 능력치가 74%씩 손실되고, 탈진당합니다.]

[언데드의 생존력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뼈와 살이 무뎌집니다.]

5만이었던 언데드 중에 남아 있는 숫자는 고작 4천 남짓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몸이 성치 않았고, 신체 부위 어딘가가 파열되어 있었다.

반면에 용들은 전보다 막대한 기세로 언데드를 궁지까지 몰아넣었다.

“으아아……!”

“가망……! 없……! 힘도……! 없!”

언데드조차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구덩이에 몰려 후퇴하지도 못했다.

파멸의 기사도 무려 셋이나 죽었다.

살아남은 파멸의 기사 중 하나가 두려움에 미친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 금역에서 용들이 출현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크 리치 님께 서둘러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 한다!”

그 파멸의 기사가 급하게 뛰었다.

하지만 이미 독 안에 든 쥐였다.

“크아악!”

결국 용들에게 사지가 찢겨 사망!

마지막까지 생존한 파멸의 기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분노하여 소리쳤다.

“네 이놈! 배신한 군단장 자식!”

“응, 내가 신수가 훤해지긴 했지?”

“으아아악! 죽여 버리고 말겠어!”

내가 능청스레 인사하자, 파멸의 기사가 분노에 사로잡혀 돌격해왔다.

난 밀밭기사단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집중해서 대검을 쥐고 호흡했다.

“빈틈투성이로군!”

전력을 실은 기사의 칼이 가슴 한복판에 다가섰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텅!

시커먼 칼날이 불멸자의 갑의를 꿰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크허헉! 무, 무슨, 갑옷이……!”

파멸의 기사가 그 반동으로 뼈에 금이 간 팔을 움츠리며 경악할 때, 내 검이 암기(暗氣)를 두른 칼날을 부숴버리며 놈의 머리를 박살 냈다.

[파멸의 기사 호라켄의 죽음 이후의 삶을 종식시켰습니다.]

[최상급 언데드를 사냥한 공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6씩 오릅니다.]

[저주받은 검(언데드 전용)과 파멸의 기사의 인장을 얻었습니다.]

[아크 리치 소속의 언데드 군단이 전원 궤멸되었습니다.]

[당신의 배신과 군단의 전멸로 인해 아크 리치가 크게 진노합니다!]

* * *

떠나간 원정대를 산맥에서 찾느라 반나절의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다. 그나마도 날벌레로 변신한 용들이 길을 찾아주지 않았으면 오늘은 산길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용들은 불만을 드러냈다.

“어째서 또 벌레로 변해야 하나?”

“댁들 먹일 군량이 없습니다. 기습해야 할 상황이 또 생길 수도 있고.”

“크아악! 이래서 인간들이란!”

용들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래도 순순히 몸을 바꿔 벌레로 변신했다. 낙인까지 찍히며 내가 아크 리치를 속이는 것을 용들도 곁에서 봤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뢰가 쌓였다는 거겠지.’

내가 야영지에 돌아오자 원정대원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카티에가 뛰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난 순간 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무작정 뛰어든 소녀를 안았다.

“내가 떠나고 어떻게 됐었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 퀸소히니베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몸이 멈췄던 것은 어제 자정에 끝났던 것이야. 하지만 내 노예가 보이질 않아서 몹시 심통이 났었지.”

헤르탄이 그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범철이 탈영했단 소문이 돌며 원정대의 사기가 꺾이고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 저희도 오늘이 지나면 범철을 찾으러 몰래 떠나려 했습니다.”

“미안해요. 사실 어젯밤에는 아크 리치의 힘에 이끌려 발걸음이 멋대로 움직였거든요.”

카티에가 화가 난 얼굴로 울먹이며 내 가슴을 부러뜨릴 것처럼 때렸다.

“대장! 하룻밤 동안 없어져서 걱정했어요. 나 몰래 어디 다녀왔어요?”

“언데드 5만 마리 잡고 왔다.”

“네?”

나는 피곤해서 하품을 하고는 멍한 표정을 짓는 카티에를 내려다봤다.

“이제 군단은 멸했고, 아크 리치만 남았군. 그런데 식사는 언제 하냐?”

* * *

“아크 리치의 언데드 군단을 하룻밤 사이에 몰살시켰단 말입니까?”

일레아흐가 빙의된 히사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막에서 그녀와 단둘이서 대면하고 있었다.

고작 10분도 잠들지 못하고 간이의자에 구겨 앉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쉽던데요.”

“…….”

푸른 눈빛의 히사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크 리치의 언데드 군단을 몰살하기 위해 140개가 넘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모두 헛짓이 됐군요.”

“그래서 불만 있습니까?”

“아니요. 열의가 끓어올랐습니다. 아크 리치만 남았다면 정말로 우리가 승전할 확률이 높아졌으니까.”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나는 묵은 빵을 씹으며 아크 리치와 대면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히사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마구 커졌다.

“아크 리치가 회귀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예. 전생에서 아크 리치와 싸울 때는 그런 기미를 못 느꼈습니까?”

“전혀요. 전쟁 시 패턴은 같았고, 아크 리치는 늘 말이 없었으니까.”

일레아흐마저 속일 정도라면 아크 리치가 그만큼 영악하다는 얘기다.

아크 리치가 120회차에서 회귀할 수 없는 척하던 연기를 깨고 본심을 드러낸 것은 나를 얻기 위해서였다.

‘본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도대체 그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간 회귀할 수 없는 척 연기해오다가 나를 얻어 이루려는 그 목적은.

그건 산맥의 정상에서 아크 리치의 본체와 대면해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지.

히사네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크 리치가 회귀했다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군요. 심각합니다.”

“전혀요. 오히려 유리해졌는걸요.”

내 말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에게 다양한 재능이 있다지만, 무엇보다 회귀한 녀석의 뒤통수를 치는 것만큼 내가 잘하는 것이 어디 또 있을까.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미소를 지었다.

“놈이 회귀했다면, 내게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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