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69화
탁!
날벌레 한 마리가 내 뺨을 때렸다.
멍 자국이 들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충격이 느껴지며 고개가 꺾였다.
……남들 눈엔 악행으로 보였겠지.
“뭐 하는 거지?”
“목이 뻐근해서 풀었다. 리치는 기지개를 안 켜서 모르나?”
적당히 빈정대며 무마하고 진정시키기 위한 눈초리를 보냈다.
윙윙대는 날벌레 떼가 가라앉고 나서야 나는 안심하고 팔짱을 꼈다.
“네 편에 섰는데, 힘은 언제 줘?”
“타락할 필요조차 없는 악인이야말로 내가 가장 선호하는 인간이다.”
아크 리치가 손을 뻗자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가슴팍이 뜨거워졌다.
[저주의 낙인이 새겨졌습니다!]
[해당 낙인은 어떠한 축복과 치유로도 영원히 지울 수가 없습니다.]
[원정대 신분이 소멸됐습니다.]
[500의 악행 지수가 올랐습니다.]
[아크 리치 군주를 모시는 5만의 군단장(임시)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타락이로군.’
왜, 너무나 진부한 무용담에서 꼭 단골처럼 한 명씩은 나오지 않는가.
초반에 유능한 인재쯤으로 여겨지다 나중엔 타락해 적으로 돌아서는, 짜증스럽고 화를 유발하는 인물상.
아무래도 내가 그런 인물인가 보다.
‘어째서 악당들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지 알겠군. 힘이 넘쳐나잖아.’
6만의 원정대와 일행을 배신한 나에게 아크 리치는 힘을 부여했다.
본래 하얘야 할 흰색 동공이 검게 물들고, 낯빛이 아주 푸르게 변했다. 인간과 시체 사이에 선 나의 형상이지만, 힘과 마력이 마구 넘쳐났다.
[군주의 정수가 깃들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5% 오릅니다.]
[불멸자의 갑의가 공명해 군단장의 위상과 지배력을 늘립니다.]
아크 리치가 내린 힘은 불멸자의 갑의와도 궁합이 굉장히 잘 맞았다.
‘완전히 고위 언데드로 각성하면 성 몇 개는 그냥 집어삼키겠는데?’
그렇게 유혹에 혹할 때 날벌레 세 마리가 나의 뺨을 따다닥 치고 날아갔다.
난 고개를 휘저어 정신을 차린 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리치를 보았다.
“이제 네가 나의 상관이군.”
난 죽여야 할 몬스터를 군주로 모시게 됐지만,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나 아크 리치는 오히려 그런 나의 태도를 호의적으로 여겼다.
“쉽게 복종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약하다는 것. 굳어진 체제에 반하는 너야말로 내가 바라던 악인이다.”
가슴팍에 새겨진 해골 모양의 낙인이 리치의 말을 들을 때마다 뜨거웠다.
철두철미한 아크 리치는 만에 하나의 위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다.
“이제부터 너는 내게 반항하면 죽음보다 끔찍한 벌이 몸을 덮치게 될 것이다. 낙인을 달았다면, 굳이 내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놈을 올려다보며 말없이 순응한다.
아크 리치가 의자에 앉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명령했다.
“내일 밤부터 주어진 병력으로 원정대를 격퇴하라. 싸움의 결과물에 따라 알맞은 보상을 내릴 것이다.”
내가 엄숙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크 리치의 형상이 사라졌다.
나는 놈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놓인 뼈다귀 의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크 리치가 정말로 회귀를 했다면, 한 가지 모순점이 생겨난다.
‘아크 리치에게는 회귀자 살해 재능이 발동하지 않았다.’
회귀한 생명체를 살의를 담아 노려 보면 살해를 위한 변수가 창출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크 리치를 상대로는 재능이 발동하지를 않았다. 그건 그저 ‘회귀한 인간’이 아니라 ‘회귀한 몬스터’ 이기 때문일까?
‘아니. 종족 때문에 그럴 리 없어.’
지옥의 시련방에서 살덩이 문도 당시 인간이 아니었지만, 회귀를 했기 때문에 살해 재능이 발동되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추리해 보고 결론을 내렸다.
‘방금 저 녀석은 본체가 아니다.’
아크 리치의 마력은 일레아흐에게 들었던 것에 비해 미약한 축이었다. 거기다 덩치가 훨씬 작기도 했다.
그 이유는 방금 그것이 본체가 아니라 리치의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지만 분신을 통해서 말을 전달하는 마법.’
아크 리치의 분신마법에 관해선 일레아흐에게 설명을 들은 바가 있다.
‘아크 리치의 활동반경은 산맥 정상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래서 분신의 모습으로 내게 나타난 거겠지.’
나는 목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고작 분신에게 조였던 힘이 그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니 등골이 섬뜩했다.
아크 리치와 했던 대화를 더듬어보다가 나는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왜 성녀부터 죽인다고 했지?’
굳이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요즘 아주 가끔 꾸는 그 악몽.
어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카티에를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됐다. 지금 문제랑 상관없어.’
잡념을 떨쳐내고 고개를 휘젓는다.
‘어찌 됐건 아크 리치를 살해하려면 무조건 본체와 접선해야만 한다.’
아크 리치 본체가 자리 잡은 곳은 향연의 산맥 꼭대기.
분신을 이용한 것을 보면 본체는 아직 정상에 있음이 확실했다. 회귀할 수 없는 척 연기했다 해도 활동 반경까지 속이진 못했을 거다.
나는 가슴팍의 낙인을 쓸었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지만.’
* * *
‘대낮이 기분 나쁘다니, 묘하군.’
저주의 낙인이 새겨져서일까.
나는 ‘시간’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저 대낮이라서, 그냥 낮이라는 이 시간대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이런 게 언데드의 기분인가?’
나는 뼛가루가 뒤덮힌 산기슭을 걸으며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향연의 산맥에 언데드가 넘쳐 나는지 알 것 같군.’
하루 종일 먹구름이 끼었고 안개가 뿌옇기 때문에 햇살이 거의 없었다. 낮을 싫어하고 햇빛에 약화되는 언데드에게 이곳은 천혜의 터전이다.
나는 가파른 산길을 걸어서 수백 킬로미터의 평원에 도달했다.
절벽에 서자 평지가 대번에 보인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저주의 낙인이 확연히 대답해줬다.
“땅에서 깨어나라. 병사들이여!”
훤한 대낮.
난 5만 마리의 언데드를 일으켰다.
“끄어억!”
“생명을…… 탐하고 싶다……!”
“군단장께서…… 나를 부르셨다!”
흰 땅이 갈라졌다. 그 속에서 언데드가 썩은 손을 불쑥 내밀며 마구 튀어나왔다.
스켈레톤이나 구울처럼 최하급 언데드가 득실거렸고, 와이트나 묘지기 따위의 흔치 않은 언데드도 넘쳐났다. 사방에 썩은 내가 넘쳤고, 레이스처럼 으스스한 혼령이 싸돌아다녔다.
다섯 마리밖에 없는 최상급 언데드, 파멸의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새 군단장이시여! 명령을!”
검은 무구를 장비한 파멸의 기사!
살아생전 대륙에서 손꼽히는 기사를 리치가 손수 되살렸다고 한다.
거인 만한 체구를 자랑하는 파멸의 기사는 최상위권 강인함을 지녔다.
나는 만족스럽게 내게 고개를 조아리는 5만의 언데드 병력을 보았다.
‘원래 산맥에서 밤마다 원정대를 덮쳤어야 했을 몬스터의 총집합이군.’
리치의 가장 무서운 점은 집단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전투 때마다 언데드 군단을 거느리며 고위 흑마법으로 강화시킨다.
숫자는 5만으로 원정대와 비슷하지만, 그 화력은 감히 비교조차 불허한다.
‘확실히 서로 맞붙으면 섣불리 원정대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군.’
나는 그러한 아크 리치의 수하인 언데드 군단의 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산맥에 서식하는 모든 언데드가 모였다고 봐도 되겠어.’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슬라임처럼 역한 산성을 지닌 붉은 생명체였다.
피를 버무린 거대한 괴생물체!
수백의 사슬로 엮인 괴물은 수십 마리 언데드를 삼켜가며 포효했다.
“크모아아-!”
피아 식별을 못하고 아군마저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끔찍한 괴물!
평범한 인간이라면 손가락 끝만 대더라도 금세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잘만 쓰면 약소국도 허물 수 있을 만한 대병력을 향해 내가 명령했다.
“빛의 구덩이를 향해 전진하라!”
낙인에 의해 목소리가 확장되었다.
나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언데드 군단이 마구 움직였다.
빛의 구덩이!
향연의 산맥에서는 몹시 드물지만, 틈틈이 빛이 들어오는 장소가 있었다.
‘햇빛 한 점 없는데도 산에 잎사귀와 나무가 자라날 수 있는 이유지.’
큰 구덩이에서 생명의 힘을 품은 광맥이 숲의 뿌리를 자라나게 한다.
나는 일레아흐가 회의 때 이곳에 관해 거론했던 말을 돌이켜보았다.
‘빛의 구덩이는 산맥에서 유일하게 언데드에게 불리한 지형입니다. 하지만 아크 리치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곳으로 군세를 이끌 리는 없죠.’
일레아흐는 이곳에 언데드를 모는 전략을 구상했었지만, 거기에 당할 만큼 아크 리치가 허술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광휘가 뿜어져 나오는 구덩이에 모이자 언데드 군대가 마구 경악했다.
“카아악! 빛! 역겨운 빛이다!”
“됐어……! 저긴 가기 싫어……!”
“빛! 두려움! 꺼져라!”
거대한 구덩이 주변에서 오밀조밀 서로의 등을 떠미는 언데드 대군!
갑의 덕분에 지배력이 늘었으나 현재 언데드의 충성도로는 이게 한계다.
두뇌가 비상한 파멸의 기사들은 벌써 나에게 악담을 수군대고 있었다.
“새 군단장이 확실히 수상하다.”
“왜 어둠과 함께하는 우리를 이 역겨운 빛의 장소로 이끈 것인가?”
“인간 냄새가 날 때부터 알아봤지.”
“저런 멍청이를 군단장으로 모신다면, 나의 경력에도 금이 가겠군.”
영향력이 막대한 리치라면 모를까, 불확실한 명령에는 아무리 머리가 나쁜 언데드라도 쉽게 충성치 않는다.
빛의 구덩이에 몰려들수록 군단의 충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 군단장을 향한 언데드 군단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군단장에게 불만을 지닌 언데드 병사 숫자가 증폭하고 있습니다.]
[불만을 가진 언데드의 숫자가 절반을 넘어서면, 반란이 일어납니다.]
‘계산대로만 된다면 문제는 없다.’
나는 차분하게 팔짱을 끼고서 조금씩 달궈지는 낙인을 옷깃에 감췄다.
마침내 전군이 구덩이 주변에 집합됐을 때, 숲의 등줄기에 올라섰다.
나는 군단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모두 주목!”
언데드 대군이 불만스럽게 나를 봤다.
만일 반역이 일어나면 불멸자의 갑의를 입었더라도 뼈도 못 추릴 거다.
“확실히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을 안다. 인간을 배신하고 여기에 섰으니까. 그래서 말하겠다.”
나는 원정대와 동료들을 배신하고 비열하게 아크 리치의 편에 섰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저열한 행동과 욕지거리를 감수하겠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짓은 이러하다.
“훌륭하다. 그냥 나를 믿지 마라.”
나의 궤변에 언데드 군대가 술렁이며 당황스러운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보통 자길 믿으라고, 신뢰를 되찾기 위한 연설을 해야 할 순간 아닌가?
그러나 난 저것들이 기대하고 바라마지 않는 평범한 권력자가 아니다.
나는 천천히 양손을 올렸다.
손바닥을 마주하여, 서로 부딪친다.
짝!
“너희의 의심은 합당하다. 찬사를 표한다. 너희는 언데드가 멍청하단 편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배신자를 믿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다시 한번 손뼉을 부딪친다.
손바닥을 마주하여, 서로 부딪친다.
짝!
그것은 진심이 담긴 찬사의 박수였다.
그러자 조금씩 저 둔한 언데드들조차 수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너희의 의심이 합당하다고 말한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내가 이어서 당당히 손을 올렸다.
누가 그 모습을 멀리서 본다면, 마치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연설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짓고서 말한다.
손바닥을 마주하여, 서로 부딪친다.
짝!
“이제 너희도 배신할 거니까.”
그렇게 세 번째 박수를 쳤을 때, 소란스럽던 날벌레가 날아올랐다.
아크 리치는 나를 없애는 것이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쉽다고 했다.
어디 정말로 그런지 한 번 볼까?
그 찰나의 순간, 눈을 감아버린 누군가는 평생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가장 약한 생물이 가장 강대한 생물로 변하는 모습을 못 봤으니까.
날벌레가 큼지막한 용으로 변하며 끔찍한 울음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크라아아악-!”
햇빛이 없는 산맥의 아침.
스물다섯 마리의 용이 5만의 언데드 군단을 향해 거칠게 날아들었다.
* * *
황색대륙의 용들은 우리가 본부를 떠나올 때부터 줄곧 함께하고 있었다.
정확히 스물다섯 마리 날벌레로 변해서.
용이 날벌레로 변신해 있다가 적을 덮친다는 신선한 발상을 고안한 것은 놀랍게도 바로 퀸소히니베였다.
‘비록 나는 중립을 어겨 변신을 못 하지만, 용들이 날벌레로 변해 있으면 기습에는 분명 최적일 것이야.’
‘나쁜 발상은 아니군요. 아크 리치는 우리가 용과 함께한다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무엇보다 군량도 아낄 수 있으니까요.’
물론 자존심이 거센 용들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 고작 벌레새끼로 변하라고?’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용들의 불만을 잠재운 것은 여왕 레샬피티에였다.
‘그만! 승전을 위해서라면 잠깐의 치욕은 인내할 수가 있어야 한다.’
의견을 제시한 것이 여왕의 딸이고, 여왕 본인조차 그 전략에 찬성했다.
여왕이 먼저 솔선수범하며 변신하자, 용들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전에서 유일한 걱정은 날벌레로 변신한 용이 새한테 먹히거나 손바닥에 짓이겨져 사망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용들은 벌레로 변신해도 제법 강인한 편에 속해서 함부로 개죽음(?)을 당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원래는 아크 리치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용들이 기습할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 또 다르다.
아크 리치의 전 군단을 싹 쓸어버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칠 수야 없었다.
‘다행히도 신호는 제대로 맞았고.’
내가 박수를 세 번 치면 용들은 본모습을 드러내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용과 언데드의 싸움을 봤다.
‘상대가 5만이라도 확실히 다르군.’
애당초 언데드와 불은 상극이다.
시체가 불타오르는 것을 연상하며 언데드는 대개 불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용이 내뱉는 브레스는 그야말로 최강의 불꽃이나 다름없었다.
“끄아악……!”
“군단장이…… 배신했다……!”
“역시! 인간! 괜히 믿었……! 악!”
용들의 불꽃에 언데드가 태워진다.
전설에서나 볼법한 무자비한 광경!
나는 배신당한 호구들의 최후를 관람했다.
‘아크 리치와 직접 전투를 벌이기 전에, 잔챙이는 모두 제거해놓는다.’
역시, 배신은 두 번 때릴 때가 진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