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68화
우선은, 침착하자. 어째서 지금 여기서 나 혼자만 움직일 수가 있지?
스스로 의구심을 품다가 불현듯 왼쪽 손등을 스쳐보았다.
악마의 펜타그램이 빛나고 있다. 날이 어두워진 밤이라 그 핏빛이 유독 더욱 눈에 띄고 진해 보였다.
‘악마의 펜타그램은 또 왜 빛나는 거고?’
그런데 바로 그때, 나는 다리 아래로 힘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힘에 휩싸인 나는 강제로 혼자 숲속으로 걷게 되었다. 두 다리를 자르지 않는 이상, 끌려가는 힘에 반항할 수는 없었다.
‘제기랄, 내 발이 왜 이래?’
식은땀을 흘리며 들어선 음침한 숲은 어스레한 빛이 깔려 있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숲속의 가장 깊숙한 곳.
진홍색 로브를 입은 약 3미터의 해골이 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 언데드는…….’
분하지만 힘에 휩싸인 몸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귓가에서 날벌레가 윙윙대는데도 나는 그저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뼈마디가 굵고 음침한 해골이 오만하게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봤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는 인간이 불길함을 품고 찾아왔구나.”
그것은 익숙한 음성이었다. 산맥의 관문에서 들었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질척대는 그 목소리.
나는 해골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크 리치.”
* * *
수만의 원정대를 단번에 멈추게 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당연하지 않은가.
아크 리치, 황색대륙의 지배자.
한정된 지역에서 사망 회귀를 금할 만큼 신에게 가장 근접한 몬스터.
‘하지만 어째서?’
그동안 들어왔던 전생 패턴에 의하면 아크 리치는 아직 출현할 시간이 아니다. 침입자가 오더라도 리치가 직접 나서는 것은 마지막이나 되어서다.
그러나 아직 전쟁의 초반임에도 아크 리치는 스스로 몸을 드러냈다. 마법으로 원정대를 멈추게 하면서까지.
‘아직 생명그릇도 찾지 못했는데.’
지금은 리치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
막상 마주하니 너무 끔찍한 상황.
아크 리치가 나를 보며 말했다.
“막상 마주하니 참으로 끔찍하군.”
“뭐?”
내가 해야 할 소리가 아크 리치에게서 튀어나오자 당황스러웠다.
전생에서 누구와도 말상대를 하지 않고 묵묵히 학살했다던 아크 리치.
그런 아크 리치가 내게 말을 했다.
“네가 지닌 불길함은 일개 인간의 것이 아니다. 나조차 뛰어넘는군.”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아크 리치보다 불길하다니?
하여간 리치가 완전한 마력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다리가 떨려왔다.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무시할 수 없는 투기가 배어 있다.
대륙 하나를 평정할 수 있는 지배자의 위용.
‘그런데 어째선지 일레아흐에게 들었던 것보다…… 덩치가 작군.’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억지로 입술을 비틀었다.
“어째서 원정대를 멈춰 세웠지?”
“되묻겠다. 왜 나를 죽이러 왔나?”
“인류의 회귀를 멈추기 위해서.”
“그러한가. 그러한 이유에서였나.”
아크 리치는 손가락뼈를 모으면서 조용히 나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놈이 내 손등에서 빛나는 펜타그램을 응시한다.
“그래서 키 작은 자의 문양이 네게 있는 것인가? 그게 놈의 계획인가.”
키 작은 자?
내가 왼손을 들어 보였다.
“이 펜타그램을 통해서 나를 돕고 있는 조력자의 정체를 알고 있나?”
“답할 의무도, 이유도 없다.”
“그럴 거면 나랑 대화는 왜 하지?”
“내가 완전한 힘을 쓰지 않더라도 네 생명을 갈취하는 것은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 간단하다. 한 번 사는 자여.”
아크 리치가 손뼈를 아주 천천히 감싸 쥐자 힘이 나를 억눌렀다.
으윽!
목덜미에 엄습하는 끔찍한 고통에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어억!”
“내가 너희의 진군을 멈춰 세운 이유는 널 직접 만나기 위함이었다.”
나와 단둘이서 만나기 위해서?
내가 목을 억누르는 고통에 비명을 내뱉자 쉬어버린 목소리가 나왔다.
“도대체 왜……!”
이런, 빌어 처먹을!
목을 조이는 힘이 너무 강력하다. 나는 양손을 올리다가 순간 멈칫했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실핏줄이 섰는지 눈이 따가울 때, 나는 그 순간 가장 큰 의문을 던졌다.
“왜…… 변수가 이렇게 많아졌지?”
120회차 아크 리치 원정에서 벌어진 변수는 너무하다 싶을 수준이다.
산맥 관문부터 아크 리치가 경고를 했고, 실제로 산맥에서 죽으면 회귀를 할 수 없는 마법진이 그려졌다. 거기다 아크 리치가 예정보다 일찍 출현해 원정대까지 무력화시키다니.
내가 회귀한 것은 아니지만, 들었던 전생과 일치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묻고 나서 나는 후회했다.
회귀를 모르는 몬스터 따위가 방금 내 질문을 이해할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아크 리치의 살갗 없는 두개골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서 회귀할 수 있는 것이 오직 너희뿐이라고만 생각했나?”
* * *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방금 말을 들은 귀가 의심스럽다.
등골에 식은땀이 타고 흐른다.
‘……뭐?’
아크 리치가 손뼈를 펼치자 나를 억누르던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
“컥! 컥!”
나는 목을 감싸 쥐며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세상에서 회귀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 아니었나?”
“이번이 분명히 120회차였지. 너희가 쳐들어온 것은 21번째이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일레아흐가 회의에서 설명해줬던 전생의 원정출정 횟수와 일치한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물었다.
“네가…… 회귀할 수 있다고?”
“방금 답변으로는 부족한가? 너희 총대장인 일레아흐란 계집이 얼마나 참혹히 죽어갔는지 말하여 볼까. 아니면 너희가 외우고 있는 전쟁의 패턴? 대체 무엇부터 듣기를 원하나.”
“……말해봐라. 전부.”
아크 리치가 턱뼈를 달칵이며 전생의 이야기를 오만하게 들려줬다.
나는 1회차라 전생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아크 리치는 회의서 들었던 대부분의 전생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모두 듣고서야 나는 확신했다.
‘아크 리치는 회귀할 수 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모두가 적이 회귀할 수 없어서 그나마 승산 있다 여겼던 원정이었다.
그런데 몬스터인 아크 리치가 인간처럼 회귀까지 할 수 있다고?
나는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없었다.
‘이건 뭐, 세계 최강자나 다름없군.’
회차 목표 난이도가 말도 안 된다.
아크 리치에게 원정대가 유일하게 앞선 것이라곤 전생의 지식이었다. 그 지식은 1천의 회귀자가 6만의 오크를 넘어서게 할 만큼 귀중하다.
그런데 그런 귀중한 전생 지식을 저 아크 리치 또한 보유하고 있다고?
‘……잠깐만.’
그런데 그때 의문 하나가 솟았다.
“네가 회귀할 수 있다면, 어째서 회귀할 수 없는 척 연기해온 거지? 매 삶마다 전쟁형식이 같았다는데.”
“그동안 ‘패턴’을 유지했던 것은 ‘적들’에게 오만한 착각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몬스터가 늘 똑같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현실이 놀이인가? 하찮고 가엾군.”
“우리를 방심시키기 위해? 네가 굳이 그런 짓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내가 회귀할 수 있단 사실을 숨겨야 했으니까. 지금부터 할 이야기다.”
아크 리치가 여유 있게 도드라진 턱뼈를 까닥였다.
“내가 현재 회차까지 지켜온 모든 수칙을 어기며 지금 모습을 드러낸 것.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것. 그것은 모두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다음 말이 또다시 나를 흔들었다.
“바로 너와 거래하기 위해서다.”
이거야말로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설마 죽여야 할 몬스터의 입에서 ‘거래’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줄이야.
“나와 거래를 하겠다고?”
“그렇다. 그래서 나의 비밀을 고백해 너의 신뢰를 갈취하는 것이다.”
아크 리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놈의 뼈에서 검은 마력이 끊었다.
“나는 때를 기다렸다. 회귀할 수 없는 것처럼 반복해오며. 누군가 올 때마다 지긋지긋한 연기를 해오며. 수없이 헛물을 들이키며. 부디 나의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걸맞은 인간이 산맥에 찾아오기를. 그리고 기어코 120회차에서 키 작은 자의 조력을 얻는 너를 보고야 확신이 들었다!”
아크 리치의 마지막 외침에 숲속이 절규하는 것처럼 가지가 흔들렸다.
나는 순간 놈이 아주 살짝 본모습을 드러냈다고 느꼈다.
긴장해 양손을 펼쳤지만, 다행히도 주위를 감싼 힘은 금세 잦아들었다.
“이 황색대륙의 지배자가, 네게 아주 흔치 않은 거래를 제안하겠다.”
아크 리치가 나를 가리켰다.
“나의 편에 서라. 그럼 살 수 있고 의문 또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놈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너의 밑으로 들어가라는 건가?”
“밑에서 충실히 복종한다면 옆에 설 수 있도록 해주지.”
아크 리치의 목소리에는 오만함이 배여 있었고, 나는 진의를 파악했다.
‘성실한 노예가 되라는 뜻이군.’
대화를 돌이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본인의 비밀을 고백했다곤 하지만, 아크 리치는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
‘이곳에서는 회귀할 수 없으니까.’
내가 아닌 누구였어도 마찬가지다.
아크 리치는 만일 협력을 거부할 시 상대를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죽더라도 과거로 돌아가서 이 비밀을 유포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래서 아크 리치가 회귀할 수 있다는 비밀은 계속 엄수되는 것이다. 자신의 비밀을 공개해서 상대를 안심시키고 정작 손해 보지는 않는다니.
주먹을 꽉 쥐며 마른침을 삼킨다.
‘과연 리치답게 치밀한 몬스터군.’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원정대 사이에서 내게만 거래를 제안하는 거지?”
아크 리치는 충분히 원정대를 쓸어 버릴 힘을 지녔다고 상정되었다. 그런데 굳이 번거롭게 내게 거래 따위를 제안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의 목적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인간이 네 녀석이기 때문이다.”
“너의 목적이란 게 도대체 뭔데?”
“그것은 네가 거래에 찬동했을 시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역시나 쉽게 가르쳐주진 않는군.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정리해본다.
우선, 아크 리치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나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래서 원정대를 멈추고 숲속으로 나를 불러내 거래를 청하는 것이다.
당황스럽지만 거래내용을 듣고 정보를 수집하는 편이 이득일 것이다.
나는 짐짓 관심 있는 척 떠보았다.
“만일 내가 너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그저 말로만 찬동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내가 너에게 신뢰를 줬으니 너도 나에게 그만한 믿음을 줘야겠지. 행동으로 입증하여라.”
아크 리치가 선언했다.
“네 원정대를 직접 숙청하도록 해라. 그게 장대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함께 온 원정대를 죽이라고?”
“나의 부하들을 빌려주도록 하지. 신뢰를 위한, 그리고 너의 자질을 점검하기 위한 시험이기도 하다.”
[아크 리치의 비밀스러운 거래!]
[황색대륙의 지배자 아크 리치가 당신에게 동맹을 제안하였습니다.]
[비밀거래를 승낙할 시, 아크 리치를 군주로 모시게 되며 저주의 낙인이 가슴팍에 새겨지게 됩니다.]
[일시적으로 아크 리치 소속 5만 언데드 군단과 피를 버무린 괴생물체의 지휘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원정대와 싸워 승전할수록 아크 리치를 향한 충성도가 오릅니다.]
[충성도를 소모해 진급하거나, 군주의 힘을 빌려서 시체군단장의 잔혹유해검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일 원정대를 전멸시킬 경우 군주에게 2인자 칭호를 받게 되며 고위 언데드로 종족이 변경됩니다.]
[원정대 배신 시 원정대원 신분이 소멸되며 악행 지수가 생성됩니다.]
나는 머리를 바쁘게 회전시켰다.
아군인 원정대를 척살하고 오라니.
‘결국 쓰레기 짓을 하라는 거군.’
동료를 배신하고, 모두 죽이라니. 아무리 목숨이 걸린 협박이라지만,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수락하겠다. 성녀부터 죽이지.”
“과연, 내가 눈여겨본 인간이다. 잠재된 불길함만큼 인간성도 역하군.”
6만의 원정대와 일행을 배신하고, 나는 아크 리치의 편에 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