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64화
한평생 주목받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나에게 시선의 독점이란 낯설다.
그런데 어째 회귀 시점 이후로 관심을 독차지하지 않은 적이 없군. 어쩌면 나는 삶을 고되고 애달프게 사는 재능도 타고난 것이 아닐까?
“허억! 버, 범철! 분명 범철이다!”
“범철이 본드래곤을 타고 왔어! 그것도 용의 여왕 개체라고 했잖아!”
“대체 어떻게? 설마 그가 최초로 용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은…….”
날 보는 사람들을 마주 보자니 다들 눈과 입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져 있다.
하기야 본드래곤을 타고 온 남자 앞이면 나라도 저런 표정이었겠지.
나는 암론과 악수하며 속삭였다.
“뒷얘기는 술잔이나 기울이면서 합시다. 지금은 내가 좀 바쁠 거라서.”
“예?”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지나쳐 모처럼 만나는 사람들과 재회했다.
“간만입니다. 안도니크.”
안도니크가 활기차게 웃었다.
“재회해 반갑다, 범철. 우리 족장님도 보고 싶다며 전해 달라고 했다.”
나도 그녀를 마주 보고 웃었다.
“물론 저도 반갑습니다. 아. 떠날 때 주셨던 라임 차, 잘 마셨습니다.”
“아, 미안하다. 우리가 라임을 잘못 골라줬다. 그건 덜 익어서 가축들한테만 먹이던 거다.”
“…….”
오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본부 앞의 오크들은 내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곧장 함성을 내질렀다.
“버므철!”
“범처르!”
미궁탐사 전적 때문에 오크들은 내게 크나큰 호의를 갖고 있었다.
안도니크가 오크들의 대략적인 반응을 내게 통역해줬다.
“카파콜은 너의 이름을 외치며 열광했다. 나파보는 너를 남편으로 차지할 계획을 짜고 있다. 바얀은 범철이 누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오크들도 참 여전하군.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때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하도에서 봤던 때와 달리 깨끗한 몰골의 미남자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여, 오랜만이야.”
“너, 누구였더라.”
“그 농담, 자주 들어 재미없는데?”
“나는 처음 내뱉는데.”
“나는 자주 들었거든.”
내가 어깨를 으쓱이고 악수했다.
“도벽은 극복했냐?”
“난치병이라 완치는 불가해.”
“언제든 훔쳐도 돼. 이번에는 내가 직접 손모가지를 끊어줄 테니까.”
“범철의 그 검에 내 손목이 잘린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
멋들어지게 인사하며 찬사를 내뱉는 튜크를 뒤로 하고 걸어갔다.
히사네에게 안긴 일레아흐는 몇 달 전보다 몰라볼 만큼 자라나 있었다.
“일레아흐. 그새 큰 것 같습니다?”
“이빨이 세 개나 돋아났으니까요.”
“잠깐 안아 봐도 됩니까?”
“이빨자국 세 개 남기고 싶다면.”
흐음. 역시나 저 성격은 그대로군.
일레아흐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군을 모아 달라 부탁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 몰랐습니다.”
“나에게 일을 맡겼던 것이라면, 당연히 과분한 성과는 예상했어야죠.”
따사로운 일상을 즐기지만, 나는 결코 대충 일하는 성미가 아니다.
그러자 일레아흐가 실소를 흘렸다.
“핀잔도 주고, 바뀌었군요. 범철.”
“버림받은 세상을 사는 것에 조금은 적응이 되었달까. 당신들처럼.”
“그래 보입니다. 같이 다니던 일행은 어디에 두고 혼자만 왔습니까?”
“아, 그건…….”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본부 앞에서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찢어 죽일 잡담은 관두고! 원정은 도대체 언제 떠날 거야!”
낯익은 말버릇과 목소리.
내려다보자 밀밭기사단의 부단장 세그라가 단원들을 이끌고 와 있었다.
‘그럼 이곳에 모인 것만 해도…….’
1천 명의 자살기도회, 6만의 오크, 정예 도둑길드원 200명, 대륙 최강의 기사단 절반, 그리고 25마리의 용.
‘내가 짠 것이지만, 정말 미쳤군.’
새삼 느끼지만 역대급 구성원이다.
황색대륙 최대 규모의 대전쟁!
간부들이 새빨개진 얼굴을 떨었다.
“이제껏 회귀해오며 이만한 규모의 전쟁은 용들과 대척했을 때 이후로 전혀 준비해본 바가 없다.”
“이번에야말로 아크 리치를 죽일 수 있다! 우리는 해낼 것이다!”
일레아흐가 토실토실한 볼을 매만지며 끄덕였다.
“원정에 앞서 회의가 필요합니다. 각 원군의 정상을 소집하겠습니다.”
* * *
“버림받은 120회차. 궤의 결계단이나 별빛의 창 아퍼스 같은 선량한 영웅들은 모두 자살해버렸지. 그런데 이곳에 회차 목표에 별 관심 없던 황색대륙의 최강자가 전부 모였다.”
책상에 두 다리를 척 올린 튜크가 중얼거렸고 모두가 묵묵히 동의했다.
정상회의!
회의에 참석한 것은 일레아흐, 흰 사슴뿔 오크 족장과 안도니크, 튜크, 세그라, 레샬피티에, 그리고 나였다.
각양각색의 원군 정상들은 본부의 회의실에 각자 취향대로 앉아 있었다.
“아크 리치가 서식하는 곳은 향연의 산맥입니다. 그곳의 결계를 뚫기 위해 4,000개의 성물이 필요하죠.”
책상에 올린 다리를 꼬면서 튜크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래서? 일단 대륙 전체에서 그 많은 성물을 전부 훔쳐 와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이미 자살기도회에서 모든 성물을 준비했으니까.”
튜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너희가 대륙에서 그만한 성물을 모으려면 대충 눈대중으로 최소 3년 이상의 기간은 필요할 텐데?”
“자살기도회는 아크 리치 원정에 도전하며 고안한 묘수가 있다.”
덩치 때문에 해골로 변신한 레샬피티에가 고아하게 앉아서 질문했다.
“그런데 어째서 너희 집단은 자살기도회이지? 이름이 참 요사스럽군.”
“아크 리치에게 맞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럼 너희처럼 자살행위를 하는 미친 집단이 다른 대륙에도 존재하나.”
“자살기도회는 타 대륙에 지부를 두진 않았습니다. 용족은 다른 대륙의 지배자와도 맞서 싸울 계획입니까?”
“용은 황색대륙을 벗어날 수 없다. 특수한 피를 타고난 게 아니라면.”
레샬피티에는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듯하였다.
고집스럽게 나무의자를 피해 바닥에 눌러앉은 오크 족장이 소리쳤다.
“와물카물! 샤라티카타! 콜란돌!”
“족장님께서는 원정 기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질문하셨다. 우리가 챙긴 식량으론 2주일만 버틸 수 있다.”
“순간이동포석으로 저희 본부, 지부 저장고를 총동원해 2주일 치 식량을 더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최소한 한 달 내로 원정은 끝날 것이라 약속드립니다. 전멸하든, 성공하든.”
“족장님께서는 후딱 끝내고 나중에 통돼지나 구워 먹자고 말씀하셨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세그라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원정을 너무 서두른 것 아닌가? 시간을 몇 년 두면 보물, 비기를 수집해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대륙의 지배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조금씩 강해집니다. 심각하진 않지만, 대략 1년 내에서 간략하고 확실한 원정준비가 이득입니다.”
아하, 그래서 일레아흐가 생각보다 일찍 병력을 소집했던 거였군.
‘시간이 지나갈수록 각 대륙의 지배자가 강해진다니.’
내가 효율적이고 빠르게 강해져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난 것이다.
반대로 시간을 끌면 지배자들이 너무 강력해져 죽이지 못할 것이다.
‘제기랄. 괜스레 조급해지는걸.’
일레아흐는 목이 탔는지 히사네의 앞가슴을 풀어헤쳐서 젖을 빨았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수유하는 모습일 터인데, 어쩐지 엄청나게 낯설군.
목을 축인 일레아흐가 히사네의 두드림에 트림까지 마치고서 말했다.
“아크 리치가 세 대륙의 지배자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유일하게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점?”
“리치에겐 전형적인 약점이죠. 바로 생명그릇. 그 생명그릇을 찾아 파괴하는 것이 이번 원정의 핵심입니다.”
리치의 생명그릇!
언데드가 된 리치는 자기 생명력을 보존하는 그릇을 어딘가에 숨겨둔다. 그 생명그릇을 파괴하지 못하는 이상, 리치는 불사나 마찬가지였다.
튜크가 으스대며 픽 웃었다.
“하, 그릇 찾기? 그런 것쯤은 도둑 몇 놈만 있으면 금방 끝내고 남아.”
“튜크. 설령 대도라고 해도 생명그릇만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아크 리치가 흑마법으로 숨겨놨을 테니까.”
아크 리치의 흑마법.
일반 리치조차도 흑마법으로 왕국을 무너뜨리는데, 하물며 아크 리치는 어떨까.
그러한 흑마법으로 숨긴 생명그릇을 찾으라니,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다.
“아크 리치는 혼신을 다해 자기 생명그릇을 산맥 어딘가에 숨겼습니다. 이제껏 120회차 동안 그 생명그릇이 발견된 적은 없었습니다.”
세그라가 한숨 쉬며 미간을 만졌다.
“찢어 죽일. 아크 리치랑만 싸우면 될 줄 알았는데, 그릇까지 찾아내야 한다니. 그 드넓고 위험한 산맥에서 누가 어떻게 그릇을 탐색해내겠어?”
마땅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았다.
모두가 방법을 궁리하던 그때.
정상은 아니지만 어째선지 회의에 참석한 불청객이 입을 열었다.
“그 생명그릇…….”
비스듬히 턱을 괴고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내가 질문했다.
“보물입니까?”
* * *
이후 회의에서 일레아흐는 향연의 산맥에 관련된 전생의 지식을 모두 발표했다.
아크 리치의 패턴, 언데드 군세의 약점, 분신마법, 빛의 구덩이 등등.
길었던 전략회의가 끝나고 출정시간은 내일 새벽으로 결정되었다.
6만의 오크들을 먹일 식량과 거처도 부족해서 계획된 일정이 급박했다.
각 정상이 진영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나는 협곡을 뛰어다녔다.
“어엇, 저것 봐! 범철 님이시다!”
“근데 혼자서 왜 뛰시는 거람?”
“레코라투아! 라몰카치냐?”
병사들과 오크들이 나를 신기해하며 봤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땀에 흠뻑 젖어가며 협곡을 계속 빙빙 돌며 뛰어다녔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질주하였을까.
[백만 걸음을 걸었습니다.]
[‘산들바람이 실린 요정장화’의 강화조건을 충족했습니다.]
[해당 장비가 ‘돌풍이 몰아치는 요정장화’로 강화되었습니다!]
요정장화!
샤라펠의 미궁에서 획득했던 전리품으로, 현재 내가 착용한 장비였다.
‘백만 걸음을 걸으면 강화되는 옵션이 존재했지.’
그동안 여행하며 채워놓은 걸음 숫자가 꽤 되어서 다행히 출정 전날에 백만 걸음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돌풍이 몰아치는 요정장화』
바람의 요정이 제작한 장화. 돌풍처럼 거침없이 뛰어다닐 수 있다.
+질주할 때 속도 50% 증가.
+각종 가속이 강화된다.
+돌풍이 몰아치는: 민첩 15 증가.
‘강화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군.’
민첩 상승량이 이전보다 5 올랐고 질주 속도는 무려 50%나 올려준다.
거기다 가속 강화의 옵션까지!
나는 육속의 반지를 모아 세트효과로 획득한 순간가속을 써보았다.
[순간가속이 활성화됩니다.]
[요정장화가 가속 강화합니다.]
[속도 +95%! 지속시간 +3초!]
[6초 간 공격력 500% 증가!]
순간 주위 풍경이 느리게 흘렀다.
협곡의 바위를 향해 대검을 내리긋자, 완전히 박살 나 가루가 되었다.
콰자작!
‘저렇게까지 힘을 주진 않았는데?’
순간가속의 부가효과에 칼을 휘두른 나조차도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단순히 속도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힘조차 그에 비례해 증폭되었다.
‘하지만…… 급속도로 지치는군.’
순간가속을 쓰고 나자 다리에 힘이 쫙 풀리고 기력이 마구 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강력하지만 페널티 또한 만만찮아 비장의 순간에만 써야 할 기술이다.
기력을 회복하고서 다시 일어선다.
‘다음은…… 오랜만이로군.’
내 건틀릿이 희푸르게 발광하자, 유령기사단이 눈앞에 소환되었다.
「간만이다! 주인이여!」
「새 기사단원이 편성되었어요! 주인님께서 또 한 번 성장하셨군요!」
다섯의 남성 기마병과 검은 단발 여성 창기사, 그리고 금발 여성 궁병.
고대 기사의 건틀릿 특성!
사용자가 성장할수록 최대 스물까지 소환 가능한 유령이 늘어난다.
‘내가 이전보다 강해지기는 했군.’
기존의 기사 일곱을 제외하고도 새로운 유령기사단원이 편성돼 있었다.
「새 주인인가? 참 반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