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63화
소녀가 가장 먼저 나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경악해서 달려왔다.
“대장! 그새 또 미쳐 버렸어요?”
“내가 그렇게 주변 사람의 조언도 수용 안 하는 고집불통으로 보여?”
“그럼 여기서 왜 그러고 있어요?”
“샘물을 꼭 내가 직접 입으로만 마셔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나는 양손에 담긴 샘물을 살펴보곤 배낭에서 메마른 뿌리를 꺼냈다.
수련꽃 뿌리!
칼의 시련에서 얻었던 보상이다.
분명 어떤 물가에 띄우느냐에 따라 독특한 수련이 피어난다고 했었지?
‘심지어 구정물이나 염산에서도 꽃이 피어날 수 있다고 했지.’
훌륭한 환경에서 자라날 경우 능력치를 올리는 수련꽃이 핀다고 한다.
이계에서 이곳 영화의 샘만큼 힘을 품고 있는 물가가 어디 있겠는가?
발상의 전환!
‘샘물을 마시는 것이 위험하면 이곳에서 자란 수련을 꺾으면 되지.’
나는 마른 수련꽃 뿌리를 영화의 샘에 조심스럽게 띄웠다.
‘되도록이면 능력치를 잔뜩 올려주는 수련이 피었으면 좋겠는데.’
야윈 뿌리가 수면 위에 떠오르며 샘물을 잔뜩 흡수하기 시작했다. 곧 뿌리의 수염이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별안간 커다란 봉오리를 맺었다.
동그랗고 어여쁜 연분홍 꽃봉오리.
[‘수련꽃 뿌리(미확인)’가 지대한 샘물을 흡수해 변화합니다.]
[샘물의 힘이 너무 엄청납니다!]
[‘심장 고동이 들려오는 꽃봉오리’가 수면 위에서 자라났습니다.]
‘뭐야? 꽃이 피는 것 아니었어?’
내가 의아해하며 수면 위에 떠오른 꽃봉오리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정말 꽃봉오리에서 살아 있는 동물처럼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꽃봉오리의 옵션을 확인했다.
『심장 고동이 들려오는 꽃봉오리』
힘이 담긴 샘물을 듬뿍 머금고 자라난 꽃봉오리. 개화하려면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이다. 애정을 담아서 칭찬해주면 조금씩 꽃잎이 떨린다.
+개화 직전의 꽃봉오리는 여리고 약하다. 다치지 않도록 보관해야 함.
+하루에 다섯 번 물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시들어 죽어버리고 만다.
*심장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내가 꽃봉오리를 내밀어 보였다.
“헤르탄. 이게 뭔지 압니까?”
“처음 보는 꽃봉오리입니다. 여기서 수련이 피어난 건 처음입니다.”
헤르탄이 진지하게 내게 제안했다.
“뭐가 있는지 갈라서 보시겠습니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냉큼 꽃봉오리를 거두었다.
퀸소히니베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꽃봉오리를 살살 간질였다.
“참 귀엽고 봉긋한 꽃봉오리인 것이야. 여기서 뭐가 태어날까?”
“뭐가 태어나긴? 꽃이나 피겠지.”
“하지만 꼭 용의 알처럼 둥그런 것이야. 화관을 머리에 쓴 앙증맞고 귀여운 새끼 용이 태어나지 않을까?”
나는 별 감흥 없이 턱을 긁적였다.
“글쎄다. 참 깜찍한 상상이다만.”
퀸소히니베의 기대에 정말로 꽃잎이 아주 조금씩 떨리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피어날 것이기에 이렇게나 큰 꽃봉오리가 맺힌 것일까?
난 꽃봉오리를 물에 적시고 푹신한 천에 잘 감싸 마법배낭에 넣었다.
이러면 충격에도 문제가 없겠지.
“대장은 꽃 다루는 데 능숙하네요?”
“야. 이래 봬도 원래 원예가였는데.”
“흥. 꽃꽂이보다 검술을 잘하면서.”
“원래 직업, 재능이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겠냐. 그래서 슬프고.”
“줘 봐요. 보호의 축복을 걸게요.”
카티에가 꽃봉오리에 축복을 걸자, 레샬피티에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성녀였나?”
“기적 쓰는 것도 보지 않았어요?”
“확실히, 그랬군.”
레샬피티에는 이상하다 싶을 만큼 카티에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인간들의 성녀는 꽤 오래전쯤에 대가 끊겼는데.”
“내가 세상에서 유일한 성녀예요.”
“과연 인간들은 얕볼 게 못 되는군. 이런 병기를 몰래 숨겨뒀다니.”
카티에가 병기라고?
나는 그 대화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성녀의 기적. 조금 더 고귀한 단어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불리지. 신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니까.”
그러자 카티에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신을 따르는 성녀가, 신에게 대항하게 될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모를 일이지. 그 성녀가 120회차의 미친 회귀자라면 더욱.”
하, 카티에의 기적이 용의 여왕조차 경계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나?
같이 다니며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기적을 쓰곤 해서 전혀 몰랐다.
하기야 지금까지 그녀가 기적을 써 줄 때마다 위기를 넘겨오곤 했었지.
레샬피티에는 소녀를 가여워했다.
“감당하지 못할 기적을 가졌다면, 너의 미래가 밝을 일은 전혀 없겠군.”
“어두우면 램프 하나 사겠어요.”
“설령 이번 회차에 회귀가 멈추더라도 너의 삶은 벼랑길일 것이다.”
“짧고 굵은 게 좋단 것은 비단 살인할 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죠.”
카티에는 본드래곤의 위압에 적응되었는지, 아니면 동정을 받기가 싫어서인지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나는 둘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대화의 주제를 슬쩍 돌렸다.
“레샬피티에. 아크 리치 원정에 참여하려면 반지를 착용해야 합니다.”
“알겠다.”
본드래곤의 몸집이 작아지며 고풍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해골이 되었다.
흐음, 해골 귀부인 같은 느낌이군.
나는 작아진 그녀의 뼈만 남은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놋쇠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 반지를 끼는 이유가 뭐지?”
“반지가 뜨거워지면 그것이 집합 신호입니다. 전군이 협곡에 모여서 아크 리치 원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럼 즉시 협곡에 가야만 하겠군.”
“예?”
내가 놀라자 레샬피티에가 뼈 손가락의 달궈진 놋쇠반지를 내보였다.
“내 몇 가닥 남은 신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반지가 몹시 뜨거운데.”
* * *
자살기도회 크레스 시 지부장 암론은 세상이 녹록지 않다고 보았다.
이곳에 올라오기 전, 다섯 명의 크레스 시 일원은 상관을 걱정해줬다.
‘이 상황에 긴급소집이라니. 지부장님, 저희 없이 잘할 수 있어요?’
‘별걱정은. 끽해봐야 회의만 하다가 끝나겠지. 뭐, 염려할 것 없어.’
암론은 그렇게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다.
회귀했는데도 소심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그 다섯 명의 일원은 회귀해서도 못난 자신을 따라준 친구들이니까.
그러나 암론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회귀해도 결국 똑같아. 내가 제대로 해내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지.’
그는 칼을 꽉 움켜쥐고 이를 깨문다.
지금도 성내에서 위기상황을 알리는 종이 귀가 아플 만큼 울려댄다.
본부 성벽 위, 자살기도회의 모든 간부와 지부장이 소집되어 있었다. 전원이 긴장이 역력한 표정이다.
‘이제야 원정준비를 끝내고, 대륙 각지에 흩어진 일원이 소집됐는데, 어째서 날벼락이 떨어지는 거지?’
본부의 앞에 적들이 빼곡하다.
무려 5만이 넘어가는 오크 떼!
이전에 본부를 습격했던 멸살군주 세력의 50배 이상이나 되는 숫자였다.
그것을 보고 간부와 지부장들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오크 자식들. 하여간 번식력 하나는 개처럼 넘쳐나서는.”
“매회차마다 회귀자와 오크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아직 저만큼 틀어질 시기는 아닙니다. 일러도 너무 일러요.”
“맞아요. 오크들이 벌써 습격을 하다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암론은 분했다.
결코 순간이동포석을 바쁘게 드나들며 여러 물자를 준비해왔던 원정 준비에 지장이 생겨서가 아니다.
‘그분.’
대륙에서 유일한 1회차의 불세출 검사.
리자드맨으로부터 도시를 구해주고, 짧게나마 칼을 가르쳐줬던 사내.
본부를 지키지 못한다면 암론은 감히 그 남자와 재회할 낯이 없었다.
‘하지만 적의 병력이 너무 많은걸.’
현재 자살기도회 본부의 병력은 추산해봐야 고작 일천 남짓이다.
그에 반해 오크 부대는 협곡을 물 셀 틈 없이 메울 것처럼 끝이 없다.
그때 모두가 최고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본부장님! 어찌 해야 합니까?”
“자칫하면 오크의 습격에 우리가 모아놓은 성물까지 뺏길 겁니다.”
자살기도회 본부장 일레아흐!
히사네란 수족에게 안겨 있는 본부장은 어린 아기의 외견이었다.
그러나 그런 외모와 달리 그녀는 타고난 지휘력을 지닌 지도자였다.
일레아흐가 통통한 턱을 앙증맞게 괴고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을 때.
“오크 쪽에서 전령을 보냈습니다!”
보안대 대장 디코브가 헐레벌떡 뛰어 올라와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일레아흐가 옹알이가 살짝 뒤섞인 목소리로 차게 쏘아붙였다.
“언제부터 목소리의 크기가 심각성을 대변했지? 줄이고 지껄여라.”
“예! 죄송합니다!”
눈치 없는 디코브가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뒤늦게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오크들이 아크 리치 원정을 준비하는 곳이 이곳이냐고 물었습니다.”
“뭐? 왜 그런 것을 묻는 거지?”
“이번 원정에 참전하고 싶답니다.”
“……저 오크들이?”
간부들이 놀라서 서로를 바라봤다.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일레아흐조차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도 그럴 게, 120회차를 통틀어 인간과 오크가 동맹한 적은 드물었다.
부족의 영역에서 밴시를 다루는 오크는 회귀자와 늘 앙숙이었으니까.
암론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저 앞에 펼쳐진 오크들을 바라봤다.
‘저들이 전부 지원군으로 왔다고?’
하지만 간부들은 오크들이 전해온 소식을 쉽사리 믿지 못했다.
“저 태생부터 간악한 오크들이 정보를 탈취해 교란하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5만의 병력증강! 너무 달콤합니다. 저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직접 들어보는 것이 빠르겠군.”
일레아흐는 눈치 빠르게 통역에게 전령과의 회담 자리를 마련하도록 했다.
곧 오크 부대의 전령 한 명이 병사들에게 이끌려 이곳에 올라왔다. 산발한 머리의 오크 여전사는 자신을 안도니크라 소개하곤 말했다.
“우리의 흰 사슴뿔 부족 족장님께서는 30개 오크 부족을 집결해 데려오셨다. 나머지 20개의 부족은 설득에 실패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럼 저 5만 명이 전부?”
“정확히는 6만이다. 한 부족 당 5천 명은 된다. 너무 조금 데려와서 너희한테 미안하다.”
안도니크가 몹시 미안해하며 말하자, 간부들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진원군의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본부에 전부 수용하지 못할 상황이다.
일레아흐가 예상치 못한 변수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당신들에게 원정에 대해 알려주고 오게 한 배후가 누굽니까?”
“인간 중에서 혼자만 1회차인 남자다. 우린 그를 도우러 온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즉시,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배후의 정체를 파악했다.
하지만 1회차인 그가 어떻게?
“이거 우연찮군. 우리도 그 남자한테 설득당해 여기 왔는데 말이야.”
모두가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성벽 난간에 처음 보는 미남자가 긴 다리를 걸치고 걸터앉아 있었다. 거기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이백은 됐다.
모든 간부가 당황해서 칼을 꺼내 쥐었다.
“너흰 뭐냐? 어느새 여기에 왔지?”
미남자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닐세. 동료들.”
“정체를 밝혀라. 이것은 경고다.”
“시궁쥐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간부들이 전부 놀라서 경악했다.
“시궁쥐? 설마 시궁쥐 튜크라고?”
“현존하는 도둑길드의 수장!”
“황색대륙에서 가장 대도에 근접한 남자. 평소 은둔한다고 들었는데.”
튜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간추린 요약 고맙군. 덕분에 자기 소개할 필요도 없겠어. 그나저나.”
그가 짜증 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먹음직스럽게 실룩이네. 얼마나 주머닐 활짝 벌려야 속이 편하려나.”
아무도 그 소릴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천천히 그들 사이를 지났을 때, 암론은 문득 허리춤이 허전해진 것을 느꼈다.
어느새 금화지갑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느 틈에?”
암론은 금화지갑을 찾다 또 하나 없어진 게 있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튜크가 빼앗은 칼을 던져줬다.
“이, 이건 또 언제?”
“난 얼빵한 회귀자를 사랑하지. 조심해. 내가 마음까지 훔칠지 몰라.”
암론은 그 말이 사실인지 농담인지 감히 분간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금화지갑은 안 돌려주나?’
하나 암론이 끼어들 새는 없었다.
튜크가 미소 지으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일레아흐에게 인사했다.
“도둑길드 정예 200명도 참전하지. 흐음. 역시 더 데려왔어야 했나?”
그가 수만의 오크 무리를 힐끔거리자 간부들은 황당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도둑길드라면 회귀자조차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단체이다. 그런 정예도둑 200명이라면 도시 하나는 혼돈에 빠트리고도 남을 것이다.
일레아흐가 냉소를 지었다.
“시궁쥐. 의외로군. 지하에 갇혀서 썩어나고 있어야 할 시기 아닌가?”
“갇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둔 거지. 도벽 치료를 위해서. 형님이 사정을 해서 이번만 일찍 나왔지.”
“네가 형이라 부를만한 자는…….”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남자다.”
“……맙소사.”
암론은 일레아흐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처구니없는 것도 같았고, 진심으로 깊게 감탄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역시, 회귀하더라도 전혀 예상을 못하겠군. 늘 뒤통수를 치니.”
“뭐, 그게 매 삶마다 형님의 매력이지. 감히 우리 따위가 그 자식의 행보를 추측할 그릇이나 되겠어?”
거기까지 이야기를 나눴을 때, 또다른 불청객이 대화를 끊어버렸다.
“이봐! 여기가 자살기도회 본부 맞나? 찢어 죽일! 찾아오느라 혼났군!”
굳게 닫힌 성문 앞에서 웬 거한이 성을 내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쳤다.
특유의 누런 갑옷을 보는 순간, 암론은 경악하면서 바로 소리쳤다.
“밀밭기사단!”
“회, 회귀 시점부터 이미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를 지녔다는 그……!”
“난공불락이던 강철골렘도 저 기사들에게 으깨져 버리고 말았다지!”
6만의 오크, 도둑길드 정예부대도 모자라서 대륙최강의 기사단까지?
간부들은 자꾸만 몰려드는 압도적인 지원군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때 부기사단장 세그라가 간부들의 경악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소리쳤다.
“단장님은 임무 수행 중이시라, 내가 딱 열 명만 데려왔다! 나머진 전하를 경호해야 해. 너무 부족한가?”
간부들은 또다시 어이가 없었다.
‘부족하기는 무슨!’
최정예기사 하나가 자살기도회 병사 100명의 몫은 거뜬히 하고도 남는다. 거기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밀밭기사의 지휘력이라면 한 명이라도 환영할 판이다.
그런데 무려 부단장이 몸소 10명이나 이끌고 왔다고?
히사네가 일레아흐의 말을 전달했다.
“너희는 또 무슨 볼일로 왔는가?”
“아크 리치 원정에 참전하러 왔다!”
“소년왕을 경호하는 너희가 왜?”
어째선지 이번에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1회차 그놈이 여기로 오라던데!”
“…….”
이쯤 되자 할 말을 잃고 모두 헛웃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버림받은 세상은 심장이 평균 박동을 되찾도록 놔두질 않았다.
그때 협곡 전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어, 어?”
“저, 저, 저거! 저거 설마!”
암론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본드래곤이다!”
간부들은 물론이고 오크들까지 경악했고 사람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디코브가 엎드려서 악을 썼다.
“보, 본드래곤! 이번에야말로 진짜 습격이다! 우린 회귀하고 말 거야!”
“쪽팔리게 하지 말고 일어서라.”
“예, 예?”
놀랍게도 그 흉악한 용은 딱히 먼저 기습하려는 태세는 보이지 않았다.
본드래곤은 본부의 뒤쪽에서 날갯짓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용들의 사이에서 여왕 직위를 맡고 있는 레샬피티에이다. 아크 리치 원정에 출전하기 위해서 날아왔다.”
간부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 오만한 용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정중하게 먼저 소개하다니!
“여, 여왕이었어? 본드래곤이?”
“용들과 싸웠던 회차에서도 여왕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던데?”
“그런 여왕이 어째서 이번 회차에서만 우리 본부에 습격을……?”
그러나 경악은 끝이 없었다.
본드래곤은 협곡이 넘치도록 가득 채우고 있는 오크 떼를 흘깃 바라보고는 말했다.
“협곡이 너무 비좁군. 나머지 용들은 저 위에서 대기하고 있겠다.”
“나머지……라고 했습니까?”
본드래곤이 대가리를 끄덕였다.
“스물넷이 더 있다.”
그 말에 간부들이 품위도 잊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용이 한 마리도 아니고, 스물다섯?
이곳에 모인 대부분은 회귀하며 그렇게 많은 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 심장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스털이 게거품 물었다. 의무병!”
“꿈인가?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간부들은 기쁨과 흥분에 겨워서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쉬질 못했다.
나지막이(용의 기준으로) 한숨 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래 있긴 싫군. 어서 내려라.”
본드래곤은 대가리를 조아려서 한 남자를 성벽 위에 내려주고 떠났다.
건장한 사내가 사뿐히 내려선다.
‘저 남자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그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서 걸어 온다.
사내가 능청스레 암론에게 말했다.
“칼솜씨는 예전보다 늘었습니까?”
그 남자는 온갖 대륙의 유명인사를 뒤로하고 암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나온 삶에서, 먼발치에서만 봐야 했던 위대한 검사.
칼을 쓰는 회귀자, 아니, 그 누구라도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그 이름.
암론이 그 손을 잡고 활짝 웃었다.
“범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