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62화
헤르탄이 언젠가 평가한 적 있다.
내가 회귀자보다 뛰어난 감각을 꼽자면 상황판단과 임기응변이라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여겨진다.
용의 장로가 불쾌해하며 말했다.
“여기 있는 용 모두가 중립을 어겼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지?”
“그녀가 사형당하기 때문입니다. 퀸소히니베는 중립을 어겨 인간의 편이 됐습니다. 그런데 사형이 판결 됐으니 인간은 용에게 등을 돌릴 겁니다.”
용의 장로들이 내 말을 곱씹었다.
“허참, 인간의 대척점에 선다고 우리가 중립을 어기는 것이 되나?”
“그럴 리가! 그렇다면 중립을 어긴 용은 사형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더군다나 애당초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던 인간들의 숫자는 적었다.”
“완전히 중립을 어겼다면 우리 모두 용의 자태로 있을 수 없었겠지.”
“율법을 검토해 논의가 필요하다. 딱히 일리 있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껏 저런 이의를 제기한 생물은 없었다.”
중립이란 단어가 얼마나 애매한가.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니 계속 이의를 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중립을 어겼다는 말을 내뱉은 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이제 차근차근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뿐이 아닙니다. 인간과 용이 다투면 지배자를 죽일 수 없습니다.”
“지배자라니?”
“황색대륙의 지배자 아크 리치. 그 몬스터가 대륙에 실존해 있습니다.”
집회장의 용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모두 아크 리치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한 장로가 우렁차게 고함을 쳤다.
“터무니없긴! 아크 리치처럼 용조차 압도하는 생물이 실존한다고?”
“예.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럼 그 증거를 대보아라! 인간!”
“모두들 어느 기점부터 인간이 이상해졌단 것을 눈치챘을 겁니다.”
용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세상의 변화, 사망 회귀!
용들은 모두 회귀자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
“현재 인류는 120번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되돌리고 중립을 지키려면 그 회귀를 멈춰야 합니다.”
용은 강대하지만, 세상에서 사망 회귀하는 것은 오직 인간들뿐이다.
한 용의 장로가 놀라서 말했다.
“저 밉살스러운 인간들의 회귀를 멈추게 할 방도가 있단 말인가?”
“120회차 세상에서 회귀를 멈추려면 세 지배자를 죽여야 합니다.”
장로들은 수염을 긁으며 경악했다.
“그럼 다른 대륙에도 아크 리치 수준의 지배자가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표하는 바를 말했다.
“120회차 목표. 세 대륙 지배자를 죽이면 회귀를 멈출 수 있습니다.”
“허, 세 마리나 죽여야 한다고?”
협회장 사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나의 시선에 전부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장대한 용의 무리.
“아마 이 황색대륙 대부분의 용은 인간에게 질렸을 겁니다. 회귀자는 반란분자처럼 위험을 품은 존재입니다.”
용들이 공감하며 대가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인간의 말이 맞긴 하지.”
“노예가 예전만큼 순하지 않고, 탈출하며 도리어 나까지 공격했었다.”
“인간은 거리낌 없이 자살하며, 남과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하게 됐다.”
용의 장로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지만 회귀를 멈춘다고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온단 보장이 있나?”
“마지막 삶.”
나는 확고하게 말하였다.
“분명 회귀자라도 마지막 삶이 되면 제대로 살 것이라 확신합니다.”
카티에과 헤르탄도 나섰다.
“우리 둘은 회귀자고, 120번째 삶을 살아요. 이 세상의 회귀를 멈추기 위해서 저 용이 꼭 필요해요.”
“퀸소히니베는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온전한 중립은 온전한 세상에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퀸소히니베가 목이 메었는지 기침하며 우리 쪽을 뜨겁게 바라보았다.
내가 확정적으로 끝매듭을 지었다.
“저의 최종결론은!”
숨을 들이쉬고 복부에 힘을 준다.
진심을 담아서 크게 발언했다.
“중립을 어긴 용은 죽여 마땅합니다. 다만 여러분이 완전한 중립을 지키려 한다면, 결코 그녀에게만은 사형을 내려선 안 됩니다. 이상입니다.”
마지막 발언을 마치고 물러선다.
집회장의 분위기가 혼란스러워졌다.
용의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저 인간의 말을 믿어도 될까?”
“전부 거짓이었다면 집회장의 마법에 의해서 금방 간파당했을 거다.”
“아크 리치란 상위호환이 있다면 용의 자존심을 구기는 것 아닌가.”
“그러나 대적해서 과연 이득을 볼 수 있을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논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장로들이 판결을 내렸다.
“퀸소히니베의 판결을 정정하겠다. 그녀를 사형시키는 것은 우리 또한 중립을 위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처분은 차후에 결정짓겠다.”
기적적으로 뒤엎어진 판결!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래저래 급한 불은 껐군.
레샬피티에는 흡족함을 최대한 숨기려 했지만, 턱뼈가 크게 달칵거렸다.
“아크 리치라는 지배자가 도사리는 황색대륙에 용들의 세상이란 없다.”
용의 여왕이 크게 선포하였다.
“전쟁 기간, 용의 율법을 따라서 중립을 깨겠다. 용보다 강력한 적이니만큼, 이번에는 나 역시 참전할 것이다. 들어라. 우리는 인간들과 함께 아크 리치를 깨부술 것이다.”
용들이 그 명령에 서로 눈치를 봤다.
레샬피티에는 망설이거나, 혹은 관심 없어 하는 용들을 향해 소리쳤다.
“반대하는 용이 있다면, 참전을 강요하지 않겠다. 억지로 끌고 가봐야 너희는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다.”
하나둘씩 용들이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절반쯤 되는 용들이 대답 없이 날개를 펼치며 집회장을 떠나갔다.
결국 집회장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24마리의 호전적인 용 무리였다.
나는 그나마 용들이 절반이나 남아 준 것도 기대 이상이라 만족했다.
용까지 가세하는 아크 리치 원정!
‘전쟁 규모가 미치도록 커지는데.’
이거,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부디 이러고도 지지 않길 바란다.
마침내 용아병에게 풀려난 퀸소히니베가 자유의 몸(?)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녀는 내게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확 끌어안았다.
“아악! 인마, 허리 부러지겠다!”
“나를 놀라게 한 엄벌인 것이야.”
퀸소히니베는 날 포옹하며 말했다.
“내 노예가 이렇게나 유창한 달변가인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야.”
“자기 사람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면 호구 짓 아니겠냐.”
“……고마워. 네가 있어 줘서.”
퀸소히니베가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하고 내 뺨에 입술을 맞췄다.
흐음. 이거, 괜히 낯간지러운걸.
“헤르탄도 수고해줬단 것이야.”
그녀가 까치발을 들고서 뺨에 입을 맞추자, 헤르탄이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퀸소히니베.”
카티에가 새침하게 고개를 들고는 자기 뺨을 내보였다.
“나한테는 안 해줘요?”
“원하는 것이야?”
“어디 해봐요.”
퀸소히니베가 픽 비웃고는 소녀의 턱을 잡고 하얀 뺨에 입을 맞췄다.
“네년에게도 고마웠단 것이야.”
“그러면 언니라고 불러 봐요.”
“……그것만은 절대 싫단 것이야.”
내가 가만히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매만지자, 카티에가 다가와 웃었다.
“가벼운 볼 인사를 진지하게 오해하는 것만큼 찌질한 것도 없어요.”
“충분히 아니까, 그만 좀 꼬집지? 내 팔꿈치에 피멍이 들어야 멈출래?”
“내 마음에도 피멍이 들었어요. 그러니 대장의 연심은 멈춰야 해요.”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나를 가엾다는 눈빛으로 동정했다.
“주인을 향한 노예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야.”
“……누가 언제 너 좋다고 했냐?”
모처럼 활기찬 분위기에서 잡담을 나눌 때, 레샬피티에가 움직였다.
용의 여왕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에게 정식으로 이름을 묻겠다. 인류 중 유일하게 회귀하지 못함에도, 나의 딸을 구원해준 인간이여.”
그러한 여왕의 태도에 다른 용들은 경악해 아가리를 다물지 못하였다.
“허! 여왕께서 직접 이름을 물어주시다니. 한낱 인간에게는 과분하군.”
“살다 보니 이런 광경도 보는군. 평생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나는 레샬피티에를 보며 대답했다.
“범철입니다.”
“황색대륙에서는 굉장히 드문 이름이군. 청색대륙 출신인가?”
“뭐, 여기서 태어나진 않았습니다.”
나는 대충 둘러대었다.
“질질 끄는 사족 따윈 싫어한다.”
레샬피티에가 내가 기대하던 말을 내뱉었다.
“바로 약속했던 보상을 선물하지.”
* * *
내가 재판의 승소를 대가로 레샬피티에에게 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우선, 첫 번째는 용들의 참전!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칼이었다.
‘쭉 쓰던 레이피어는 닳았으니까.’
레샬피티에가 직접 안내한 소굴 깊숙한 곳에선 물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본드래곤을 따라 걸어갔다.
전생에서 용들과 많이 접촉해보았던 헤르탄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줄곧 묻고 싶었습니다만, 어떻게 본드래곤을 어머니로 뒀던 겁니까?”
“어머니께서는 날 낳아주신 이후, 돌아가셨던 것이야. 하지만 여왕의 위대한 마력으로 부활하신 것이야.”
“혹시 다른 용들도 그렇습니까?”
“어머니처럼 자력으로 되살아난 용은 없는 것이야. 물론 이제 어머니도 부활은 못 하시지만. 아니, 잠깐.”
헤르탄이 혹하는 눈빛으로 본드래곤을 보자, 퀸소히니베가 째려봤다.
“헤르탄은 아직도 용을 사냥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야?”
“아뇨. 그대의 어머니를 뭉그러지게 고아 탕을 끓여보고 싶습니다.”
“……당장 나가 죽으라는 것이야.”
그 길의 끝에서 맑은 물가가 보였다.
신비한 기운을 내뿜는 푸른 샘물!
“용족이 지켜온 샘물이다. 설령 인간이 회귀했다 하더라도 이곳에 침입했던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 저희를 데려오신 겁니까?”
보상을 선물한다기에 화려한 재화 창고 따위를 생각했었다.
레샬피티에는 간략히 설명했다.
“이 샘물은 초대여왕께서 발견하신 것이다. 씻으면 저주가 낫고, 여기에서 물고기가 살면 장생하지. 귀하고 빛나기에 이곳은 ‘영화의 샘’이라고 불린다. 감히 용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고한 힘을 가득 품고 있는 샘물이지.”
본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리자, 끝이 첨예한 이빨이 한 개 떨어졌다. 고작 이빨이라곤 하지만 그 크기는 성인 한 명에 비할 만큼 커다랬다.
“이 송곳니를 샘에 담그면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
용의 이빨은 땅에 심으면 용아병으로 자라고, 장비로 제작하더라도 막대한 내구력의 원재료가 된다고 한다.
설마 그런 이빨 중에서도 가장 귀한 송곳니를 선뜻 내어줄 줄이야.
“감사드립니다. 레샬피티에.”
내가 그녀에게 예를 표하자, 레샬피티에가 송곳니를 툭 밀어 넣었다.
풍덩!
송곳니를 집어삼킨 영화의 샘이 눈이 따갑게 화려한 빛을 발산했다.
‘……샘에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아.’
그러자 레샬피티에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곧바로 말했다.
“너, 한 명은 허가하겠다. 다만 샘물은 절대 마시지 않도록 하여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예감에 이끌려 나는 영화의 샘으로 걸어 들어갔다. 허리까지 담기는 샘물에 몸을 적시자 휘감기는 감각이 낯설다.
송곳니가 녹아들며 작게 변화한다.
‘내가 바라는 칼의 형태는…….’
손에 무언가 쥐어진다.
이제껏 쥐지 못한 묵직한 칼.
순간 나는 아득해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흰 칼을 쥔 채 샘에서 올라섰다.
『리치 파멸의 대검』
초대형 언데드의 송곳니로 제작된 대검. 리치에 맞서기 위한 사용자의 의지가 서린 무구이다. 다만, 둔중하고 무거워 사용하기 위해선 실력이 요구된다.
+힘, 체력 총합 80 이상 착용 가능.
+리치계열 괴물에게 공격력 235% 증가, 치명타 확률 75% 상승.
+힘 능력치 65% 증가. 방패, 갑옷, 뼈 부분파괴 확률 대폭 증가.
*모든 어둠 기운 공명(파괴력 상승)
*한 개체의 리치를 파괴하고 나면 임무를 다한 칼은 소멸되어 버림.
본드래곤의 송곳니가 변화한 대검!
단연코 내가 지금껏 쥐어본 검 중에서 최상이라 평할만한 상등품이다.
‘아크 리치를 사냥하기 위한 무기로는 이보다 최적격인 칼이 없어.’
능력치를 확인하니 힘은 38, 체력은 48로 간신히 착용 제한을 넘겼다.
시험 삼아 칼을 휘두르자 넓게 퍼지는 풍압에 수면이 잔잔히 흔들렸다.
대검은 처음인데 손맛이 묵직하군.
“마땅한 칼이 제작되었나?”
“예. 원재료답게 훌륭한 검입니다.”
“됐으니 가지. 인간은 여기서 오래 머물면 샘물의 힘에 홀리게 된다.”
모두가 샘물로부터 멀어질 때, 오직 한 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샘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레샬피티에가 위험한 호기심은 그만두라는 듯이 그런 나에게 경고하였다.
“샘물을 마실 셈이면 관둬라. 둘 중 하나다. 죽도록 강해지거나 그냥 죽거나. 너의 그릇으론 불가능하다.”
“염려 마요. 내가 대장을 잘 아니까. 그런 미친 도박은 하지 않아요.”
카티에가 쉽게 단정 지었을 때, 난 샘물을 떠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