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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60화 (60/200)

나만 1회차 060화

『가속의 상자』

창천의 여제의 속성이 담긴 상자. 무엇이 담겨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개봉 시 세트 장비 아이템 획득.

‘……세트 장비 아이템이라니.’

각기 공명하는 장비처럼 동시 착용하면 득이 되는 아이템을 일컫는다. 같은 수준의 장비를 입더라도 세트 아이템을 착용하면 훨씬 강해진다.

하지만 그만큼 희귀해 이계에서도 강자들이나 입을 수 있는 장비였다.

‘나도 소문으로만 들어봤었지.’

그렇지만 세트 아이템이라고 모두 우월한 장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흑마법사 세트 장비는 다른 직업이 입으면 저주에 걸린다고 했다.

흠, 하지만 위니아의 속성이 깃든 상자라고 하니 그럴 걱정은 없겠지?

상자를 열자, 빛이 팽창하였다.

[일속의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이속의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삼속의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

상자에서 일속(一速)에서 육속(六速)까지의 반지가 여섯 개나 나왔다.

‘전부 속도를 올려주는 반지로군.’

각 빛깔의 반지는 민첩을 2씩 올려주는 옵션이 걸려 있었다. 모든 반지를 끼고 나니 무려 12나 되는 민첩 능력치가 올라갔다.

‘12라면 무시할 수가 없는 수치지.’

당장 힘이 5만 올라가더라도 적을 칼로 써는 손맛이 확연히 틀렸다.

특히나 민첩은 전투에서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중요한 능력치였다.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속도가 밑받침되지 않으면 도루묵이다.

여섯 손가락에 반지를 착용하자 각 반지에 영롱한 빛이 어렸다.

[대륙에 흩어진 육속의 여섯 반지를 모두 수집해 착용했습니다!]

[세트 효과, ‘신속’ 획득!]

[순간가속을 3초 동안 사용 가능하며 물리적 공격의 위력이 배가됩니다.]

민첩 능력치가 대폭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세트 효과까지 겸비되었다.

세트 장비 아이템의 장점!

하지만 거물을 죽이고 얻은 보상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추락해 조각난 사병의 시체로 걸어가 금화를 한 닢 튕겼다.

[적 시체에 금화를 뿌렸습니다.]

[영웅등급 칭호 ‘날개를 찢고 추락시키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한정효과: 1. 회피율 10% 상승. 2. 전설적 비행 몬스터를 사냥 시 ‘날개’ 강탈 1회 가능.]

‘전설적 비행 몬스터?’

서술된 글귀만으론 추측이 어렵다.

헤르탄에게 물어보자 그가 턱을 쓰다듬고는 대답했다.

“그런 몬스터라면 피닉스나 멸악조 따위입니다. 최소 50번은 회귀해 찾아다녀야 볼 수 있을 만큼 드물죠.”

내게 그런 전설적인 몬스터를 볼 기회가 생길지나 모르겠군.

성으로부터 돌아오자 카티에와 퀸소히니베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의 괴물을 소환한다고 들었을 때 왜 당신의 어머니인 줄 몰랐죠?”

“어머니는 언제나 본인 능력에 관해선 얘기해주지 않으셨던 것이야. 그만큼 나를 귀하게 키워주셨으니까.”

“풋. 역시.”

“그 웃음은 무슨 의미인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째려보자 카티에가 마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굳이 내 입으로 얘기해야 할까요?”

“역시 성이 추락할 때 네년만은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참으로 살벌한 두 여인이다.

어쨌든 레샬피티에가 적을 전멸시키고 돌아온 것은 우리가 사냥한 토끼로 배를 채운 직후의 대낮이었다.

나는 구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닥에 내려앉은 레샬피티에가 포만감에 가득 차서 대답했다.

“그 책들이 내 입맛에 맞더군.”

실망을 금치 못할 소식이었다.

레샬피티에가 기밀서고의 마법서를 전부 먹어치우고 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본드래곤이 저주랑 마법 물품을 주식으로 삼는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서적들을 챙길 생각이었던 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충직하고 믿음직한 동료 헤르탄이 은밀한 귓속말을 속삭였다.

“지금 저것을 사냥하시겠습니까?”

“일단 후일을 도모합시다. 헤르탄.”

“퀸소히니베를 인질로 협박하면 사냥의 성공확률이 늘어날 것입니다.”

“좋아요. 동료의 어머니를 죽인다니. 퀸소히니베가 살쪄 도망 못 치게, 요리할 때 기름기도 높여 보자고요.”

“과연 범철입니다. 저도 감히 그렇게까지 사악한 생각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퀸소히니베가 헛소리를 속닥이는 우리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사람을 납치해 협박하는 것은 용의 특권인 것이야. 특히 헤르탄! 성에서는 몹시 실망이 컸던 것이야.”

그녀가 죄여졌던 목을 가리키자 헤르탄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퀸소히니베.”

“흥. 이제 와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따르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퀸소히니베는 거만하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옷을 벗고 내게 절하란 것이야.”

“예.”

“때와 장소들 좀 가리지 그래요?”

그때 카티에가 오만한 용과 바지를 벗으려 하는 헤르탄에게 핀잔을 줬다.

하여간 드디어 여유가 생기자 레샬피티에가 엄한 목소리로 문책했다.

“이제야 가출의 이유를 물을 수 있겠구나. 퀸소. 어째서 나갔던 거니?”

방금까지의 오만함은 싹 사라진 퀸소히니베가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독립하고 싶었어요!”

하, 퀸소히니베가 저렇게 정상적인(?) 말투를 쓰니 괜히 신기한걸.

레샬피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내 딸도 어른이니까.”

“어머니…….”

“그럼 내 둥지의 보물은 왜 훔쳤니.”

“…….”

“보물은 어떻게 하고 여기 있니.”

모녀의 대화는 용들도 다를 게 없군.

한참 뒤에 퀸소히니베가 시무룩한 얼굴로 잔뜩 기가 죽어 대답했다.

“……인간들에게 빼앗겼어요.”

레샬피티에가 너그럽게 말했다.

“퀸소. 이 어미는 고작 가출과 보물 따위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요?”

“내가 가장 화나는 것은 나의 어린 딸이 중립을 어겼다는 것이다.”

황색대륙의 용은 중립을 중요하게 여겨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한다.

그러나 퀸소히니베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바람에 중립을 어겨도 한참 어졌다.

그래서 현재 그녀는 본모습인 용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중립을 어긴 대가는 알겠지. 너를 용의 집회로 꼭 데려가야만 한다.”

“지, 집회? 그곳은 절대 싫어요!”

퀸소히니베가 아연실색하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용의 집회?’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헤르탄이 차분히 설명을 해줬다.

“용들의 재판소입니다. 그곳에서 용들이 죄의 처분을 결정짓지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압니까?”

“전생에 저도 집회에서 사형을 당했던 경험이 있지요. 용의 알을 훔쳐 쪄 먹었다는 죄목으로 말입니다.”

“…….”

어쨌든 레샬피티에는 자신의 딸에게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격했다.

“나도 십중팔구 네가 사형당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절차는 절차다.”

“어머니! 그렇지만……!”

“너를 딸이라고 봐준다면, 나는 여왕의 직위에 있을 자격이 없다.”

“안 돼, 안 돼……! 집회만은……!”

퀸소히니베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칼을 양손으로 뜯었다.

평소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저렇게나 꺾여 버리다니, 너무 가련하군.

좌절한 그녀에게 다가간다.

“퀸소히니베.”

내가 퀸소히니베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감격한 얼굴로 날 보았다.

“역시 내 노예밖에 없는…….”

“네 죽음은 내가 꼭 기억하겠다.”

“…….”

“혹시 나중에 내가 딸을 낳는다면, 그 이름을 퀸소히니베라 짓겠어.”

헤르탄도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 삶에서 재회한다면, 그때야말로 옷을 벗고 절하겠습니다.”

카티에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랑 말다툼만 했지만, 헤어질 때가 되니 약간은 아쉽네요. 다음 삶부턴 좀 겸손하게 살아봐요.”

칼같이 선을 긋는 우리를 보며 퀸소히니베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희만은…… 믿었었는데……!”

“야, 진정…… 으억!”

나는 마음 약한 그녀를 위로하려다가 하마터면 얼굴이 찢길 뻔했다.

바로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뜻밖에도 용의 여왕이 그 거대한 몸을 우리에게 굽히며 간청하였다.

“너희가 함께 증인으로 가줬으면 한다. 딸을 처형시키긴 싫으니까.”

“무죄 따내면 보상을 줄 겁니까?”

내가 당당하게 묻자 퀸소히니베가 기겁했지만, 본드래곤은 웃었다.

“지나치게 당돌하군. 인간이여.”

“난 대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아서.”

“무슨 보상을 원하는가?”

회귀자들 곁에만 있다 보니까 내 간도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지 오래다. 기밀서고의 마법서를 얻지 못한 만큼 그만한 보상을 뽑아내야 하겠지.

나는 닳아빠진 레이피어를 올렸다.

오랜 기간 쓴 것은 아니지만 격한 전투로 인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칼. 지금 쓰는 것은 닳아빠져서.”

“좋다. 만족할 만한 보상을 약속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지금부터가 협상의 본론이었다.

“아크 리치를 죽이는 원정에 용들 또한 참전해주시길 바랍니다.”

레샬피티에는 상당히 놀란 듯했다.

“아크 리치. 설마 내가 아는 그 아크 리치가 이계에 실존한단 건가.”

“현 황색대륙의 지배자입니다. 향연의 산맥에 모습을 감추고 있죠.”

“자살하려고 작정했나? 인간.”

레샬피티에조차도 그 요구조건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네 욕심이 너무 과하군. 네가 내건 조건은 중립을 어기는 일이다.”

“그것이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해뒀던 꼼수를 말했다.

“확실히 위험하지만, 문제없군. 그러나 네 욕심이 큰 것은 여전하다.”

“따님을 살리기 싫으십니까?”

“감히 내 딸을 협상에 내걸다니.”

“나는 유일하게 회귀를 못하는 인간입니다. 이용할 것은 이용해야죠.”

레샬피티에는 용의 여왕답게 판단을 내리는 데 긴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구두로만 일삼는 약속보다는 서로를 써먹는 이용관계가 믿음직하다.”

그녀가 내 요구조건을 수용했다.

“수용하도록 하지. 하나 내 딸이 살았을 경우만이다. 간이 큰 인간.”

“감사합니다. 레샬피티에.”

그렇게 대등한 이용관계가 성립되었다.

카티에가 내게만 다급히 속삭였다.

“대장. 미쳤어요? 회귀자도 두려워하는 용의 소굴로 들어가겠다고요?”

“너한테 그 말 들을 정도면 나도 꽤 버림받은 세상에 적응했나 본데.”

“명검은 다른 루트로도 구할 수 있어요! 내가 아는 곳만 해도…….”

“그럼 아크 리치를 죽이는 데 용이 가담했던 회차가 지금껏 있었어?”

내 물음에 카티에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불안해하는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이런 세상에서 아크 리치를 죽이기 위해 내 목숨을 거는 건 값싼 판돈이지.”

“……참 대장다운 말이네요.”

게다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 퀸소히니베가 죽는 것도 보기 싫다. 나는 꽤 그녀가 마음에 들었거든.

에라이, 모르겠다.

“언제 갈 겁니까?”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다.”

“기왕 갈 거면, 빠르게 갑시다.”

어째 내 여행길은 항상 위태롭냐.

헤르탄은 묵묵히 짐을 쌌고, 카티에는 조용히 목에 밧줄을 걸었다.

* * *

우리가 용의 집회장에 들어서는 데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간 우리의 이동방법은 참 다양했는데, 하늘 위를 맴돌거나 위장된 환상절벽을 수십 개나 뚫기도 했다.

나는 우리를 태운 레샬피티에의 갈비뼈에서 떨어지지 않게 애를 썼다.

“일부러 빙 돌아가는 건 아니죠?”

“용의 집회는 용들만의 철저한 비밀이니까요. 방식이 까다롭습니다.”

헤르탄은 용이 사냥한 대형 도마뱀의 고기를 썰어 비축하며 대답했다.

특히 카티에는 비행 멀미에 적응을 못 하고 항상 울렁대는 표정이었다.

“회귀할 것 같아요.”

나는 그런 소녀를 황당한 얼굴로 보았다.

“너, 목의 밧줄은 언제 풀 거야?”

“대장이 죽으면 내가 언제든 자살할 수 있게끔 조치를 한 거예요.”

“너무 의존적인 행태 아니냐?”

“흥. 이건 진취적인 자살이에요.”

내가 그처럼 주체적인 동료를 뒀다는 행운에 감격하고 있을 때, 퀸소히니베가 질색했다.

“벌써 다 와버린 것이야.”

용들의 소굴은 드높은 땅덩이였다.

그러나 근처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런 것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용의 마법으로 위장됐던 거겠지.’

레샬피티에는 용의 소굴 근처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창여할 장로들을 소집해야 하니, 너희는 따로 정문으로 들어서라.”

본드래곤이 날아가자 나는 평지에서 용의 소굴로 가는 정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문짝이 저렇게 커다래?”

그야말로 용들이 출입하기 위한 거대한 대문이 우리 앞에 덩그러니 있었다. 얼마나 문이 크고 높은지 그 크기만 봐도 작은 산은 압도할 것 같았다.

정문 앞으로 걸어가자 굵은 뼈로 이뤄진 거인이 우리를 내려다봤다.

“내 허가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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