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59화
[적의 시체에 금화 한 닢을 뿌리면 영웅등급 칭호를 얻게 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8씩 오릅니다.]
[피를 쏟는 파멸의 망토 효과로 능력치 성장 효율이 증대합니다.]
[힘이 1 추가로 올랐습니다.]
[가속의 상자를 습득했습니다.]
그 기나긴 문구를 읽을 새도 없었다.
인생 주마등이 미신이란 걸 깨닫게 되는 과정은(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니 분명 결과도 마찬가지겠지?
“으아악!”
나는 고성을 지르며 몸을 허우적거렸지만, 추락을 멈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망할!
바닥에 충돌해 목이 꺾이고 눈알이 튕겨 나갈 추락사를 목전에 두고서, 나는 문득 추락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
불현듯 눈을 뜨자 난 허공이 아니라 옥상에 멀쩡하게 누워 있었다.
갑자기 뒤바뀐 위치에 허우적거리던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으, 아아?”
“귀여운 추태를 부리지 마라.”
나는 헛기침하며 일어섰다.
본드래곤, 아니 레샬피티에가 말했다.
“내가 너를 구하기 위해서 시간을 무려 5초나 정지하였다.”
“방금 시간을 멈췄단 말입니까?”
“썩 내키는 행위는 아니다.”
시간의 괴물, 레샬피티에.
그녀가 진정 무서운 것은 무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나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녀는 시간을 멈추고 나를 구해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멈춘다는 엄청난 능력에 아무런 페널티가 없진 않았다.
나는 레샬피티에를 면밀히 살폈다.
‘사기적인 능력인 만큼 용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가는 모양이군.’
본드래곤의 꼬리뼈 끝자락이 극히 일부분 썩어 문드러졌다. 시간을 멈추는 대가로 그녀는 몸체의 뼈 일부가 썩어 없어진 것이다.
‘겨우 5초 만으로 저만한 대가라니.’
레샬피티에가 나를 내려다보며 철판을 긁는 듯한 저음으로 말하였다.
“내가 널 구한 이유는 딸이 처음으로 사귄 친우라 여겼기 때문이다.”
“과연 용의 눈썰미는 정확합니다.”
나는 그 말에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당신 딸은 날 노예로 여긴다고 고집하지만, 실상은 대충 그런 느낌이니까.
그때 카티에가 황급히 달려와서 안겼다.
“대장이 죽는 것을 보고 나서 나도 뒤이어 뛰어내리려고 했었어요.”
“진지하게 묻는데, 회귀자들은 자살할 때 아픔을 못 느끼냐?”
“하긴, 밧줄에 목매는 게 나았을까요? 역시 고통으로 따지자면…….”
카티에가 진지하게 재잘댔지만 나는 대충 흘려듣고 소녀를 떼놓았다.
옥상에 사병들의 시체가 그득했지만, 이들이 전부라고 볼 순 없었다.
“곧 있으면 사태를 파악한 나머지 사병들이 옥상에 올라올 것입니다.”
헤르탄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바닥이 별안간 크게 흔들렸다.
게오르킨에게 볼을 꼬집히고 있던 할턴이 경악하며 아래를 가리켰다.
“성의 날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공성을 하늘에 띄우고 있던 수많은 날개 형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위니아가 사망하자 그녀가 달아둔 날개들 또한 사라지고 있는 것.
옥상 바닥이 크게 기울었고, 모두가 휩쓸려 넘어지며 벽에 부딪혔다. 삽시간에 창공성은 추락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내려가야 하지?”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어느 누구도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다들 머릿속에 떠오른 탈출방안을 감히 제안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그런데 그때 퀸소히니베가 말했다.
“어머니. 저희를 태워주세요.”
레샬피티에가 모두가 생각하던 탈출법을 제안한 딸을 낯설게 보았다.
“지금 ‘저희’라고 했니? 그런 단어를 입에 담은 것은 또 처음이구나.”
“……어서요! 시간이 없잖아요!”
“용에게 비천한 나귀처럼 인간을 태우라니. 못난 딸을 두어 이 어미가 되살아나서까지 고생하는구나.”
그녀의 얼굴이 또 붉어졌지만, 레샬피티에는 개의치 않았다.
“수가 너무 많아 발로 잡을 순 없겠군.”
본드래곤이 그 커다란 뼈 아가리를 우리를 향해서 쫙 벌린다. 순간 그녀가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줄 알고 모두 기겁을 하였다.
그러나 퀸소히니베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아가리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톡 쏘아붙였다.
“얼른 오지 않고 뭘 하는 것이야?”
“……입속에 담아 태워주겠다고?”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카티에가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삼켜지는 것은 아니겠죠?”
“우리가 소화될 위장이나 있겠냐? 얼른 뛰어! 이러다 떨어지겠다!”
우리는 흉악한 본드래곤의 아가리에 뛰어들었고 턱뼈 위에 올라탔다.
“우와! 뼈야! 왜 살이 없어!”
“전하! 위험하십니다!”
레샬피티에가 날갯짓하며 떠오르자 우리 모두 큰 턱뼈를 꽉 붙잡았다.
헤르탄이 뼈를 붙잡고 감탄하였다.
“지금껏 용의 아가리에 들어가고도 살아 돌아온 회귀자는 없었습니다.”
“딱 한 명, 롬이란 사람이 용한테 삼켜지고 살아 돌아왔단 소문이 돌기는 했었어요. 물론 그 미친 인간은 칼로 항문을 찢고 나왔다지만.”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간, 동시에 성이 땅을 향해서 추락했다. 그 웅장해 보였던 창공성이 몰락하는 데는 겨우 1분조차 걸리지 않았다.
콰아앙-!
고공에서 추락한 성이 무너졌다.
조금만 지체했다면 우리도 저렇게 박살 났을 거라고 생각하니 오싹했다.
레샬피티에는 땅에 부드럽게 착륙해 아가리를 벌려 우리를 내려줬다.
“봐라, 세상아! 우리가 돌아왔다!”
“반갑구나, 정겹게 내딛던 대지여!”
기사들은 환한 얼굴로 기뻐하며 무릎을 꿇고는 땅에 키스했다.
나 역시 그들처럼 기쁘긴 했지만, 하늘에 남아 있는 잔당 때문에 웃을 수 없었다.
‘저 사병들, 생명줄 한 번 질기군.’
공중에는 낙하산 비슷한 기구를 펼친 패잔병 수백이 잔존해 있었다. 역시 창공성에서 생활한 사병들이라 추락대비 훈련은 완벽한 것이다.
저들 대부분이 원한을 갖고 훗날 우리에게 복수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좀 난감한데.’
회귀자는 복수심이 강하다.
이 버림받은 세상에, 안 그래도 전생의 원수가 넘쳐나서 곤란할 지경이다.
그런데 미래의 원흉이 될 불씨 수백이 지금 하늘에서 흩어지고 있다.
지금 저들이 도망치게 내버려 둔다면 나중에 얼마나 강해져서 돌아와 내게 복수하겠는가.
그때 레샬피티에가 또 날아올랐다.
“본드래곤이 왜 저러지?”
“대장. 용은 목표한 적은 놓치지 않아요. 그래서 무서운 몬스터죠.”
그 말대로 그녀는 딸을 폭행한 적들을 전혀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고공에 날아오른 본드래곤이 포효하며 시커먼 숨결을 화락 내뱉는다.
하늘에서 어두운 열기가 쏟아진다.
“크와아아-!”
귀청이 터질 듯한 폭음이다.
레샬피티에가 숨결을 뱉을 때마다 패잔병이 비명도 못 지르고 죽었다.
하늘로 도망쳤더라도 적을 놓치지 않고 깨끗이 섬멸하는 용의 강력함!
‘……장관이로군.’
그걸 보고 나는 어째서 용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퀸소히니베, 계속 친하게 지내자.”
“흥. 내 노예 주제에 왜 이리 말이 많은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퀸소히니베는 내 옆으로 가까이 와서 살포시 앉았다.
본드래곤은 땅에 내려 뿔뿔이 흩어지는 패잔병들을 뒤쫓아 사라졌다.
“이대로 그냥 가버린 건가?”
“어머니는 패잔병들을 소탕하고 늦어도 내일쯤이면 돌아오실 것이야.”
그나마 숨을 돌릴 시간이 생겼군. 그러고 보니 꼬박 하룻밤을 샜잖아?
“체감으로는 열흘 지난 것 같아요.”
카티에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투덜댔다.
긴장이 풀리자 게오르킨은 곧장 땅에 털썩 앉으며 투정을 부렸다.
“배고파!”
“어, 죄송합니다, 전하. 급히 나와서 먹을 걸 챙기지 못했는데…….”
기사들이 난처하단 표정을 지었다.
“히잉! 배고파아~!”
소년왕의 울음소리가 점차 커졌다.
역시 백치의 간호는 쉽지 않군. 심신이 피곤한 경우에는 특히나.
그런데 그때 헤르탄이 품에서 쓰디써 보이는 산야초를 꺼내 내밀었다.
“단삼입니다. 차고 쌉싸름하지만 정신이 나는데 그만입니다.”
게오르킨은 헤르탄을 무서워했다.
온전히 기억은 못 하겠지만, 어찌됐든 자신을 백치로 만든 자였으니까.
그러나 소년은 두려워하면서도 산야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써어?”
게오르킨은 단삼을 움켜쥐었다.
입맛이 특이한지 소년은 놀랍게도 그 자줏빛 뿌리를 맛나게 먹었다.
“또 있어?”
헤르탄은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몸을 깊이 숙이며 큰절을 했다.
“죄송합니다.”
“없구나? 아쉬워!”
그 사과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백치인 게오르킨만 빼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나는 소년의 반대편으로 돌아서 앉은 헤르탄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누굴 위해, 어떤 심정으로 간호식에 고집을 부렸는지 이제 알겠군.
헤르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범철. 라임차를 타봤습니다.”
“…….”
우리는 그 시디신 차를 맛보고 얼굴을 한 번 찌푸린 뒤에야 휴식을 취했다.
대낮의 햇빛은 눈이 따가울 정도였지만 모두 피로에 지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벌레 소리조차 없이 따사로운 대낮.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꺼져, 아로즈.”
대답은 없었지만, 편히 눈을 감는다.
그녀가 나오는 악몽 따위는 없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편하게 잠들었다.
* * *
밤이 되어서야 깨어난 밀밭기사단은 부지런히 떠날 채비를 꾸렸다. 이제 소년왕도 구출했으니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주머니를 긁으니 말린 자두꼭지가 있긴 있네. 위장도 말라버리겠군.”
“가는 길에 사냥이라도 해야겠다.”
“후딱 가자고. 그 용이 오기 전에.”
대륙 최강의 기사들은 저마다 유쾌하게 인사하며 우리와 악수를 했다.
감정이 솔직한 그들의 얼굴에서 수더분한 아쉬움이 묻어져 나왔다.
“여러 번 살아도 헤어질 때 느껴지는 시원섭섭함은 언제나 똑같지.”
“너희랑은 함께 걷는 맛이 있었는데…… 기회가 되면 또 함께 여행하자고.”
“범철. 다음에 재회할 때 당신의 검이 더욱 성장해 있길 바랍니다.”
“지금의 넌 전생보다 성장 속도가 훨씬 빨라. 부지런히 수련해서 검의 정점에 올라라.”
특히 세그라가 먼저 헤르탄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을 보고 난 놀랐다.
“되도록 다음 삶부터 보지 말지.”
“서로에게 득이 되는 약속이로군.”
나도 조금 헤어짐의 아쉬움을 느끼며 세그라에게 놋쇠반지를 튕겼다.
“이게 뭔가?”
“아크 리치를 사냥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반지. 반지가 뜨거워지면 다들 협곡에 집합해서 출정을 할 거야.”
“그런데 이걸 왜 우리한테?”
“나는 이번 회차에서 회귀를 멈출 거다. 아크리치 원정에 밀밭기사단도 함께 출정해줬으면 좋겠군.”
황색대륙 최강의 밀밭기사단.
그들이 함께해 준다면 아크 리치 원정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흠. 이번 회차에서 네게 도움을 받았고 그 제안도 고맙지만, 전쟁에 참전하려면 명목상 전하의 허락이…….”
“삼촌! 도와줘! 나, 칼싸움 좋아!”
“그래. 말 참 잘하네.”
내가 픽 웃으며 잘생긴 소년왕의 머리를 엉망으로 흩뜨려놓았다.
“히! 나, 머리 안 감았어!”
“괜찮다. 나도 손 안 씻었어.”
“……항상 의문이지만 전하께서는 널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부기사단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나는 그에게 협곡에 있는 자살기도회 본부의 위치를 간략히 설명해줬다.
“세 지배자를 죽여 회귀를 멈추는 게 목표라면 모든 대륙을 돌겠군.”
“그래. 적색대륙까지 가봐야겠지.”
세그라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혹시나 나중에 청색대륙에서 단장님을 뵙게 되면 안부를 전해주라. 이번 회차 우린 잘 지내고 있다고.”
“인연이 닿는다면 그렇게 하지.”
기어이 헤어질 시간이다.
떠나는 기사단의 모습을 지켜본다.
“아크리치를 죽일 때 재회하지.”
“잘 있어, 삼촌! 잘 갈게, 나!”
열심히 뛰어가는 소년의 뒤통수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중에 자식을 키우고 싶은걸.”
“어떤 여자랑 말이에요?”
“내가 집안에서 열심히 애나 보게끔 능력이 좋고 나만 보는 여자.”
카티에는 얼굴을 지그시 붉혔다.
“그럼 아주 가까이에 있네요.”
“응? 헤르탄은 여자가 아닌데?”
카티에가 나를 발로 차려고 했고, 나는 능글맞도록 잽싸게 피했다.
한 손에 쥐어지는 상자를 꺼낸다.
‘가속의 상자라고 했던가?’
희귀칭호로 인하여 극대화된 보상!
창천의 여제를 죽이고 획득한 아이템을 확인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