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57화
“모성애 덕분이다. 네가 혐오하고, 나를 괴롭히는 그 빌어먹을 사랑.”
“무슨 허튼소리를…….”
위니아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을 때.
시간의 괴물이 세상에 도래하였다.
“크와아아아-!”
끔찍한 울음소리가 귀를 찢었다.
어두워진 하늘에 흑색 기운이 모여 들고 커다란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적과 아군 모두 시간의 괴물의 장대한 위용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세, 세상에!”
“다, 다리가 떨려! 제기랄!”
일식이 끝나며 햇빛이 내려 든다.
평소 무덤덤한 헤르탄조차 경기를 일으키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본드래곤!”
뼈다귀로 이뤄진 날개 두 장.
그리고 성채보다도 훨씬 큰 몸집.
최초로 인간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간을 다루는 이계의 불길한 악몽.
흉악한 본드래곤이 시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참혹하게 포효하였다.
“크아아아아-!”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제길, 저딴 걸 종으로 삼겠다고?
고작 포효만으로도 창공성을 비행시키는 날개가 흔들릴 수준이었다.
대형 언데드가 타고난 투기, 공포!
회귀자인 사병들조차 겁을 먹었다.
“서, 성이 흔들린다!”
“거, 겁먹지 마라! 우리 편이잖아!”
“괘, 괜찮아! 우리 쪽에서 소환했으니 먼저 우리말부터 들을 거야!”
본드래곤의 범접할 수 없는 투기에 가장 먼저 저항한 것은 위니아였다.
“본드래곤이여!”
뼈다귀 속의 새파랗고 큼지막한 눈동자가 위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몸을 조금 떨긴 했지만 본드래곤을 향해서 당당히 선언했다.
“내가 당신을 소환한 회귀자다! 나는 당신과 계약을 할 사람이며, 또한 나에 의해 소환된 당신은 나의 말에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본드래곤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끔찍한 괴물의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본드래곤은 나의 일행의 어느 거만한 젊은 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퀸소히니베가 벌벌 떨면서 주저앉고는 세찬 비명을 내질렀다.
“……어, 어머니!”
본드래곤이 대가리를 내렸다.
흉악한 아가리가 썩은 내를 풍기면서 불길한 중저음을 발산하였다.
“퀸소.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니.”
모두가 눈알의 초점이 흔들렸다.
그러나 청각에 장애를 가진 것이 아니고서야, 방금 그 말은 진실했다.
“본드래곤이 말을 했어……?”
“저, 저게 무슨……?”
위니아조차 당황스럽긴 매한가지.
“본드래곤이여! 당신이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은 소환자인 바로 나다!”
그러나 본드래곤은 미동도 없었다.
위니아는 혼란해서 입술을 씹었다.
“어머니라고……?”
그때 사슬의 잠금쇠가 떨어졌다.
철컥!
나를 옥죄던 속박이 풀린다.
완전히 방심한 그녀는 무방비였다.
나는 바닥의 의식용 단검을 주워들고서 순백의 날개를 무참히 찢어버렸다.
쫘자작!
깃털이 흰 눈처럼 높게 흩날린다.
정면에 튄 핏물이 칼끝을 적셨다.
“크흑!”
위니아가 무력하게 쓰러졌다.
난 그녀의 등을 힘껏 지르밟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이를 갈면서 사납게 몸부림을 쳤다.
“범철! 이걸 알고 일부러!”
“더럽게 늦게도 눈치채는군.”
분노해 저항하나 힘은 약해빠졌다.
뒷목에 칼을 대고 차게 내뱉었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혈연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새끼야.”
***
내가 뛰어난 지략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낱 바보인 것도 아니다.
난 시간의 괴물이 퀸소히니베의 어머니란 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정확히는 서고에서 위니아가 내게 소환의 서를 보여줬을 때부터였다.
【본드래곤 레샬피티에】
무자비한 용의 여왕.
소환의 서에 적혀진 괴물 중에서 가장 소환하기 번거롭고 흉포하다.
시간을 다룰 수 있으며 대형 언데드로서의 무자비한 투기를 지녔다.
그 놀랍고 악독한 시간능력은…….
……(중략)……
생명체시절 마지막으로 잉태한 딸, ‘퀸소히니베’를 몹시 아낀다고 한다.
그러나 온갖 괴물에 능통한 필자조차 그 용의 정보만은 입수 못 했다.
대륙 어딘가에는 그녀가 아끼는 딸이자 권속인 용이 살아갈 것이다.
소환의 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보고서 나는 놀라서 눈을 의심했다.
본드래곤의 설명에 구석이지만 당당히 쓰여 있는 퀸소히니베의 이름!
한참 보고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동료의 어머니가 본드래곤이라는 것을.
‘어째 그동안 퀸소히니베가 언데드를 보고도 꺼리지 않는다 싶었지.’
어머니가 본드래곤인데 그깟 잡졸 언데드 따위를 무서워할 리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그녀가 파란 보석을 어머니 눈에 비유했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게 된 이 사실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오히려 뒤통수를 칠 수 있겠군.’
위니아는 본드래곤과 계약해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세상에서 혈연을 이길 것은 없다.’
그 어느 어머니가 자기 딸의 애원보다 남의 명령을 먼저 듣겠는가.
오히려 퀸소히니베를 이용하면 본 드래곤을 아군으로 삼게 될 것이다.
용의 화력은 막강하지.
특히 죽었다 되살아난 본드래곤이라면 더욱.
그저 나 혼자서만 거물의 세력을 휩쓰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본드래곤이 함께한다면?
단순히 휩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놈들을 가루로 부수고도 남는다.
‘오히려 위니아에게 붙잡히고 소환 의식에 응하는 것이 도움이 됐다.’
내가 머저리도 아니고, 왜 뭘 해보지 않고 위니아에게 붙잡혀 계획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만 보았겠는가?
그녀의 계획이 내게 득이 되고 뒤통수를 치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퉷.”
나는 쇠 맛이 나는 침을 뱉었다.
줄곧 락픽을 물어서 입이 비렸다.
‘조금 낡기는 했어도 쓸 만하군.’
도둑 길드 수장 튜크가 내게 줬던 락픽은 맨몸에 숨기기 딱 걸맞았다.
이 락픽은 입속에 넣으면 크기가 축소되어 간편히 숨길 수 있었다.
‘신중히 혓바닥 밑에 두지 않으면, 실수로 삼키게 될 수도 있겠지만.’
물론 락픽이 있다고 해도 쇠사슬에 몸이 묶인 채로 잠금을 풀 순 없다.
그러나 나의 손은 속박된 상태로도 잠금쇠를 가볍게 딸 수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SSS급 잠금 해제 재능 손재주가 속박한 잠금쇠에 반응합니다.]
[현재 SSS급 마법재능이 4서클을 이뤄 합성 시너지를 발산합니다.]
[잠금 해제와 마법의 합성!]
[초당 17% 마나를 소모해 양손한정 공간왜곡이 사용 가능합니다.]
[재능합성의 시너지는 각 재능의 경지와 상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재능의 합성, 공간왜곡!
몸은 쇠사슬에 묶여있었지만 내 손이 공간을 왜곡해 잠금쇠를 풀었다.
원래 마법이나 용을 이용해서 끊으려 했는데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가벼운 재능이라고 얕봤었는데 설마 이런 응용까지 가능할 줄이야.’
재능의 합성은 처음 겪은 일이다.
앞으로 어떤 조합으로 재능을 섞느냐에 따라 전투력이 상승할 것이다.
지금 나의 마법경지가 이전보다 훨씬 올랐기에 가능해진 일이리라.
‘재능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내가 성장하면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하여간 지금까진 설계대로 풀렸다.
이제 본드래곤이 소환되었으니 더 이상 위니아에게는 볼일이 없었다.
“모녀상봉을 마련해 줘서 고맙다.”
내가 그녀의 목을 내려치는 순간.
위니아의 등에서 날개가 솟구쳤다.
무려 각기 다른 여섯 장의 날개!
휘익!
순간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만큼 무지막지한 체감속도였다.
“범철, 이 빌어먹을…… 커흑!”
하늘로 솟던 위니아의 날개 한 장이 곧장 내 칼에 베여 찢겨나갔다.
날개를 비틀거리며 비행궤도가 흐트러져 버린 그녀가 경악했다.
“어…… 어떻게 원거리에서 검을?”
나는 칼을 되잡으며 혀를 찼다.
‘마나 소모가 너무 크고 뻗어 나가는 방향이 제멋대로군. 공간왜곡은 아직 좀 더 연습이 필요하겠어.’
반사적으로 날개 한 장은 베었지만, 결국 그것에서 그칠 뿐이었다.
“버, 범철! 저놈이 풀려났다!”
“떠, 떨지 말고 다들 움직여!”
본드래곤에게 시선이 뺏겨 있던 사병들이 그제야 내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대형 언데드의 투기에 떨면서 제 몸 하나 간수를 못 하고 있다.
나도 본드래곤이 퀸소히니베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진 못했을 거다.
‘무엇보다 멸살군주만큼 부하들과의 결속체계가 뛰어나지는 않군.’
끈끈한 신뢰로 이어져 있던 멸살군주와 달리 이들은 그저 종속관계다.
그래서 본드래곤의 위용에 밀려 상관을 위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턱을 들었다.
“내가 너부터 죽인다고 했던가?”
“그, 그런……!”
나를 기둥에 묶었던 뚱뚱한 사병이 움찔하다가 쏟아진 불에 태워졌다.
“끄아아악! 사, 살려줘! 제발!”
화기의 뱀!
4서클의 화염마법으로 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속도, 화력이 특징이다.
물론 재능에 걸맞게 내가 쓴 화기의 뱀은 여타 마법사보다 우월했다.
뱀처럼 접근한 불이 적을 사른다.
나는 순식간에 까맣게 타버린 사병의 시체를 짓밟아서 으스러뜨렸다.
“다가와. 구워줄 테니까.”
“으으……!”
“버, 범철이 마법까지……?”
“그것도 보통 화염이 아니잖아!”
사병들은 내게 다가오길 주춤했다.
정확히는 판단능력을 잃은 듯했다.
위니아가 하늘에서 윽박질렀다.
“지금 저놈 하나 잡지 못하고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죽여라!”
하지만 혼자서만 안전하게 피신한 군주의 명령은 설득력이 없었다.
위니아조차 당황해 버린 것이겠지.
따라서 지금이 허점을 노릴 기회!
“으, 으아악!”
“뜨거워! 타죽는 건 질색이라고!”
나는 마법으로 사병들을 불태우며 본드래곤 쪽으로 재빠르게 뛰었다.
“퀸소히니베의 어머님이시여!”
내가 목청껏 소리치자 본드래곤이 처음으로 인간한테 반응하였다.
“퀸소. 저 미약한 인간이 어째서 네 고귀한 이름을 알고 있는 거니.”
“그, 그러니까 저 인간은 그……!”
“당신 딸과 동행하는 일행입니다!”
내가 대신 대답하자, 본드래곤이 흥미롭다는 듯 내게 눈을 움직였다.
“내 딸의 벗인가.”
“바로 맞추셨습니다.”
“하지만 내 딸은 친우가 없는데.”
퀸소히니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고, 나는 간신히 웃었다.
“지금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적의 세력을 휩쓸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용은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 인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난 속박당한 일행 앞에 멈춰 섰다.
갑작스러운 변수에 놀란 기사들이 나를 향해 앞다퉈 질문했다.
“형씨!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아가씨가 진짜로 용이었어?”
“본드래곤을 어머니로 뒀다고?”
하나 일일이 말 상대해 줄 수는 없다.
‘망할, 시간이 없어!’
본드래곤의 투기에 압도돼 사병들이 주춤거리는 지금 서둘러야 했다.
최대한 시간단축하려면 가장 믿음직한 동료부터 풀어줘야 할 것이다.
카티에가 확신하며 날 쳐다보았다.
“대장!”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헤르탄의 쇠사슬 잠금쇠부터 락픽으로 풀었다.
“…….”
“헤르탄.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눈빛만 봐도 압니다. 범철.”
과연 헤르탄이다.
죽이 잘 맞는 우리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척 끄덕였다.
“꺄아악!”
헤르탄이 가차 없이 양손으로 퀸소히니베의 가녀린 목을 감싸쥐었다.
그리곤 이글거리는 눈동자의 본드래곤을 향해서 크게 협박했다.
“지금 딸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당장 여제의 세력을 전멸시…….”
“제기랄! 그게 아니고!”
나는 그의 머리를 칼집으로 후려치고 창백해진 퀸소히니베를 구했다.
“칼솜씨가 일취월장하고 있군요.”
헤르탄이 휘청거리며 감탄했다.
내가 그녀를 감싸며 소리쳤다.
“레샬피티에. 저들을 죽이는 것은 중립에 결코 위반되지 않습니다.”
“어째서이지.”
“퀸소히니베를 폭행했으니까요! 왜 그녀가 쇠사슬에 묶여 있겠습니까?”
본드래곤의 안광에 살기가 더했다.
죽음에서 되살아났어도 모성애만은 굳건한 어머니가 우리를 내려 봤다.
“사실이니. 퀸소.”
“트,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그게 인간에게 맞기도 했지만……!”
퀸소히니베는 한낱 인간에게 농락당한 것을 들키자 창피해 어쩔 줄 몰라 하다 내 품에서 울고 말았다.
“되었다.”
본드래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상황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위니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조약위반이다! 당신은 소환자인 나의 명령부터 귀담아들어야…….”
“닥쳐라.”
막대한 위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위니아의 휘날리던 날개가 주춤하면서 표정이 새하얗게 굳어버렸다.
잔혹함이 진득한 울음이 울린다.
“어미로서 자식을 건드린 놈을 아작 내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복수이며, 용의 율법상 중립에 의거한다.”
본드래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누구이지. 내 가엾은 딸을 구타한 몰상식한 인간은. 내 친히 파괴시켜 주겠다.”
이제 주도권은 내 손에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