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56화
“축복 걸게 얼른 비켜요, 용!”
카티에는 퀸소히니베가 싫었다.
용이란 종족만 믿고 자신을 거만하게 깔보며 현실에 무식한 위험분자.
“네년이 알아서 피해가란 것이야!”
퀸소히니베는 카티에가 싫었다.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고 맞서기만 하면서 항상 가르치려 드는 꼰대.
“…….”
헤르탄은 저 둘을 버리고 범철을 찾으러 가는 것은 어떨까 고민했다.
일행 역시 소중하지만 그에겐 범철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위해서 나중순위를 버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섭리였다.
‘하지만 효율성이 너무 낮군.’
그는 일단 차질이 많은 그 계획은 보류하고 차선책을 구상했다.
창공성의 비행장!
거물의 사병들에게 포위된 그들은 쉴 틈 없는 공세를 버티고 있었다.
“크헉!”
“3열은 후방에서 화살을 쏴라!”
“뒤편의 성녀는 생포해야만 한다!”
피가 난무하며 칼이 내려친다.
수백의 사병들은 일제히 전투에 참여했으나 애석한 사실만 알게 됐다.
회귀자들에게도 격이 나뉜단 것을.
“하늘에 있으니까 자꾸 흔들리네?”
“이얏호! 승강기 밧줄 타기 좋네!”
“그 화살, 겨냥은 제대로 했냐? 좀 제대로 조준해 날려봐, 얼간이들!”
창공성은 날아다니는 성이다.
사병들조차 성에 익숙해지려고 일주일은 고생하는데, 저들은 그런 티도 없이 비행장 구조를 활용하였다.
도르래 밧줄과 가끔 흔들리는 바닥은 오히려 기사들에게 이점이었다.
“비행장에 붙은 격납고, 폭탄 잔뜩 있는데? 방비가 왜 이리 허술해?”
“적측 대장들한테서 마법방패나 뺏어 쥐어라. 화살 막는 데 그만이다.”
콰가강!
“으어어억!”
폭발에 휩쓸리는 거물의 군세!
평지라면 몰라도, 기사들에게 복잡한 비행장은 천혜의 전장과 같았다.
밧줄을 타며 칼을 휘두르는 기사들을 보며 적들은 어이가 없었다.
“수, 숫자 차이가 이렇게 나는데!”
“보, 보통 놈들이 아니…… 크헉!”
사병들은 일행과 기사단을 몰아넣고도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카티에가 각자에게 신속의 축복을 걸자 몸이 가벼워져 세차게 뛰었다.
퀸소히니베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괴력으로 적들을 단체로 휩쓸었다.
헤르탄이 최소한의 힘으로 나무뿌리를 활용하자 적들이 추락했다.
“크허헉!”
“으아아악! 떨어지고 싶지 않아!”
밀밭기사단은 적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기며 그런 일행에게 감탄했다.
세그라가 적어진 능력치로도 가뿐하게 사병 셋을 썰고는 기막혀했다.
“서로 투닥거리며 싸우는 와중에도 각자 제 할 일은 알아서 하는군?”
“회귀는 헛했다고 생각하나요?”
카티에가 날카롭게 쏘아붙이곤 기사단의 잔상처를 가볍게 치유했다.
그러나 상황이 낙관적이진 않았다.
위기만 막아내고 있을 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사병들은 계속 끊임없이 몰려온다.
질적으로 우수해도, 수적으로 불리하면 결국은 체력에서 밀리게 된다.
그나마 카티에가 기력을 보충해 주고 있지만, 소녀도 지쳐가고 있었다.
“지치니…… 날 도우라는 것이야.”
“시끄러워요. 나도 죽겠으니까!”
‘지금 이들을 배신해 넘기고 살아남아 범철을 찾는 것이 나을지도.’
서로가 달갑지 않은 세 사람을 포용시키는 존재가 바로 범철이었다.
그러나 현재 단합되지 않는 세 사람의 중심점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모두들 그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도대체 범철은 어디에 있는가?
역사에도 그랬듯 싸움을 종식시키는 것은 단 한마디의 외침이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전령이 소리쳤다.
“우리가 범철을 잡았다! 여제께선 투항하지 않으면 놈의 사지를 자르겠다 하셨다! 소년왕도 마찬가지다!”
전령은 여제의 협상력에 감탄했다.
그들 전원을 바로 무릎 꿇리게 할 수 있는 말로 그만한 것이 없었다.
***
나는 창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막힌 풍경이로군.’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성의 절경은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햇살은 눈부시고 허연 솜처럼 몽실몽실한 구름이 자유롭게 부유한다.
그러나 창밖이 흔들리며 들리는 불협화음이 감상에 젖어 드는 걸 방해했다.
‘폭발과 비명, 그리고 피.’
누가 초래한 것인지는 자명했다.
하지만 일행을 걱정하진 않는다.
이런 데서 죽게 될 그들이 아니다.
“소환의식은 정오에 치를 건가?”
“일식이 그때 일어나니까.”
“질문에 순순히도 대답해 주는군.”
“네 귀를 자르기엔 시간 아까워.”
위니아는 날개를 쭉 펴고 있었다.
발걸음을 늦추거나 도망치려 하면 그 즉시 깃털이 내게 쏘아지리라.
‘저 반응속도를 꿰뚫고 빈틈만 노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볼 텐데.’
나는 위니아와 그 사병들의 뒤를 따라서 성의 옥상으로 이송되었다.
까마득한 상공에는 뺨을 베어버릴 것처럼 칼바람이 획획 잘도 불었다.
‘바람이 거세군. 지상보다 숨쉬기도 조금 힘든 것 같은데.’
창공성의 옥상에는 소환을 위한 제단이 꾸려져 있었는데, 장관이었다.
저편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불태우고 녹여 유골을 얻고 있다.
장비와 소지품을 압수당한 나는 사병들의 손에 의해 철기둥에 묶였다.
내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빈정댔다.
“좀 부드럽게 묶어줄 순 없냐?”
“시끄럽다. 네가 범철이라도 여제님 앞에선 고작 제물에 불과하다.”
“오, 내 얼굴을 알아? 너도 설마 전생에서 내 손에 죽었던 놈이냐?”
“이런 건방진……!”
뚱뚱한 사병이 내 눈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고는 뺨을 한 대 갈겼다.
짜악!
자기가 벌인 짓에 놀랐는지 사병은 먼저 때리고도 움찔하였다.
“…….”
나는 비틀어진 턱을 천천히 되돌리고는 놈을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풀려나면 너부터 죽인다. 그 다음에는 창천의 여제, 저년이고.”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나 안 되나 두고 볼까?”
사병은 내 웃는 낯을 창백하게 보다가 황급히 고갤 돌리고 물러났다.
제기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주둥아리만 거칠어지네.
괜스레 피 나는 입술을 핥는데 저편에서 익숙한 미소년이 붙들려 왔다.
“삼촌! 범철 삼촌이다!”
“……그래, 재회해서 참 반갑네.”
게오르킨은 나의 맞은편 철기둥에서 사슬로 온몸이 묶이고 있었다.
백치 꼬맹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리 해맑지는 않았다.
“아파! 하지 마!”
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저항했지만 사병들의 손놀림은 거칠었다.
“제길, 짜증 나게! 가만히 있어!”
심지어 아이 뺨을 때리고 머릴 치며 강제로 사슬에 잠금쇠를 달았다.
“으아앙! 아파! 답답해! 하지 마!”
애한테 잘하는 짓이다. 잡것들.
나는 피 섞인 침을 뱉고는 울고 있는 게오르킨을 향해 소리쳤다.
“야. 여기 좀 봐.”
“훌쩍…… 삼촌!”
“너, 살 찌지 않았냐? 기껏 삼촌이 데리러 왔더니 잘 먹고 살았나 보네.”
게오르킨이 코를 훌쩍였다.
“……삼촌이 나 데리러 왔어?”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기겠냐?”
“와아!”
게오르킨은 처맞은 것도 벌써 잊고 웃었고 나는 능청스레 장담했다.
“느긋하게 즐기면서 기다려라. 금방 땅으로 내려갈 수 있을 테니까.”
“삼촌도 꽁꽁 묶여 있어!”
“이거? 우리들 노는 중이었잖아. 풀릴 때까지 계속 인질 놀이하는 거다. 너, 설마 겁먹고 우냐? 응?”
소꿉놀이라면 몰라도 인질놀이는 생소했으나 아이는 금방 발끈했다.
“나! 겁쟁이 아냐! 아냐!”
“그러면 울지 말고 얌전히 있어. 풀릴 때까지. 내가 꼭 구할 테니까.”
뭐, 말은 일단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둘 다 살진 잘 모르겠다.
“응!”
게오르킨은 금방 울음을 멈추고 눈물 흐리지 않게 하늘을 올려봤다.
“이상한 헛짓거리를 하는군.”
위니아는 기둥에 묶인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 울어대는 꼬마를 진정시킨다고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이득이지. 내 귀를 자를 시간이 절약되거든. 시끄럽지가 않잖아.”
내 농담에 그녀가 눈썹을 틀었다.
“너는 참 이상한 인간이야. 범철.”
“아니. 이상한 것은 ‘너희들’이지.”
위니아는 내 비아냥에 답하지 않고서 등을 돌려 소환제단에 걸어갔다.
제단 중앙에 큰 마법진이 그려졌고 유골더미가 그곳에 탑처럼 쌓였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기침이 나올 때쯤, 나의 일행이 묶여서 끌려왔다.
“대장!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설명하다간 내가 울 것 같은데.”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긴 해요?”
카티에가 어처구니없어했고, 남들보다 훨씬 굵은 쇠사슬로 얽힌 퀸소히니베는 무릎을 꿇고 으르렁댔다.
“너희는 고귀한 용을 함부로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야.”
밀밭기사단 또한 제약된 능력치 때문에 당했는지 사슬에 묶여 있었다.
“전하! 당장 구해드리겠습니다!”
세그라가 통곡을 했지만 몸을 묶은 쇠사슬을 끊을 수는 없었다.
“시간의 괴물을 소환하려면…….”
모두 모이자 위니아는 먼저 의식용 단검으로 게오르킨의 팔을 직접 그었다.
“으아앙! 안 아파! 난 안 울어!”
“네년! 전하에게 감히 무슨 짓을!”
“당장 그만둬!”
기사들의 처절한 외침을 무시하고 위니아는 피를 마법진에 흩뿌렸다.
“몰락한 왕의 피.”
그녀는 유골탑을 올려다보았다.
“1,000구의 인간 유골.”
위니아의 눈이 카티에에게 향했다.
“그리고 성녀의 기적이 필요하지.”
“하, 내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기적을 써줄 거라고 생각하나요?”
차가웠던 카티에의 표정이 굳었다.
위니아는 나의 옆에 서서 날 선 장검으로 내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나의 요구조건은 간단해.”
칼날이 나의 손가락을 훑을 때마다 등골이 섬뜩해져 기분이 나빴다.
“마법진에 기적을 걸지 않으면 범철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어. 그 다음은 발가락, 눈알, 그리고…….”
“썼어요!”
“……쉽게 됐네. 예상보다 훨씬.”
위니아는 의식용 단검을 바닥에 던졌다.
모든 절차가 마쳐지자 하늘의 태양이 가려지며 일식이 시작되었다.
마법진이 빛나며 옥상이 흔들린다.
“오오!”
“드디어 시간의 괴물이 소환된다!”
“회귀하면서도 못 본 몬스터라니!”
사병들이 열띠며 흥분하였다.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누가 무슨 짓을 하든 시간의 괴물이 재림하는 것을 막지 못하겠지.
‘난리가 벌어지겠군.’
끔찍한 기운이 모여들고 있을 때.
나는 소환진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풀어준단 약속은 지킬 생각인가?”
“너의 전 부인, 아마 아로즈였었지.”
엉뚱한 대답에 나는 곧바로 눈썹을 찌푸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위니아가 처음으로 나에게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만나봤겠지?”
“……뭐가 말하고 싶은 거냐.”
“내가 그녀를 너에게 보냈었어.”
갑자기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저 표정에 양심의 가책 따윈 없다.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느껴진다.
“널 납치하면 성녀도 알아서 찾아올 테니, 그녀에게 보상을 약속했지. 범철을 데려오라고. 그럼 네가 그와 원하는 아이를 낳게 해준다고.”
기본적인 악함은 속일 수가 없는지 그녀는 참 잘도 부드럽게 고백했다.
“잘 속더라고. 그딴 거짓말을.”
“……그걸 왜 지금 내게 말하지?”
“죽이기 전에 알려주고 싶었어. 네 여자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말이야.”
위니아가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숨결조차 맞닿을 거리에서 귓가를 스치는 속삭임이 내 속을 긁었다.
“분명 죽었겠지, 너의 손에 의해?”
가증스러웠다.
아로즈의 광기를 부추기고, 그것을 내 눈앞에서 조롱하는 저 여자가.
나는 낮아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모성애에 눈먼 여자였지.”
“맞아. 그래서 참 역겨웠어.”
위니아가 드물게 눈썹을 비틀었다.
“나는 모성애를 혐오해. 뇌를 상실하고, 자신을 잃게 하는 하찮은 것.”
“네 마음을 존중하지. 사랑을 강요하는 시선은 때론 내키지 않으니.”
“의외로 말이 통하네. 다음 삶에서 재회한다면 너와는 친구가 될지도.”
그녀의 말이 참 우스웠다.
어느 삶에서 만나는 내가 저런 여자에게서 호감을 느낄 리 만무하다.
위니아가 날 보며 고갤 갸웃했다.
“반응이 무색하군. 놀랍지 않아?”
“아로즈는 전생의 부인일 뿐, 내 여자는 아니었어. 생판 타인이었지.”
하지만 나의 감정은 별개였다.
지금 난 그녀의 복수를 하고 싶다.
목을 풀며 나직이 말하였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뭐?”
“내가 왜 무모히 쳐들어왔겠어.”
손을 풀고, 다리를 푼다.
천천히, 떨림 없이.
“네가 나한테 보냈던 백인장의 깃털이 아로즈의 깃털과 닮았더라고. 네가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줬었지?”
“그 추리력은 인정해 줄 만하군.”
위니아는 눈물 흐르는 오른쪽 눈을 닦다가 문득 의아해하였다.
“하지만 놀라진 않는다고 쳐도 어째서 겁을 먹지 않지? 죽을 위기에 처했잖아. 너는 회귀도 못 할 텐데.”
“너의 배신을 예견했으니까.”
나는 몸을 쭉 펴고 차갑게 말했다.
“회귀자란 것들을 알고 있으니까.”
“…….”
치밀한 위니아는 날 선 눈길로 소환제단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나 제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소환의식 절차도 완벽했다.
내가 여유로이 그녀에게 말했다.
“공들인 의식에 별짓은 안 했어.”
위니아는 그런 나를 하찮게 봤다.
“그런데 뭘 믿고 그리 느긋하지? 마지막까지 허세를 부리겠단 건가?”
몹시 간단한 이유였다.
이것이 내가 짜놓은 판이었으니까.
나의 계획을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