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53화
나는 휑한 눈매로 아침을 맞았고, 카티에가 머릿결을 쓸며 걱정했다.
“대장.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그래. 아주 엿 같더라고.”
“나도 악몽을 꿨어요. 대장이 날 버리고 떠나선 혼자 다쳤는데…….”
재잘대는 소녀의 한풀이를 자명종 삼아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침마다 몸을 웅크리고 자는 용을 깨우는 것은 항상 내 몫이다.
“그만 일어나.”
“아침은 항상 너무 이른 것이야.”
“늦게 일어나면 밤도 일러지겠지.”
“흥. 감히 나를 깨워도 무사한 것은 내 노예와 어머니뿐인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투덜거리며 눈을 비비고는 아주 느리게 일어났다.
밀밭기사단도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면서 힘차게 기상하였다.
“으그그그!”
“이야, 아침햇살 참 화창하네!”
가장 먼저 일어난 헤르탄이 준비한 아침을 간단히 먹고 우린 움직였다.
오늘 부지런히 움직여야 게오르킨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몇몇 기사들이 퀸소히니베를 흘깃 보면서 내 어깨를 팔꿈치로 찔렀다.
“이봐, 형씨. 계속 궁금했는데 저 레이디는 도대체 누구시지?”
“말투가 괴상하고, 힘이 강한 데다 매력은 죽이잖아? 전생서 저런 여자를 봤다면 내가 분명 기억할 텐데.”
“혹시 형씨의 애인이라도 돼?”
기사들의 무수한 질문에도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따름이었다.
“본인이 가끔 말하는 것 못 들었어? 용이라잖아.”
기사들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참나. 저 여자가 용이라면, 형씨는 전생에서 왕이라도 됐겠네.”
진실을 답해줘도 믿지를 않는다.
물론 그것을 알고 말한 것이지만.
하기야 120회차 동안 회귀자가 용을 길들인 경우는 없었다고 하니까.
‘그나저나.’
난 다크서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요새 악몽을 꾸는 빈도와 그것으로 인한 정신피해가 갈수록 심해진다.
결국 나는 헤르탄을 따로 불러서 간밤에 꾸었던 악몽을 털어놓았다.
헤르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순조롭게 미쳐가고 있군요.”
“…….”
내용에 비하여 너무 무덤덤한 말투라 오히려 내가 무안해질 수준인걸.
“범철. 너무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회귀자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니까.”
“글쎄, 나는 1회차란 말입니다.”
“딱히 회귀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행동이니까요.”
그래서 아로즈가 꿈에서 나왔나?
제기랄.
난 찌푸린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샤라펠 미궁에서 밴시들의 합창을 들은 이후로 계속 이렇습니다. 피폐해져 돌겠군요. 특히 누군가 날 죽이려 하는 악몽만은 꾸준히 꿉니다.”
그러자 헤르탄이 눈썹을 올렸다.
“밴시를 합창 때문에 꾼 꿈이면 미래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미래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요?”
나는 의아해서 눈을 크게 떴다.
헤르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밴시들의 합창은 듣는 자의 정신을 붕괴시키고 드물게 어두운 미래를 악몽에서 암시해 준다 하더군요.”
만약 카티에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 미래라면, 그건 너무 끔찍한데.
나는 고개를 돌려서 구슬땀을 흘리며 걸어가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불안한 추측을 거두고서 나는 헤르탄에게 정신상담을 요청했다.
“하여간 내가 악몽을 꾸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가 나의 눈을 가볍게 바라봤다.
“미쳐가는 것이 싫습니까, 범철?”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내가 이상하단 눈초리로 되묻자 헤르탄은 턱을 쓰다듬었다.
“되도록 맨정신을 유지하려면 영혼을 치유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찬찬히 예시를 들어주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편이지만 애 완동물을 키우거나 식물을 가꾸거나, 명상을 하거나. 그런 것들이죠.”
“헤르탄은 어떻게 했습니까?”
“석산에서 멧돼지 한 마리를 키웠었지요. 효과는 크게 못 봤습니다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식물을 가꾸는 것은 원예가 시절에 질리도록 해봐서 썩 당기지 않고, 명상도 취향에는 맞지 않는 편이다.
그럼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애완동물이라도 좀 찾아서 길러봐야 하나?
헤르탄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가장 부정하고 있는 사실을 내뱉었다.
“광기에 휩싸이면 살기 쉽습니다. 회귀자들이 가득한 120회차에서는.”
***
밤새 걸은 우리가 새벽녘에 마주한 것은 입도 다물지 못할 광경이었다.
“허…….”
“회귀를 하다 보면 저런 광경도 자주 보게 되냐? 그건 좀 부러운데.”
“대장. 우리도 ‘저런 것’은 처음 봐요. 지금도 내 눈이 믿기질 않아요.”
우리는 인간이 나는 것도 보았고, 폭탄이 날아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높은 하늘에서 활공하는 대상은 그 둘을 압도했다.
험준한 성벽이 하늘 높이 보인다.
웅장한 성채가 공중을 활공하였다.
양옆에 수천의 날개를 겹쳐서 뻗은 요새가 창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어릴 적에 동화서나 보았던 장면을 실제로 보니 기분이 참 기묘하다.
헤르탄도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 목소리만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규모로 짐작하건대 저곳이 창천의 여제 본거지가 분명합니다. 하늘에 거점을 뒀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세그라가 분통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째 왕의 좌표가 쉼 없이 이동하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지! 전하께선 저 성채에 감금되어 계셨던 거다!”
나는 우렁찬 고함에 귓가를 막고는 얼굴을 찌푸리고서 쏘아붙였다.
“모두 아는 사실을 크게 말한다고 추리력이 뛰어나 보이진 않을 텐데?”
“뭣이? 범철, 찢어져 죽고 싶냐!”
“제기랄. 너희 부단장 양반은 찢어 죽이는 것을 퍽이나 사랑하나 보군?”
“푸하핫!”
기사단원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세그라는 이만 갈았다.
목소리 큰 부단장을 침묵시킨 나는 높이 떠 있는 성을 올려다봤다.
“그러면 창천의 여제도 저곳에 있겠군. 성채에 침입하는 수밖에.”
“그런데 저 성을 어떻게 들어가?”
하늘을 날고 있는 성을 땅에 발을 디딘 우리가 들어갈 방법이 없다.
퀸소히니베가 아쉽게 입맛 다셨다.
“내가 중립만 어기지 않았더라도, 저곳에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야.”
카티에는 조각구름에 맞물리는 성의 뒤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성채도 사람 사는 곳일 테니, 분명 오가는 인력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고생한 다리도 쉬게 할 겸 멀리 앉아서 관찰해 보기로 하였다.
그래도 적진의 근처기에 기사들은 방비를 풀지 않고서 경계를 하였다.
‘창천의 여제 위니아.’
나는 지금의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거물은 게오르킨, 카티에, 그리고 나를 납치해 괴물을 소환한다 한다.
창천의 여제가 소환하려 한다는 시간의 괴물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시간에 관련되어 있는 몬스터라.’
괜히 칼의 시련에서 시간능력을 가진 척하던 고대 평기사가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배낭에 손을 넣고 헝겊 속에 보관해둔 뿌리를 꺼내 확인하였다.
『수련꽃 뿌리(미확인)』
씨앗이 아닌, 뿌리부터 성장해 가는 신비로운 수련. 어떠한 효능의 꽃이 피어날지는 미지수이다.
+구정물, 호수, 연못, 바다, 염산. 어느 물가에서든지 잘 자라난다.
+훌륭한 환경에 심을 경우, 능력치를 올려주는 수련꽃이 피어난다.
‘칼의 시련을 완수하고 얻은 보상.’
예전에 획득한 아이템인데 마땅히 사용할 기회가 없어 보관만 했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독특한 물가를 찾으면 그곳에 심어 써먹어 봐야겠군.
“적들이 다가온다!”
호셀의 외침에 나는 황급히 뿌리를 배낭에 집어넣고 칼자루를 쥐었다.
그가 가리킨 손가락 저편에 검은 점 열 몇 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고공을 주행하는 전투원들.’
우리의 하늘 위로 등짝에 날개를 단 인간 12명이 날아들고 있었다.
각자 날개의 색상이 다르며, 손에는 위협적인 석궁을 들고 있었다.
목청 좋은 세그라가 그들이 날갯짓을 하는 상공을 향해서 소리쳤다.
“너흰 뭐냐!”
“우리는 창천의 여제 소속 백인장들이다. 지금 너희가 온 것을 보니 가노어는 임무에 실패를 했나 보군.”
붉은 날개의 남자가 마법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백인장!
백 명의 수하를 이끄는 전투대장.
우리를 잡기 위해서 무려 12명의 백인장 간부가 집결한 것이다.
‘설마 이렇게 빨리 우리가 온 것을 눈치채고, 금세 습격할 줄이야.’
적이지만 놀라운 대응속도였다.
세그라가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날개색상을 기억한다! 전하를 어디로 납치해 간 것이냐!”
“안심해라. 그 소년은 무사하니까.”
“닥치고 내려와라! 속임수나 잔꾀 없이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자!”
백인장들은 각기 비웃음을 지었다.
“쯧쯧, 회귀자가 내뱉을 말인가?”
“무식한 기사다운 소리로군.”
“속임수도 하나의 무기다, 멍청아.”
나라도 부단장을 비웃었을 거다.
공중에 나는 그들은 전투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이점을 가졌다.
그러니 굳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당당히 상대해 줄 필요가 있겠는가.
백인장들이 일제히 석궁을 겨눴다.
“놈들을 겨냥해라! 단, 범철과 흰 머리칼 성녀만은 쏴서는 안 된다!”
공중에서 석궁으로 사격을 해오면 칼로 막는 것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설령 도망친다고 한들 발걸음으로 날갯짓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기사들의 죽음까지 예견되는 상황!
‘폭탄은 쓰지 않으려나 보군.’
하늘에서 폭탄 수십 개를 떨어뜨리면 우리는 전멸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놈들은 나와 카티에를 데려가야 하기에 폭탄은 쓰지 않는다.
그것이 놈들의 패인이 될 것이다.
“이봐, 세그라.”
내가 세그라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이를 갈던 그가 날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배가 좀 고파서 말이야.”
나는 능청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만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아냐?”
“지금 그딴 얘기할 때가 아니다.”
“바로 번갯불에 구워진 통닭이지.”
“뭐?”
세그라가 영문을 몰라 인상 쓸 때.
나는 여유롭게 손가락을 튕겼다.
“끄아아악!”
상공에서 석궁으로 우리를 겨냥하던 12명의 백인장이 전격에 감겼다.
대약화의 전격폭탄!
그 수십 개의 한정보물을 나는 쉬기 직전에 미리 풀어뒀던 것이다.
소유자가 조종 가능한 폭탄은 백인장들에게 날아들어 전격을 뿜었다.
물론 폭격목표대상은 아니기에 능력치를 절반이나 깎을 수는 없었다.
[대상의 민첩 능력치가 10분간 하락합니다.]
[전격에 휘감긴 대상이 10초 동안 전원 마비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마비에서 그치는 효과!
그러나 10초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온몸이 마비된 백인장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세상에…….”
기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하늘에서 추락하는 12명의 백인장.
난 그들의 최후를 담담히 보았다.
‘비행전투원이라도 약점은 있지.’
세상 모든 강자들이여, 기억하여라.
네놈들이 제아무리 강대할지라도.
추락사에 답이 없다는 것을.
우드득! 우드득! 우드득!
백인장들이 땅바닥에 차례로 떨어지며 목이 아작 났다.
[백인장 오홀을 죽였습니다.]
[백인장 케벨턴을 죽였습니다.]
[백인장 벤을 죽였습니다.]…….
[창천의 여제 소속 백인장 간부를 고작 혼자서 전멸시켰습니다!]
[믿을 수 없는 학살에 대한 보상으로 민첩이 5 올랐습니다.]
“…….”
대륙 최강 기사단조차 할 말 잃었다.
나는 빈정대며 손가락을 문질렀다.
“간부들이 뭐 이리 싱겁게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