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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52화 (52/200)

나만 1회차 052화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말았다.

헤르탄이 전생에서 역모를 꾀했었단 사실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설마 게오르킨을 백치로 만든 주범이 바로 그였을 줄이야.

“……그래서 게오르킨이 헤르탄을 두려워했던 거였군요.”

“저는 40회차에서 반란군에 가담했던 간부였고, 소년왕을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밴시굴에 넣어지는 처형을 당하여 백치가 되었죠.”

그렇게 말하는 헤르탄의 눈동자에는 별다른 후회, 죄책감이 없었다.

그저 담담히 털어놓을 뿐이었다.

“소년왕이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자기 발로 밴시굴로 걸어갔지요. 밀밭기사단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 스스로 백치가 되었다고요?”

헤르탄은 커다란 사슴이 꿰인 쇠꼬챙이를 돌리며 천천히 말하였다.

“백치가 되기 전의 소년왕은…….”

그의 침착한 눈이 과거를 훑는다.

“몹시 자기희생적이었으니까요.”

얘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헤르탄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들을 필요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저 말이 정말 진짜일까?’

제아무리 의연해도 스스로 백치가 될 회귀자가 몇 명이나 될까?

게오르킨은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박당했던 것은 아닐까.

그 의혹이 갑자기 나를 죄었다.

나는 항상 회귀자들을 통해서 전생의 경험담을 전해만 들었을 뿐이다.

1회차이기 때문에 그러한 전생을 직접 겪어봤거나, 기억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내가 지금껏 회귀자에게 전해 들은 전생은 정말 모두 사실일까?

내가 동료라고 믿고 있는 이자들의 목소리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까?

가령 내게 달려오는 저 성녀가 거짓말을 외치고 있다면 어떠한가.

“대장! 저 용이 홀딱 벗었어요!”

“…….”

나는 의혹을 접어뒀다.

동행한 일행을 함부로 의심하다니?

내게 해준 말이 진실이길 바란다.

***

퀸소히니베가 젖은 머리칼을 뺨에서 떼는데, 눈이 멀 만큼 어여뻤다.

“옷은 물에서 거추장스러운 것이야.”

“다신 그러지 마요. 성인이 옷 벗고 다니면 이상성욕이 의심되니까.”

“……인간은 그게 그런 것이야?”

그녀가 날 힐끔 봤다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곤 바닥만 뚫어져라 봤다.

“그래, 참 잘했어.”

내가 구슬픈 표정을 짓자 카티에는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날 꼬집었다.

“대장과 자살하고 싶어졌어요.”

“…….”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테지만, 그 농담에 난 괜스레 기분이 섬뜩했다.

농을 진담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가끔씩 꾸는 그 악몽 때문이다.

‘하여간.’

계곡에서 대련을 마친 밀밭기사단은 젖은 몸으로 사슴고기를 뜯었다.

처음 기사들은 헤르탄이 조리한 음식을 먹길 거부했으나 황홀한 맛과 고된 피로 때문에 결국 받아들였다.

꼴만 보면 우리가 휴양 온 것 같겠지만, 벌써 일주일 강행군 뛰었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

“왕실기사는 특성상 왕의 좌표를 파악할 수 있다. 너희한테 도망치셨을 때도 그렇게 찾았지. 전하께서는 현재 남서쪽으로 이동 중이시다.”

게오르킨은 일주일째 지치지 않고서 어딘가로 계속 이동 중이었다.

그럼 가둬둔 것은 아닐 테고, 그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걸까?

세그라가 양념된 사슴 갈비를 뜯고는 덥수룩한 수염을 털었다.

“지금도 좌표가 그렇게 빨리 이동 중이신 것은 아니다. 빠르면 내일쯤에 전하를 되찾을 수 있을 거다.”

물론 그것은 밀밭기사단의 얘기다.

내가 위니아를 죽이러 가는 것은 나를 노리는 거물을 꺾기 위해서이지, 게오르킨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비록 불쌍한 과거를 가진 왕이지만, 난 연 없는 소년을 구하러 갈 만큼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진 않는다.

‘하지만 거물을 꺾으려면 밀밭기사단의 힘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해.’

목적을 쉽게 달성하려면 최소한 여러 사람 정확히 부려먹어야만 한다.

나는 밀밭기사단을 바라봤다.

능력치가 절반으로 약화된 기사들!

그래도 개개인이 대략 나보다 다소 높은 능력치쯤으로 판가름 되었다.

‘그만큼 본판이 강했다는 거지. 되도록 일이 쉽게 풀리면 좋으련만.’

앞으로 기사단의 힘이 제약되는 기한은 일주일이나 남았다.

그런데 내일 당장 창천의 여제 세력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지금도 약하진 않지만, 평소 힘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본래 힘을 되찾을 때까지 전투는 미루는 게 좋겠지만, 소년왕을 걱정하는 기사단이 그럴 리 만무하지.’

스무 명의 장정들과 먹성 좋은 용이 있다 보니 사슴 한 마리가 순식간에 뼈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퀸소히니베는 사슴의 갈비뼈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아쉬워하였다.

“인간의 이빨은 뼈를 씹어 먹을 수 없어서 너무 가혹한 것이야.”

“해체할 때 제거한 고환은 남았습니다. 역시 쪄먹는 게 좋겠습니까?”

“……헤르탄이나 먹으란 것이야.”

밀밭기사단과 헤르탄이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기사들은 악연 때문에 대놓고 고맙단 말은 못 하고, 그릇만을 닦았다.

카티에는 막내기사 할턴의 손아귀를 빛나는 손으로 유심히 매만졌다.

“흐음. 역시 내 축복으로도 이제 주는 풀 수가 없네요. 기한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겠어요.”

그러자 할턴이 은근하게 말하였다.

“성녀님 손길은 여전히 고우세요.”

“그 작업말투, 11번째예요. 할턴.”

“……기억력도 여전히 좋으시네.”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나는 기사들의 대련에 끼어들었다. .

이번에 나와 맞선 것은 기사단 서열 5위쯤 되는 호셀이란 남자였다.

“형씨가 아무리 범철이라도, 나까지 만만히 봐선 높은 코 다칠걸?”

“너는 찬물에 불린 밥 수준이군.”

“매번 궁금한데 그건 뭔 비유야?”

입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수십 분 동안 칼을 사납게 부딪치고, 경계하며, 땀을 물씬 흘린다.

결국 내가 쓰러진 호셀의 목덜미에 칼을 대자 대련은 종결되었다.

“……끝이지?”

“후, 젠장! 벌써 따라잡혀 버렸네.”

능력치가 약화되니, 나는 검술로 기사단원쯤은 꺾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첫날에 기사들과 대련했을 때 나는 호되게 얻어터지고 바닥을 굴렀다.

지금의 승리는 일주일간 밤새도록 고되게 수련한 끝에 이룬 성과였다.

[왕실기사 호셀을 꺾었습니다.]

[검술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특정 숙련도 이상 검술을 연마하면 상위경지 스킬이 발현됩니다.]

‘내가 겪지 못한 수준의 검술대련.’

이것이 내가 밀밭기사단과 동행하기로 결정한 또 다른 이유였다.

이런 기사들과 대련을 하며 검술을 단련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호셀이 날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다시 봐도 형씨의 성장 속도는 괴물이야. 보는 족족 다 습득하는군.”

“그래 봤자 나보다 드높은 능력치를 압도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해.”

내가 손을 뻗자 호셀이 내 손을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형씨는 원래 와인과 비슷한 존재지. 숙성될수록 엄청 강력해지니까.”

“지금의 나는 어떤 수준이지?”

“신포도.”

“…….”

아직 와인조차 되지 못했단 건가.

대체 내가 얼마나 높은 곳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는군.

나와 호셀은 계곡에 와서 몸을 씻었고, 둘만 남게 되자 내가 물었다.

“그런데 너희 기사단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뭐가 말이야?”

“왜 백치가 된 왕에게 충성하지?”

정신질환자를 보조하는 일이 얼마나 수고스러운지는 말할 필요 없다.

하지만 밀밭기사단은 게오르킨이 폐위되어 백치가 되었음에도 회귀를 하면서까지 곁을 항시 지키고 있다.

보통 회귀자라면 자기욕망에만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보통 아닌가?

“왕실기사단의 서약서에는 ‘죽든 살든 충성한다’라는 맹세가 있지.”

“단지 그 이유만으로?”

“단지 그 이유뿐이라.”

호셀은 잠깐 쉬었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아니. 딱히 그것만은 아니군.”

“그럼 무엇 때문에 소년왕에게 회귀하면서까지 충성을 바치고 있지?”

“형씨는 우리 전하께서 백치가 되어버린 배경을 알고 있나?”

“그래. 헤르탄에게 전해 들었어.”

“단장님과 부단장님과는 달리 우린 이제 딱히 그를 원망하진 않아. 옛날 일이었고, 회귀자가 그렇듯이 서로 신념이 달라서 충돌했을 뿐이니까. 그자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물론 예전엔 많이 다뤘지만, 지금은 원한도 잊은 휴전 상태랄까.”

호셀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하께서 우리를 위하셨던 것이지. 스스로 백치가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도 피를 흘렸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왕이었던 소년이 얼마나 많은 분쟁을 초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폐위된 왕은 어찌 보면 재림의 불씨가 될 수 있는 후보나 다름없다.

그래서 새 왕을 꿈꾸는 자들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지고 표적이 된다.

그러나 폐위된 왕이 백치에 불과하다면,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워진다.

“전하께서 백치가 되어 30회차나 이어지던 긴 전쟁이 종전되었다. 우습게도 우린 주군의 정신을 담보로 평화와 안전한 삶을 얻은 거야. 그래서 그 빚을 평생 갚아가고 있지. 사실 전하라고 모시지만 기사단 전원은 그분을 가족처럼 소중히 해.”

소년왕이 스스로 백치가 된 이유가 부하들을 위해 자처한 것이었다니.

나를 바라보는 호셀의 눈빛에는 저물지 않는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 삶에서도 전하를 헛되이 죽게 할 순 없어.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팔뚝에 약간 소름이 돋는다.

나는 지금껏 회귀자와 충의는 아주 거리가 먼 단어라고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밀밭기사단을 보니 딱히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어서도 왕에게 충성하는 기사단.

흡사 과거 멸살군주를 위해서 자결하던 수하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회귀했어도 인물상은 다양하군.’

나는 계곡을 벗어나며 회귀자에 관해서 다시금 생각을 해보았다.

***

요즘 미쳐가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면 내가 또 악몽을 꾸고 있다.

이번엔 카티에가 아닌, 미색이 아주 뛰어난 익숙한 여인이었다.

아로즈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로즈.

그래, 전생을 함께 한 나의 부인.

그런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당신과 함께 부부였던 기억은 내 머릿속에 없어. 나는 1회차이니까.

“나는 당신의 피를 이은 아이들을 낳고 싶어.”

내 아이들을 낳고 싶다고?

하, 우습군.

당신 전 남편의 생각은 다른데.

“회귀할지라도 똑같은 아이는 영원히 낳을 수 없어.”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부모가 동침을 해서, 아이가 결정지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니까.

“나는 10번을 살며 40명의 자식을 낳은 끝에 그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지.”

제기랄. 꼭 그 말을 다시 해야 해?

죽어서까지 내 꿈에 나타나서 그딴 말을 되새겨야만 그 더러운 성깔이 풀리겠냐고, 이 정신 나간 여자야.

“이사빈, 에이비나, 궤놀브, 로헤릭. 이들이 누구인지 알기나 해?”

되지도 않는 억지 따위 그만 부려.

아로즈,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만 전생의 자식들까지 동정하진 못해.

아무도 얼굴 모르고 기억조차 전혀 없는 자식들을 후회할 수는 없어.

“그건…… 내가 처음 당신과 함께 낳았던 아이들의 이름이야.”

그래. 하지만 나보고 뭘 어쩌라고.

광적인 모성애는 숭고한 것도, 본받을 것도 아니야.

그만 내 말을 들어. 나는 당신의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가 아니야.

“……아이들을 안고 싶어.”

아로즈가 피로 녹아든다.

칼에 찔려서 죽고 있는 것이다.

나의 손에 의해서, 그녀가 죽는다.

혼자 남은 나의 머리가 틀어진다.

미친 증세를 일으키는 감정.

내가 한사코 피하고 싶은 정신병.

광기란 것은 참 느긋한 놈이다.

아주 천천히, 나를 옥죄어 온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경멸했다.

나에게 섞여들지 마, 망할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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