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51화
그러나 가노어는 순순하지 않았다.
“하, 내가 뭐라도 말할 줄 아나?”
내가 고개를 돌리고서 소리쳤다.
“헤르탄! 고문 좀 가르쳐줄래요?”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헤르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
가노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자, 솔직히 고백해. 창천의 여제가 우리 둘을 만나려는 이유가 뭐냐?”
“난 명령만 복종해서 전혀 몰라.”
“아직도 이 상황이 농담 같지?”
나는 놈의 무릎에 구멍을 뚫었다.
관절염을 좀 일찍 앓게 된 가노어가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어어억!”
“닥쳐!”
나는 놈의 비명이 묻힐 만큼 세게 고함치고 피 묻은 칼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가노어는 힘겹게 웃었다.
“왜, 목이라도 찌르려고?”
나는 놈의 목을 찔렀다.
차마 예상치 못했는지 가노어가 눈을 치뜨는데, 카티에가 손을 뻗었다.
“막 뚫린 목구멍은 회복이 가능해요. 식도에 피는 좀 들어가겠지만.”
“커, 커헉!”
가노어가 핏물을 뱉었지만, 놈에게 쉴 틈 따윈 없었다.
난 계속 목을 꿰뚫고, 카티에가 바로 회복시키길 수십 번 반복하였다.
회귀한 이래로 가장 끔찍한 격통을 겪으면서 그는 비명조차 못 질렀다.
가노어가 고통스럽게 호소하였다.
“이, 이런…… 악마 같은 놈들!”
“노련한 회귀자를 자백시키려면 이쯤은 해야 되지 않을까.”
좀 더 잔혹하게 되어볼까.
나는 가노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항상 궁금했어. 회귀자들은 생식기를 잃어본 경험이 있나? 만약 있다면 또 잃어 봐도 관계가 없겠지.”
“……마, 말하겠다! 털어놓겠어!”
나는 그제야 칼을 거두었다.
스스로가 조금 더 미친놈에 가까워진 것을 한탄한 후에, 내가 물었다.
“털어놔. 거물의 목적은 뭐지?”
“……괴, 괴물!”
가노어가 충혈된 눈동자로 숨을 몰아쉬며 쉰 목소리로 자백하였다.
“창천의 여제께서는 120회차에서 시간의 괴물을 소환하려고 하신다.”
***
나는 생소한 단어를 되뇌었다.
시간의 괴물.
“소환하려는 괴물의 정체가 뭐지?”
“나도 그 괴물이 무엇인지 몰라. 아, 이건 진짜야! 회귀자들조차 알지 못하는 괴물이라고만 들었다고!”
“그런데 그게 거물이 우리 두 사람을 데려가려 한 것과 무슨 관계죠?”
카티에가 묻자, 가노어가 대답했다.
“그 괴물을 소환하는 데 있어 너희 둘과 폐위된 왕이 필요하다 했어.”
난 모놀칸에서의 기억을 더듬었다.
“시민들을 독사시키고 시체를 모으는 비밀사업도 그래서 진행했나?”
“어, 어떻게 그걸 알았지? 소환절차에는 많은 시체도 필요하다더군.”
이제야 겨우 의문이 풀리는군.
애당초 처음부터 오해했던 것이다.
거물이 우릴 쫓던 이유는 사업을 방해하고 수하를 해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시간의 괴물을 소환한다는 목적.
‘하지만 그 괴물을 소환하는 데 우리 둘과 게오르킨이 필요하다고?’
1회차와 울보성녀, 폐위된 소년왕.
누가 봐도 전혀 조합이 이뤄지지 않는 개성적인 셋을 어디에 쓴다고?
어쨌거나 가노어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단 판단이 들었다.
“잘 불었고, 잘 가라.”
“그, 급소만은 제발…… 크억!”
가노어가 가련하게 죽음을 맞이한 직후, 땅바닥에서 신음이 올라왔다.
“으흐어억……!”
“아이고, 제기랄.”
폭탄이 터지며 쓰러졌던 밀밭기사단이 쑤시는 몸을 끌면서 일어났다.
“제길, 전하가 납치당하셨다.”
“이런 빌어먹을! 이젠 어쩌지?”
“단장님만 계셨더라면…….”
고집 센 기사도를 추구하는 기사들은 좌절했고, 특히 부단장이 심했다.
세그라는 두툼한 손으로 얼굴을 짓누르며 기괴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런 찢어 죽일 대참사가!”
나는 비이상적인 충성심의 기사들을 위로하기보단 현실을 일깨웠다.
“이봐. 자괴감은 나중에 가져도 되니까, 우선은 여기부터 벗어나야 해.”
한 기사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사방에 폭탄이 깔려 있다. 아까 당하는 꼴 못 봤어?”
“잘 봤지. 지금처럼 꼴불견이던데.”
기사들이 곧바로 나를 째려봤지만,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얼른 가자고. 내가 땅에 심어진 폭탄을 찾아낼 테니까.”
“형씨가 감히 무슨 수로? 딱히 지뢰 해체에 소양이 있지는 않았는데.”
기사들이 전생의 나를 떠올리며 의아해했지만, 120회차의 난 다르다.
나는 망설임 없이 폭탄이 즐비해 있는 땅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곧바로 기사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이런! 형씨, 지금 미쳐 버린 거야?”
“우리가 당하는 것 못 봤어? 당신이 범철이라도 쪽도 못 쓰고 죽어.”
“자살할 거면 내가 편히 죽여줄게!”
하지만 내게는 쓸데없는 잔소리다.
SSS급 보물탐색 재능!
나는 땅에 드문드문 심어져 있는 폭탄들이 바로 눈에 띄었다.
내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땅에 심어진 투명하고 둥그런 물체를 파냈다.
내 양손에 담기자 투명한 물체가 외양을 드러내며 날개를 팔딱였다.
『대약화의 전격폭탄(고품질)』
고집스러운 장인이 번개골렘 정수로 제조한 폭탄. 세상에 수량이 겨우 300개밖에 남지 않은 한정보물이다.
+저주받은 약화의 전격을 품었다.
+전격에 휘감긴 폭격목표의 능력치를 2주일 동안 절반 약화시킨다. (중복 적용 불가, 폭격목표: 밀밭기사단, 영구히 설정된 목표 수정 불가.)
+폭탄의 명중률은 극악으로 낮으며, 대상에 제대로 맞춰야 폭발한다.
+땅에 심기면 투명해지며, 생물에게만 광범히 반응하는 지뢰가 된다.
*누군가의 힘에 의해 날개가 달려 있다. 소유자의 의지로 조종 가능.
‘폭탄이 능력치를 줄인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군.’
나는 지뢰가 깔려 있지 않은 방향을 향해서 전격폭탄을 던져보았다.
새까만 폭탄은 기막히게도 내가 의도한 방향과 전혀 다르게 날아갔다.
포물선을 그리기는커녕 곡예 비행하듯 휘돌아 바닥에 떨어지는 폭탄.
심지어는 불발이다.
‘이건 명사수도 절대 못 맞추겠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폭탄 투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명중률이 저렇게나 개판이라니.
그래서 손가락을 한 번 튕겨봤다.
따악!
파다닥!
날개 폭탄이 애완 새처럼 신속한 움직임으로 내 손아귀에 날아왔다.
나는 폭탄을 보면서 감탄하였다.
‘전격폭탄에 날개를 달아서 명중률 극악 페널티를 완벽히 극복했군.’
참신하고 효율적인 발상이다.
엄청난 성능을 겸비했으나 명중률 페널티로 형평성이 맞춰진 폭탄.
그러나 날개를 다니 고도의 명중률까지 겸비한 사기적인 병기가 됐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째 대륙에서 제일 강하다는 기사단이 너무 쉽게 당했다 싶었지.’
이런 폭탄을 36발이나 폭격 맞고도 태연하게 일어나는 것이 용하다.
거물 또한 회귀자인만큼 밀밭기사단에 관해 철저히 조사했을 것이다.
일부러 블라이넨이 없을 때 게오르킨을 납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창천의 여제. 치밀한 적이로군.’
나는 땅바닥을 되짚으며 64개의 폭탄을 모조리 찾아내 손에 넣었다.
밀밭기사단은 뒤편에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범철이 폭탄도 원래 잘 파냈나?”
“아니. 이번 삶에서 익혔나 보지.”
“1회차가 보물탐지를 저만큼 잘한다고? 회귀자도 저렇겐 못 하겠다.”
모든 폭탄을 수거하자 마법배낭이 볼록해졌다.
나는 밀밭기사단을 돌아보았다.
“이제 너희는 어쩔 거지?”
“물으나 마나다. 당연히 기사로서 당장 우리 왕을 구하러 갈 것이다.”
세그라가 분통한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도리어 의아해졌다.
“하지만 너희 능력치는 2주 동안 절반으로 제한됐다. 차라리 강함을 수복하고 움직이는 게 나을 텐데?”
“그 2주 동안 전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지? 결코 밀밭기사단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세그라의 단호한 모습은 세상에서의 회귀란 존재를 잊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럼 잠시간 동행하지.”
“무슨 소리지?”
“난 창천의 여제와 맞설 것이다.”
창천의 여제는 나와 카티에를 표적으로 삼고 자기 목적에 쓰려고 한다.
설령 우리가 불응할지라도 거물은 계속해 전투원을 날려 보낼 것이다.
원치 않는 공격, 납치를 감행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호구나 다름없다.
당하기 전에, 행동한다.
“우리랑 같이 거물을 치겠다고?”
세그라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으나 단원들은 앞다퉈 찬성했다.
“범철이라면 약화된 우리에게 큰 전력이 되어줄 겁니다. 부단장님.”
“솔직히 우리가 오인해 먼저 공격했었는데, 범철이 대인배인 것이죠.”
“전 찬성! 오히려 우리가 먼저 동행을 부탁해야 할 판국입니다.”
세그라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나 부하의 충언을 대놓고 무시해 버릴 만큼 막돼먹지는 못했다.
“우리는 전하를 구한다는 목적만을 최우선시할 것이다.”
“그럼 너희도 창천의 여제에게 맞서 싸워야 하겠지. 함께 하겠어.”
나와 세그라가 악수를 나누었다.
헤르탄은 곧바로 채비를 챙겼다.
“범철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퀸소히니베는 건방지게 픽 웃었다.
“무슨 괴물인지 몰라도 위대한 용에겐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야.”
카티에가 순진한 얼굴로 갸웃했다.
“그런 용께서 폭발에 휘말려서 기절하고 기사한테 맞아 토했나요?”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네년의 혓바닥을 당장 뽑고 싶은 것이야.”
“원하면 해봐요. 자아.”
카티에가 자그마한 입을 앙증맞게 벌렸고, 퀸소히니베는 노려만 봤다.
“……흥.”
우리는 발을 재촉해 숲을 나섰다.
나는 걸어가며 생각하였다.
‘창천의 여제 위니아.’
거물이 나를 이용수단에 쓰려 한다.
시간의 괴물을 소환하기 위하여.
두 눈 뜨고서 사냥당할 수는 없다.
‘나를 노리겠다면, 먼저 치겠다.’
***
훤한 대낮의 계곡.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사단 대련을 보는 게 아니라 연무장에서 검무를 감상하는 듯했다.
‘능력치가 절반씩이나 제약된 무용이 저만큼 현란하고 강력하다니.’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굉장하긴 하군.
물가에서 칼들이 교접할 때마다 첨벙대는 소리가 시원히 울렸다.
저 춤판에 끼는 것도 상쾌하겠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깃털.’
나는 녹색 깃털을 면밀히 살폈다.
창천의 여제 소속 백인장 가노어의 날개로부터 뽑아온 깃털 한 가닥.
어째선지 꺼림칙한 촉감이 느껴지는 그 깃털을 나는 비벼보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그것. 위니아를 대면하면 확인해 봐야겠군.’
바위에 앉아 있던 나는 일어나 저편에서 요리하는 동료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범철?”
“이런 황홀한 고기 냄새를 맡으면, 누구나 발걸음이 끌리기 마련이죠.”
내가 능청스레 그의 옆에 앉았다.
뜨거운 불가에 앉아서 땀을 흘리면서도 헤르탄은 얼굴 구기지 않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저 남자의 절제력은 여타 회귀자와는 궤를 달리한다.
‘가끔은, 꺼림칙할 정도로.’
나보고 일행에서 가장 위험한 동료를 꼽으라면 헤르탄을 선택하겠다.
카티에는 유일한 성녀고, 퀸소히니베는 용이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다.
가장 위험한 것은 헤르탄이다.
어째서냐고?
‘나를 위해서 흔들리지 않으니까.’
카티에와 퀸소히니베는 정신을 뒤흔들면 무너지겠지만, 그는 다르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게 충직한 그의 눈동자는 가끔 소름이 끼친다.
내가 사지를 잘려도 헤르탄은 덤덤히 의수, 의족을 만들어줄 것이다.
내가 굶어 죽으려 하면 헤르탄은 냉큼 자기 발을 잘라 조리할 것이다.
헤르탄은 내가 얼어 죽는다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죽어 나의 차가운 시체를 자기 몸으로 직접 덮어줄 인간이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카티에와는 달리, 헤르탄의 충성심은 늘 굳건하다.
그는 나에게 절대복종한다.
하지만 그 맹목적인 충성심이 때론 다른 회귀자들보다도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그런 확신이 든다.
헤르탄은 일행에서 가장 정상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미친 회귀자라고.
‘전생의 난 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이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헤르탄은 나를 힐끔 곁눈질하였다.
“시원한 물이라도 드시겠습니까?”
“됐어요. 계곡에서 많이 먹었으니까.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헤르탄과 기사단 관계가 궁금했다.
나는 둘만 있을 때 할 수 있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왜 밀밭기사단은 헤르탄을 반역자라고 부르면서 싫어하죠? 그리고 왜 소년왕을 전생에서 납치했습니까?”
하, 어째 묻다 보니 말투가 취조하는 것처럼 되어버렸군.
한동안 찜찜한 침묵이 흘렀다.
괜한 것을 물어봤나 싶었던 순간.
헤르탄은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40회차의 삶에서 그 소년왕을 백치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