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49화
‘설마.’
나는 바로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게오르킨이라는 이름이 흔하지는 않지만, 왕이 이런 곳에 있겠는가.
내가 화염구를 태우며 경고하였다.
“정체를 밝혀라. 만에 하나 연기를 하는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
괜스레 전생의 전 부인이 떠오른다.
바로 신뢰를 베풀기에는, 나는 그동안 회귀자에게 너무 많이 속았다.
그런데 나의 위협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반응이 돌아왔다.
미소년은 날 보며 고갤 갸웃했다.
“삼촌?”
“응?”
“우와아, 범철 삼촌! 안녕!”
게오르킨이 내게 갑자기 뛰어들었고, 하마터면 얼굴이 구워질 뻔했다.
황급히 마법을 거두고 나는 돌격해온(?) 아이를 잡아채 들어 올렸다.
게오르킨은 긴 다리를 대롱대롱 뒤흔들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
“너…… 타죽으려고 환장했냐?”
나는 인상을 구겼다.
회귀자라도 타죽는 고통을 알기에 화염에는 함부로 뛰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의 행동은 거리낌이 없다 못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불 싫어!”
“그럼 왜 뛰어들었어?”
게오르킨은 아주 해맑게 말하였다.
“난 아무것도 몰라!”
어쩜 저토록 순수 담백할 수가.
실감 나는 열연에 극찬을 해주마.
난 아이에게 칼을 똑바로 겨눴다.
“회귀자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짜 칼이야?”
게오르킨은 칼끝에 손대다가 손가락에 피가 났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 가짜 칼이 피도 내뿜네?”
“…….”
아무리 봐도 연기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전혀 회귀자답지가 않은데.
“설마 너도 1회차냐? 인간으로 모습을 바꾼 정령이나 몬스터라든지.”
“칼싸움할래, 범철 삼촌?”
“나를 방금 삼촌이라고 불렀지? 전생에서 나랑 무슨 관계였던 거냐?”
“배고파!”
어째 대화가 전혀 통하질 않는다.
나는 징징대는 아이에게 칼을 거두고 주위 수풀을 헤치며 둘러보았다.
동행인이나 매복한 원수는 없다.
하는 수 없지.
“너를 내 일행한테 데려가 봐야겠다. 혹시 너를 알 수도 있으니까.”
“힝. 오래 걷기 싫어! 더 배고파!”
게오르킨이 전력질주하며 울었다.
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가는 소년을 보다 생각이 스쳤다.
‘저놈, 길은 아나?’
난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 쉬었다.
결국 나도 따라서 뛰어야만 했다.
***
일행이 기다리는 따사로운 불가.
“나는 풍족한 것이야.”
식사를 마치고 만족스레 배를 쓰다듬던 퀸소히니베가 내가 손을 잡고 온 미소년을 보더니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내 노예가 허락도 없이 벌써 새끼를 낳은 것이야?”
“누구를 미혼부로 만드냐, 인마.”
나는 그녀에게 꿀밤 때리는 시늉을 하고 게오르킨을 간략히 소개했다.
“숲에서 주워왔다.”
“게오르킨! 나는 게오르킨이야!”
게오르킨이 열심히 뛰면서 말했다.
카티에가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무슨 애를 숲에서 주워 와요?”
“다리 밑보다는 낫잖아?”
“우리는 아이 키울 여유 없어요.”
우리 둘은 중년기 부부처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때 헤르탄이 무덤덤한 눈길로 그릇을 닦으며 말하였다.
“왕이군요.”
“예?”
“왕입니다. 게오르킨 세팔토 몬타그레 델라 로베레 샤페르티갈 2세.”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당연히 저 긴 이름을 외운 헤르탄의 암기력에 감탄한 것은 아니다.
“……진짜 현왕이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물론 회귀자들의 세상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만.”
헤르탄은 담담히 오류를 지적했다.
“그리고 범철. 지금은 옛 왕입니다. 게오르킨 2세는 40회차의 전쟁에서 백치가 되어 폐위되었으니까요.”
나는 게오르킨을 돌아봤다.
뛰어다니다 지친 아이는 침을 질질 흘리며 불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래서…….”
“지금 그 아이는 백치입니다. 회귀한 이후의 삶도 계속 그럴 테지요.”
저 꼬마애가 황색대륙 왕이었다니.
회귀가 없었더라면, 감히 마주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의구심이 솟았다.
“하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그건 정치적 암투 때문이에요.”
카티에가 내게 요약해 설명해 줬다.
“게오르킨 2세는 황색대륙에서 소년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어요.”
소년왕 게오르킨 2세.
날 때부터 영특했다던 소년은 불행히도 후계자 싸움에 휘말려 버렸다.
노쇠한 선대 왕이 죽고, 후보인 남매들까지 전부 독살당한 뒤에야 게오르킨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영특했다고 한들 소년은 왕정의 입김에 날릴 뿐이었다.
왕의 이름을 빌려 정치력을 확장한 귀족들이 대륙에 날뛰고 범람했다.
정치적 암투의 희생양이자 왕정의 꼭두각시라는 여론이 농후했던 왕.
그것이 소년왕 게오르킨 2세였다.
‘비극이군.’
나는 갑자기 불가에서 산만하게 뛰어노는 게오르킨이 서글퍼 보였다.
백치는 부끄러울 것이 아니고 함부로 비웃어 깎아내릴 대상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얼마나 슬픈가.
왕이 되어 아이로 살 수 없었던 소년이 평생 아이로만 살아야 하니.
‘……그래 봐야 값싼 동정이지.’
나는 자조적인 반성을 하고, 게오르킨의 등을 철썩 두드렸다.
“왜?”
나는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다. 이 삼촌께서 특별히 너와 칼싸움을 겨뤄주마.”
“와아!”
아이에게 진검을 쥐게 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나는 칼집을 쥐여줬다.
반면 나는 나무 작대기를 들었다.
게오르킨이 중구난방으로 휘두르는 칼집을 나는 딱딱 집어서 쳐냈다.
“이얏!”
“하, 겨우 그거냐?”
아이의 손에 내가 쓰는 칼집은 오래 들기에 너무 길고 무거웠다.
게오르킨은 몇 번쯤 휘젓다 얼굴을 찡그리며 칼집을 내던졌다.
“손 아파!”
“그래, 투척도 싸움의 일환이지.”
난 어깨를 으쓱이고 칼집을 잡아챘다.
카티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장은 아이에게 너무 착해요.”
“내가 손해 보지 않는 선까지만.”
나는 소녀의 칭찬을 일축했다.
내 선행은 경계선이 정해져 있다.
내가 손해를 보지 않는 선까지만, 그 선을 넘으면 행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일행을 대충 소개해 줬다.
“이쪽은 카티에야.”
참 별것 아닌 일에도 게오르킨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감탄하였다.
“우와아! 누나! 카티에 누나다!”
“호들갑 떨지 않아도 연상이에요.”
“누나 쪼끄매. 나보다 키가 작아!”
“저 꼬마를 회귀시켜 버릴까요?”
카티에가 매몰차게 권유했고, 나는 그 발언을 묵살하였다.
“저쪽은 퀸소히니베.”
퀸소히니베는 의외로 다정하게 게오르킨의 보드라운 뺨을 매만졌다.
“넌 아주 귀여운 꼬마인 것이야.”
“키 크고 멋진 누나야!”
그녀가 허리를 굽혀서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곤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너는 나의 노예로 클 것이야.”
“노예?”
“순진한 애한테 뭔 수작이냐?”
내가 어이없어하자, 퀸소히니베가 실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당연히 농담인 것이야. 나라고 어린애와 놀아주지도 못하는 것이야?”
“농담치곤 유머감각이 독특한데.”
“어머. 백치는 이쪽이었던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우아하게 내 뺨을 훑었고 나는 그만 실소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그쪽은 헤르탄.”
헤르탄은 가볍게 절을 올렸다.
“평안하십니까. 옛 왕이시여.”
그런데 아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게오르킨은 거한을 보다가 얼굴이 창백해지며 내 뒤로 숨어버렸다.
“나, 너 싫어!”
얘가 왜 이렇게 겁을 먹어?
역시 덩치 탓에 두려운 모양이다.
헤르탄은 숨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제를 전환하였다.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군요. 평상시라면 게오르킨의 곁에는 언제나 밀밭기사단이 함께 대동할 텐데.”
나는 그 말이 퍽이나 의외였다.
“회귀하면서도 줄곧 왕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왕실의 기사단이니까요.”
밀밭기사단이라.
왕실소속치고는 수수한 이름인걸.
헤르탄이 시선을 바꿔 나를 봤다.
“하여간 앞으로가 걱정됩니다. 게오르킨을 데리고 다니실 겁니까?”
나는 곧장 결정을 내리기보다, 일행의 의견을 먼저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자 카티에가 반대하고 나섰다.
“나는 반대예요. 언제까지고 그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요.”
“어째서 말이냐?”
“백치를 간호하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만 신경 써주기도 바쁘죠. 미안하지만, 짐짝을 달고 싶진 않아요.”
가끔씩 카티에는 냉철한 회귀자의 면모를 가감 없이 보이곤 하였다.
역시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도 차가 크기 때문일까?
그러나 나는 매정할지라도, 카티에의 의견을 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아무리 방금 만난 소년이 불행해도 내 사람보다 우선시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나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다음 인가까지만 동행하는 건 어때? 아이는 거기 맡기면 될 테고.”
“흐음. 그건 납득할 만하네요. 대장은 옳은 결단을 늘 빠르게 내려요.”
바로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였다.
게오르킨이 갑자기 펄쩍 뛰었다.
“칼!”
“또 칼싸움을 하자고?”
내가 대꾸하던 순간, 게오르킨이 돌진해 오며 나를 거세게 밀쳤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쓰러지는데 나를 스쳐 내리꽂히는 칼이 보였다.
난 곧장 자세를 고쳐서 일어났다.
그러자 게오르킨이 반색하였다.
“칼! 칼싸움 또 하자!”
난 아이를 뒤로 밀쳐내고 외쳤다.
“기습이다!”
일행 모두가 반사적으로 일어나 눈초리를 세우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나를 뒤에서 베려던 남자는 모습을 숨길 생각도 없이 곧장 걸어왔다.
번뜩이는 누런색 갑옷을 착용했고, 키가 크고 몸집이 제법 사납다.
“넌 뭐냐?”
기사가 싱긋 웃어 보였다.
“전하를 구하러 온 기사입니다. 납치범 형씨.”
뭐?
내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칼이 매섭게 미간을 내리꽂았다.
나는 칼을 높게 받아치려 했으나, 곧 죽도록 후회하게 되었다.
탱강!
“크흑!”
무지막지한 힘!
손목이 꺾이며 칼을 놓쳐 버렸다.
급하게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미간이 칼에 갈렸을 것이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너무도 빠른 속도로 칼이 내 복부에 명중하였다.
콰각!
검격을 갑옷이 중화시켰는데도 통증을 느끼며 나는 바닥을 굴렀다.
헤르탄이 주먹을 내려쳐 굵은 나무 뿌리로 기사의 다리를 옭아맸다.
그러나 기사는 칼조차 쓰지 않고 다리 힘을 줘서 뿌리를 끊어버렸다.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짐승처럼 달려들었으나 기사는 회피하고 배를 차버렸다.
“푸컥!”
“힘은 묵직한데 기술이 단순하군요. 뱃속이 조금 뒤집혔을 겁니다.”
공격에 처맞은 그녀는 그대로 나가 떨어져 흙바닥에다가 구토했다.
카티에가 서둘러 그녀를 치유한다.
‘도대체 뭐야, 저놈은?’
강하다.
이제껏 싸운 적과 수준이 다르다.
칼과 칼을 맞대기 이전에 힘과 힘에서 승부조차 제대로 나질 않았다.
‘능력치의 차이.’
지금껏 내가 쌓아온 능력치보다 놈의 육체적 능력이 월등히 강했다.
우월한 힘과 무자비한 칼의 속도!
검술이고 뭐고 기본조건부터 완벽히 차이나 승부가 성립되지 않았다.
“어, 그걸 살았어?”
내가 이를 악무는 반면, 기사는 얼떨떨하게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저 갑옷은? 성좌의 금속으로 이뤄졌나? 보기에는 안 그런데.”
“그 일격으로 숨통을 못 끊다니. 회귀해도 여전히 막내로구나, 할턴.”
“설마 내가 방어구 하나를 못 부수겠어? 저 갑옷이 이상한 거야!”
할턴이라고 불린 남자가 비웃으며 걸어오는 기사들에게 발끈 화냈다.
족히 스물은 될법한 병력.
저놈 하나만으로도 괴물 같은데, 비슷한 수준이 스무 명이나 있다고?
내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우린 너희 왕을 납치한 것이 아니야.”
“형씨 일행에 전하를 납치했던 전과자가 있어서 믿지는 못하겠군요.”
이전 회차에서 게오르킨을 납치했던 사람이 내 일행에 있단 말인가?
할턴이 칼을 고쳐 쥐며 다가선다.
나는 한숨 쉬면서 양손을 들었다.
“질 것이 명확한 싸움은 거부하겠어. 아이를 넘겨줄 테니 살려줘라.”
“역시 범철. 현명해요. 저도 단장의 호적수를 없애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 가기 싫어!”
할턴이 마구 도망치는 게오르킨을 잡으려 할 때,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회귀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뭐?”
퍼걱!
“끄아악!”
나의 주먹이 할턴을 후려갈겼다.
뺨을 후려쳐 맞은 기사가 허공에 날아가며 수목을 부서뜨렸다.
내 양손에 푸른빛이 감겨 있었다.
[마나원천의 괴력술(1단계)을 사용해 비기의 숙련도가 오릅니다.]
[재능의 영역이 광범위해 현 마법 경지에 맞는 괴력이 선택됩니다.]
[‘유니콘이 미쳐 날뛸 때의 발굽 힘’이 육체에 깃들었습니다!]
[체내의 모든 마나가 태워질 때까지, 상승한 괴력이 유지됩니다.]
회귀자조차 얻지 못한 마법 비기!
현재 나의 부족한 능력치로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페널티로 하루 간 마법을 쓰지 못하고 마력이 깎여도 어쩔 수 없다.
“할턴! 설마 안 죽은 것 아니지?”
“참나. 어떻게 하면 능력치로 앞서 있는 주제에 질 수 있는 거냐?”
“것 봐라! 범철한테 방심 말랬지?”
누런 갑옷의 기사들이 웃으며 놀려 대는데 커다란 고함이 울려 퍼졌다.
“다 닥쳐라! 엄숙하지 못한 것들!”
얼마나 목소리가 큰지 숲을 쩌렁쩌렁 울린 메아리에 새들이 도망쳤다.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기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부단장이라고 불린 기사가 그늘 속에서 걸어와 모습을 드러내었다.
헤르탄 못지않은 거한이었는데, 육중한 도끼를 차고 갑옷을 입었다.
“오래간만에 보는구나. 반역자.”
부단장이 말하자 헤르탄이 답했다.
“그다지 반갑진 않군. 세그라.”
“우리 재회의 인사가 이것인가?”
세그라가 울긋불긋한 얼굴로 목에서 피를 쏟을 것처럼 고함쳤다.
“헤르탄. 내게 찢겨 회귀했던 네놈이 감히 또 전하를 납치한 것이냐!”
그러자 헤르탄이 냉철히 반박했다.
“아니. 이번에는 범철이 데려왔다.”
“뭣이? 범철, 이 찢어 죽일 자식!”
“……이봐요, 헤르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