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47화
정신이 들었을 때, 난 누워 있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손아귀에 쥐고 있던 보드카는 사라지고 없었다.
‘망할, 골이 아파서 죽겠네.’
피가 번진 이마를 손으로 훑었다.
사람을 속이고 술병으로 패다니!
술 훔치다 걸려서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제기랄.
난 굳은 얼굴로 놈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머리가 약간씩 차가워질수록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역시 나는 아직도 약해.’
그림자라 인상파악을 못 했고, 방심했다지만 고작 술병에 제압당했다.
확실히 우물 밖은 넓기야 넓다.
세상에는 나보다 아득한 강자가 지천에 널린 것이다.
‘머리가 확 깨는군. 실제로도 깨졌고’.
차라리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이제 누가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녀석인지 확실히 파악을 했으니까.
나는 흩어진 일행을 불러 모았다.
“대장, 그림자가 벗겨졌네요?”
“누구에게 범죄를 들킨 겁니까?”
나는 아픈 이마를 쓸며 찡그렸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퀸소히니베의 그림자가 웃음을 흘리며 나의 뺨을 매만졌다.
“내 노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으니 훨씬 나은 것이야.”
……거슬리는구만.
나는 개구쟁이처럼 파티장을 쏘다니는 파티 도우미에게 말을 걸었다.
“알아냈어. 이곳에서 제일 강한 자는 무표정한 남자다.”
“호오! 그 이유는?”
“혼자서만 남에게 폭력 행위를 가할 수 있고, 딱히 제지도 받지 않던데.”
“딩동댕! 정확히 맞췄어! 축하해!”
카티에가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대장, 어떻게 알아낸 거예요?”
나는 서글프게 말하였다.
“회귀자들의 사기행각을 몸소 겪으면서 단련된 추리력 아니겠냐.”
파티 도우미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 사람은 참석자 중 가장 유명한 강자거든! 그래서 특별히 파티의 어떠한 규칙에도 제약되지 않아!”
그래서 술병으로 사람을 후렸나?
나는 눈썹을 세우고 둘러보았다.
“지금은 어디 있지? 나는 그 사람과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은데.”
“술 다 떨어지니까 떠나 버렸어!”
정체가 심히 알고 싶은 취객이군.
뭐, 어차피 궁금해 봤자 앞으로 다신 만날 일 없을 테니 소용없겠다.
파티 도우미가 통통 뛰었다.
“이리와! 그분께 너희를 안내해 주겠어!”
우리는 도우미의 힘으로 파티장과 한참 격리된 장소에 순간 이동했다.
화려한 빛깔의 천막이 보인다.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천막에 들어서자 모두의 그림자가 벗겨졌다.
“역시 그림자가 없어져야 멋들어진 옷을 입은 보람이 있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가슴을 짚으며 픽 웃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요염했다.
내가 넋을 놓고 있는데, 카티에가 내 팔목을 꽉 꼬집었다.
“악!”
“대장은 항상 왼쪽 팔뚝의 안쪽 살집을 꼬집히면 가장 아파하죠.”
“내가 꼬집힐 잘못을 꽤 했었냐?”
“흥. 알아서 짐작해 봐요.”
천막 내부에는 빛이 환하였다.
실내의 조명은 놀랍게도 새의 모양새를 한 빛무리였다.
퀸소히니베가 손을 뻗어서 새를 잡으려 했지만, 허공만을 훑게 되었다.
“헷갈리는 새대가리들인 것이야.”
“저도 처음 봅니다. 빛인지 생명체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파티 도우미가 방방 뛰어올랐다.
“유랑자님! 손님 모셔왔어!”
“오, 이런.”
누군가 장막을 걷고 걸어 나왔다.
어린 소녀…… 어라, 소년인가?
성별이 짐작 가지 않는 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빛에 불과했던 새들이 손가락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신기해요…….”
카티에가 회귀자치곤 흔하지 않게 순수한 얼굴로 감탄하였다.
아이가 우리를 보더니 픽 웃었다.
“빛새가 없는 세계에서 왔나? 이것은 아름답고 정교한 추상체이지.”
추상체?
내가 빛새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들은 빛입니까, 새입니까?”
“어째서 빛과 생명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을 나누려고만 하지?”
더욱이 골이 아파지는 대답이로군.
나는 왼쪽 손등을 보여주었다.
“당신이 펜타그램에 인장을 새기고 날 이곳으로 초대한 자입니까?”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자네가 착용하는 암적색 팔찌는 내가 만든 것이지.”
미확인된 존재.
화염봉헌 팔찌의 제작자이자, 나에게 막대한 힘을 빌려줬던 인물.
“상상했던 느낌과…… 다르군요.”
“젊어진 게지. 구하기 힘겹지만, 비상한 물감이 있는 세상은 많거든.”
약물도 아니고, 웬 물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회춘하는 물감이라고요?”
“가령 제한된 운명을 복구시키거나 불치를 완치하는 염료도 존재해. 나는 항해하며 그런 것을 줍곤 하지.”
아이가 숨을 불어넣자 빛새들이 날갯짓하며 사방에 비산한다.
나는 빛새를 만져보려 하였다.
그러나 내 손끝에 스치는 것은 그저 형체라곤 없는 빛뿐이다.
“인과율에 간섭하고 차원을 방랑하는 자. 나를 유랑자라고 부르게.”
***
우리는 숨을 죽였다.
눈앞의 아이가 보통 존재가 아니란 것은 분위기만으로도 짐작되었다.
“그쪽 세상은 반복되고 있더군. 하지만 자네를 초대한 것은 이번이 최초야.”
뭔가 난해하고 모순적인 말인데.
하지만 카티에와 헤르탄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 삶에 회귀자인 우리가 당신을 처음 만났던 거였군요.”
유랑자는 턱을 매만졌다.
“세상을 항해하며 가끔 파티를 여네. 나를 싫어하는 자들이 아주 많아, 늘 행동은 조심스러워만 하지.”
천막 바깥에선 파티소음이 들린다.
“파티에 참석했던 인물들. 보기에는 그래 봬도 다들 각자의 세상에선 정점을 다툴 만큼 실력자들이야.”
나는 무표정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런 강자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유랑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차원을 방랑하고 교류시키는 것은 인과율을 건들지. 때로는 나의 조그만 행동이 큰 파장을 만들기도 하네.”
나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왜 나를 도왔던 겁니까?”
유랑자가 나를 바라보다가, 못 참겠는지 입이 찢어져라 킬킬거렸다.
“재밌어서야. 자네는 차원에서 손 꼽힐 만큼 눈물 나게 웃기는 자라.”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나의 유머 솜씨가 그토록 뛰어났던가?
카티에가 내 팔뚝을 꽉 꼬집었고, 나는 눈물 나며 정신을 되찾았다.
유랑자는 숨도 못 쉴 만큼 웃었다.
“그래, 자네의 꼬락서니에 웃음을 크게 터뜨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뭐야, 괜히 기분 나쁘군.
간신히 진정한 유랑자를 향해서 나는 손등의 펜타그램을 보여줬다.
“그러면 혹시 이 악마의 펜타그램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있습니까?”
“악마의 펜타그램? 그럴 리가. 차라리 천사의 펜타그램이 걸맞겠지.”
“예?”
이건 또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다.
유랑자가 미소 지으며 말하였다.
“자네가 겪는 기연과 변수들……. 가끔 너무 지나칠 만큼 자네의 여정에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난 순간 가슴이 찔린 기분이었다.
120회차에서 갑작스레 두각이 된 재능들, 그리고 수많은 최초의 기연.
나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믿기지가 않을 만큼 신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어딘가 자네의 조력자가 있어. 자네가 목표를 이루길 바라는 인물.”
내가 회귀를 멈추길 원하는 인물?
나는 긴장하고서 눈빛을 바꾸었다.
절대 흘려들어선 안 될 정보였다.
“내가 겪는 기연과 120회차에서 벌어진 변수들이 전부 누군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말입니까?”
“그래, 정확한 정체까진 알지 못하지만 그 펜타그램을 이용해 자네에게 헌신하는 조력자가 있다네.”
왼쪽 손등의 펜타그램을 바라본다.
조력자.
어째선지 120회차에서 나를 도우며 변수를 만드는 정체불명 인물.
내가 여정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 막중한 도움이 될 사람이 분명했다.
‘조력자의 정체는 중요해. 꼭 기억하고 언젠가 의문을 파헤쳐야 한다.’
나는 또 하나의 목표를 다지며 조력자란 인물을 기억에 새겨 넣었다.
“나도 그쪽 세계의 자세한 것까진 알지 못해. 그런데 자네 말이야.”
유랑자가 어째선지 기분 나빠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불길해 보여. 아주.”
“……내 앞길이 말입니까?”
“아니. 범철이란 인물 그 자체가.”
저건 또 뭔 소리야?
그러고 보니 아까 술병에 머리 깨지기 직전, 나의 이명이 ‘불길한 1 회차’였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그거랑 무슨 관계가 있나?
유랑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냥 해본 말이니 접어두게.”
뭐랄까, 의미심장하고 찝찝한 말이라 괜히 뻑적지근해지는데.
하여간 유랑자가 화제를 돌렸다.
“하여간 그래서 말인데.”
그다음 말은 뜻밖의 제안이었다.
“자네, 나와 다니지 않겠나?”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에게나 하는 제안은 아닐세. 세계를 방랑하고 날 돕는 일이지.”
유랑자의 목소리는 진지하였다.
“조수로 탐이 나서 말이야. 한 삼십 년쯤 일한다면 자네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무기를 줄 수도 있고.”
유랑자의 조수가 된다면 그와 함께 차원을 유랑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회귀자투성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떠나갈 수도 있다.
절대 쉽게 오지 않을 기회.
“대장…….”
카티에가 몹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손을 꼭 쥐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대놓고 노예 제안이나 마찬가지다.
삼십 년의 세월은 장난이 아니다.
화염봉헌 팔찌는 신체 부위를 봉헌해야 불꽃을 부릴 수 있는 아이템.
고심해 보면 그런 악취미적인 장신구를 만든 유랑자가 선할 리 없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지.”
의외로 유랑자는 깔끔히 포기했다.
그러자 내 일행은 날 다시 보았다.
“대장은 나를 사랑하나 봐요.”
“저는 범철을 믿고 있었습니다.”
“내 노예는 의리가 있는 것이야.”
철저히 이득만을 위해 내린 결정인데, 어째 동료들과 우애가 깊어졌다.
나는 혹시나 하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또 나한테 그 힘을 빌려줄 순 없는 겁니까?”
잠깐 맛보았던 유랑자의 극소량 힘은 격하고 우월적인 박력이 있었다.
그러한 힘을 자주 빌릴 수만 있다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유랑자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단 한 번의 간섭만으로도 나는 큰 타격을 입거든. 대신에 흥미로운 자네에게 이것을 선물하지.”
유랑자가 손을 내밀자 악마의 펜타그램의 색깔이 더욱 진해졌다.
[악마의 펜타그램에 ‘유랑자’가 인과교란의 색채를 덧칠했습니다.]
[회귀자 살해 재능에서 이득 되는 변수창출 확률이 크게 올랐습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힘들게 폐성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군.’
나는 만족하고 손등을 매만졌다.
회귀자를 뒤통수치는 변수는 허점을 찌르고 상황을 뒤엎을 수 있다.
전투에서 강력한 적들을 휩쓸고 성장하는 데 큰 혜택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연에만 의존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누군가 나를 돕는다고 해도 생존과 성장은 전부 나의 노력에 달렸다.
악마의 펜타그램이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항상 날 구원하진 않으리라.
유랑자는 천막 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내가 귀중한 연회 시간을 방해했군. 동이 트기 전에 어서 가게.”
“자, 나가는 길은 이쪽! 이쪽!”
우리는 파티 도우미를 따라나섰다.
천막을 나가는데, 웃음이 들려왔다.
“언젠가 재회하기를 바라지. 물론 자네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말이야.”
저놈은 의미심장한 말밖에 못 하나?
***
“난 과거를 훑을 수 있어. 네가 몰래 화살을 쏴서 피에로를 맞혔군.”
“제기랄, 그 이능은 불공평해!”
파티 후반부.
이제는 그림자의 상당수가 범죄를 들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다.
그림자만 보일 때는 실루엣만 대략 짐작하였는데, 본모습은 낯설었다.
‘정말 기상천외한 파티군.’
증기를 뿜으며 톱니를 굴리는 인형 기사, 제복을 차려입은 좀비 황제, 자기 혀를 씹는 칼 등등이 보였다.
몇몇은 생물이 맞나 싶을 만큼 기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무척 흉악한 외견이 있는가 하면 의외로 가냘파 보이는 모습도 많았다.
보는 것만으로 비위가 상하는 강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보며 토할 것 같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부 대륙에선 볼 수 없는 인물상.
뱃살에 고무 화살이 꽂힌 파티 도우미가 신나서 소리쳤다.
“1등을 한 명탐정은 나를 따라와!”
과거를 훑는 이능을 가졌다는 여성이 파티 도우미를 따라 나갔다.
동이 트며 달이 지고 파티는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것처럼 우리는 어느새 폐성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에취!”
쌓여있는 먼지에 기침이 나온다.
“이거, 옷은 그냥 주고 간 건가?”
나는 정장의 옷깃을 매만졌다.
벗어뒀던 우리의 본래 장비와 소지품은 밑에 덩그러니 있었다.
카티에가 바닥에 놓여 있는 술병을 보고는 픽 웃었다.
“술도 몇 병은 남겨주고 갔네요.”
“술잔도 있군요. 정확히 네 개.”
“음식을 다 맛보지 못한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울상을 지었다.
나는 하품을 하며 정장을 풀어헤치고 머리칼을 대충 쓸어 올렸다.
‘정말로 기묘한 파티였군.’
아쉬운 우리는 햇살을 받으며 폐성의 먼지를 대충 치우고 주저앉았다.
“우리끼리만 가볍게 한잔합시다.”
“기분 좋은 마무리예요.”
“친구들과의 술은 언제나 옳지요.”
“너희와 있을 때가 좋은 것이야.”
우리가 웃으며 잔을 부딪친다.
소란스럽고 화려한 파티장보다.
초라할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폐성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