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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46화 (46/200)

나만 1회차 046화

정말로 옷이다.

옷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분명히 1층 홀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가 있는 곳은 넓은 의상실이었다.

“들어왔던 성문도 사라진 것이야.”

“아예 실내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데 화려한 빛깔의 글귀가 떠올랐다.

[파티 시작 1시간 전입니다.]

[위대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모두 파티복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여기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그저 야회복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야말로 다양한 옷이 걸려 있었다.

유목민 전통의상, 원피스, 삼베옷, 터번, 턱시도, 두툼한 털 코트 등등.

온 세상의 옷을 전부 여기에다 모아놓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심지어는 아크릴이나 폴리에스테르처럼 이계에 있을 리가 없는 화학, 합성섬유 소재의 옷들까지 보인다.

‘이건…… 청바지랑 비키니 아냐?’

설마 이계에서 현실에서만 보던 옷들을 볼 수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도대체 어떤 파티가 열리기에?

헤르탄이 입을 벌려 감탄하였다.

“회귀하면서도 처음 보는 옷이 천지군요. 이런 의상실은 최초입니다.”

회귀자도 처음 와보는 의상실이라.

‘저쪽은 거인족의 옷인가?’

거인족이나 요정처럼 다양한 종족의 옷까지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정령을 위해서인지 불타오르거나 얼어붙는 의상도 보였다.

“대장 옷은 내가 골라줄게요.”

어째서인지 카티에는 상당히 눈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드물게 활발한 소녀에게 붙들려 나는 여러 옷을 몸에 걸쳐보았다.

“대장. 이 옷은 어때요?”

“이렇게 손목이 언뜻 보여야 해?”

“그게 내 취향이거든요.”

“…….”

탈의실은 구석진 곳마다 있었다.

상의를 벗고, 거울을 쳐다본다.

나는 선명해진 복근을 매만졌다.

‘요즘 들어 몸이 많이도 좋아졌군.’

하기야 그 개고생을 겪었는데 체격이 다져지지 않으면 이상한 거겠지.

매일 밤마다 고되게 체력단련을 한 보람이 있다.

정장을 갈아입고, 넥타이를 맨다.

나는 똑바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정리한 밤색 머리에, 흰 셔츠에 정장 조끼를 입었고, 손목이 드러난다.

참나, 이렇게 말끔하게 옷을 입어 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내가 소매 단추를 고치면서 나오는데, 퀸소히니베가 놀라서 말하였다.

“도대체 너는 누구인 것이야?”

“네 전 애인. 헤어지고 처음 보지?”

“흥. 농담은. 내 노예가 제대로 차려입으니 굉장히 봐줄 만한 것이야.”

“그럼 차려입기 전에는 별로였냐?”

“정장이란 옷에 비할 바일까.”

“뭐, 너도 꽤 괜찮다고.”

그녀는 어깨가 트인 화려한 붉은 파티드레스를 택하였다.

피나는 단식조절로 이룬 몸의 맵시가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답다.

괜히 그녀가 멋들어져 보이는데.

그런데 퀸소히니베도 나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내 노예가 자기 새끼를 가져도 될 것이야.”

“그 말, 칭찬으로 받아야 하냐?”

우리가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데 머릴 단정히 묶은 카티에가 나왔다.

흰 머리칼과 반대로 새까만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인형처럼 어여뻤다.

“대장. 내가 좋아지려 하나요?”

“그 질문만 없었다면 말이지.”

“흥. 튕기는 모양새가 같잖아요.”

“손을 잡아주시겠어요, 어르신?”

내가 몸을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카티에가 새침하게 걸어와 내 손목을 감싸 쥐고 힘줄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퀸소히니베는 기가 차서 웃더니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염병하는 것이야.”

마지막으로 헤르탄이 걸어왔다.

애당초 미남상인 그는 무엇을 입더라도 어울렸지만 제대로 차려입으니 세상 여자는 다 끌어올 분위기였다.

차림새는 단출하다.

널찍한 등과 굵직한 팔뚝에 걸맞은 정장이나, 앞 단추는 편하게 풀었다.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갈라진 두툼한 가슴근육을 따라 단추가 터지진 않을까 걱정됐으니까.

내가 살갑게 그의 등을 탁 때렸다.

“여, 헤르탄. 잘 어울리는데요?”

헤르탄은 드물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옷은 별로 익숙지 않군요.”

“헤르탄도 제법 봐줄 만하니, 어서 내 노예가 되어서 살라는 것이야.”

“노예라면 벗고 다녀도 됩니까?”

“……네놈이 아주 돌은 것이야.”

옷을 갈아입자 잠시 벗어둔 장비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내가 깜짝 놀라서 기겁하는 순간, 주위가 변화하였다.

[옷가지는 돌아갈 때 드립니다.]

[입장 시간이 되었습니다.]

[일곱 호수 파티장이 열립니다.]

나는 사방에 나도는 밤바람과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얇게 떴다.

화려한 빛에 휘감긴 일곱의 호수.

그런데 호수에서 파티를 즐기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림자였다.

[세계가 뒤섞인 위대한 파티!]

[813개의 세상에서 나름 명성 있는 강자들이 참석 중입니다.]

[외딴 출신의 참석자들과 마음껏 사교해 친목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다른 세계의 비밀과 놀라운 무용담을 들어보십시오!]

[달이 저물 때까지, 파티는 계속됩니다.]

나는 눈앞의 글귀를 잘못 보았나 싶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강자들?’

예상 못 한 설명에 적응이 안 됐다.

물론 나도 이계와는 다른 현실에서 왔지만, 외딴 세계 출신 사람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러 세계 출신이 참석한 파티라니.

‘그래서 의상실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옷이 있었던 건가?’

나는 혼란스러워서 일행들을 찾으려 했으나 온통 그림자뿐이었다.

[이번 27회 위대한 파티의 컨셉은 ‘유랑하는 그림자 탐정’입니다.]

[모두의 익명이 보장된 상황에서 비밀스러운 파티를 즐기십시오.]

[본인의 신분, ‘범죄’를 밝히거나 폭력적인 행동은 불가능합니다. 그 외의 모든 행동은 자유롭습니다.]

[상대의 ‘범죄’를 파악해 맞추면, 들킨 쪽의 그림자가 벗겨집니다.]

[‘범죄’를 들켜 그림자가 벗겨지면 추리 권한을 상실하게 됩니다.]

[가장 많은 범죄자를 밝혀낸 참석자에게는 선물이 기다립니다!]

내 손아귀에는 누가 넣어놨는지, 어느새 조그만 쪽지가 접혀 있었다.

그것을 펴보자 이런 내용이었다.

[범죄: 보드카를 훔쳐 마실 것.]

‘이래서 그림자만 보였던 거군.’

수백 개의 그림자가 각각 빛깔이 다른 일곱 호수를 배회하고 있다.

난 쪽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내가 그림자만 볼 수 있듯 다른 일행도 내가 그림자로 보일 것이다.

[‘시체 먹는 황제’가 썩은 고기를 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신풍의 딸’이 활을 들고서 입술을 핥고는 피에로를 노려봅니다.]

[‘암석머리’가 주먹을 쥐며 1등을 하겠다고 추리력을 불태웁니다.]

범죄를 추리하기 쉽도록 그림자의 행동 패턴이 계속 글귀로 표시됐다.

‘아쉽군.’

꽤나 재밌어 보이는 파티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더더욱 ‘미확인된 존재’가 어떤 자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그림자 사이에서 미확인된 존재를 어떻게 찾아야 하지?’

내가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릴 때.

피에로 분장을 한 땅딸보가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서 내게 다가왔다.

“안녕! 내가 이번 파티 도우미야!”

“너는 뭐냐?”

“도우미라니까!”

통통한 피에로가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바로 왼쪽 손등을 내밀었다.

“사람을 하나 찾고 있는데, 이 펜타그램에 초대인장을 새긴 놈이야.”

파티 도우미가 짓궂게 웃었다.

“질문에 답을 듣고 싶다면, 나와 한 가지 내기를 해서 이겨야만 해.”

“무슨 내기 말이지?”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자를 찾아 봐! 네가 맞추면, 해답을 들려주겠어.”

그렇게 말한 파티 도우미는 까르르 웃으며 다른 곳으로 뛰어가 버렸다.

여러 세계에서 모인 강자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를 찾아내라니.

일곱 개의 호수를 번갈아 보자 수백 개의 그림자가 돌아다녔다.

개중에는 거인보다도 엄청난 덩치를 가진 실루엣이 보이기도 했다.

‘그냥 제일 덩치가 큰 존재를 뽑아야 할까?’

하지만 내기가 그렇게 간단할까?

제길, 나는 왜 즐거운 파티에서 혼자만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거지?

스스로의 비운에 한탄하며 나는 일곱 호수를 발 빠르게 돌아다녔다.

‘우선은 일행부터 찾아봐야겠군.’

파티의 시간은 달이 질 때까지.

고작해야 반나절인데, 이곳을 혼자서 전부 뒤지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그나저나 스케일 한 번 크구만.’

호수마다 열리는 파티장이 달랐다.

호수에 풍덩 빠져들어 물놀이하는 수영장도 있었고, 어느 곳은 빠른 리듬의 음악과 함께 댄스를 추었다.

반면 잔잔한 분위기에서 술을 즐기거나 만찬이 차려진 연회장도 있다.

‘이런 데서 사람을 어떻게 찾는담.’

복잡하고 넓은 데다가, 불특정한 그림자만 수백 개였다.

이런 인파 속에서 그 세 명을 찾아내는 것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나는 눈에 띄는 그림자의 행동 패턴을 살폈다.

[‘아담한 성녀’가 어떤 남자를 찾아 하염없이 울면서 헤맵니다.]

[‘충직한 거한’이 다른 세계의 강자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합니다.]

[‘오만한 용’이 지나는 사람에게 자기 노예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너무 딱 보이는데.’

개성 투철한 동료들과 다니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움직였다.

그림자는 만져지고 실체가 있었다.

나는 세 동료의 그림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한곳으로 데려와 모았다.

카티에의 그림자가 내게 안겼다.

“대장! 자살할 뻔했어요!”

“……보통은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 정상 아닐까.”

고작 오십 분 헤어졌을 뿐이지만.

헤르탄의 그림자가 말하였다.

“그림자를 벗겨낼 수는 없군요.”

“서로 범죄를 자백할 순 없나 봅니다. 일단은 흩어져 움직여야겠어요.”

“강한 노예를 찾고 싶은 것이야.”

우린 여러 그림자를 찾아다니면서 누가 가장 강한지에 관해 탐문했다.

“가장 강한 녀석? 글쎄, 나도 파티에 참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들 나처럼 조국을 파멸했던 걸까?”

“하! 은근슬쩍 내 범죄를 추리하려는 속셈이로군? 내겐 어림도 없지.”

“그야 당연히 나 아니겠나? 증기기관공학에 빠져서 육신을 기체로 강화했으니. 다른 놈들이 뭐라도 돼?”

“전부 다른 세계 출신인데, 대화가 통하는 것이 신기해. 파티를 누가 개최하는 것인지 매번 궁금하군.”

하지만 대부분 우리가 범죄의 추리를 위해 유도신문하고 있다 여겼다.

설령 진지하게 대답할지라도 참석자들도 정확한 서열을 알지 못했다.

별 소득 없이 시간만 흐르고, 동이 터올 때가 가까워져만 갔다.

‘망할.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을 때.

나의 앞에 붉은 글귀가 떠올랐다.

[이제 30분 안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파티에서 추방됩니다.]

‘아, 맞아.’

나는 구겨진 쪽지를 다시 폈다.

보드카를 훔쳐서 먹으라고 했지?

나는 온 세계 술병이 즐비한 무인 주점에 걸어가 자리를 탐색했다.

“어?”

그런데 술자리 대부분이 공석이다.

정확히는 한 그림자만이 혼자 착석해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표정한 남자’가 고량주를 마시며 다른 존재들을 바라봅니다.]

[수십 강자들이 ‘무표정한 남자’의 시선에 겁을 먹고 피해갑니다.]

[‘무표정한 남자’는 위스키를 마시며 두고 온 아내를 걱정합니다.]

‘강자들도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그림자로 모습을 가렸지만 저들은 이명만으로도 정체를 짐작하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파티에서 술을 포기할 만큼 저 참석자가 두려운 건가?

무표정한 남자…… 다른 자들에 비하면 그리 특별한 이명도 아닌데?

난 딴 그림자를 붙잡고 물어봤다.

“왜 저 남자 혼자만 마십니까?”

“왜냐고? 첫 참석인가 보군. 저자가 술 마실 때 건드려선 안 돼. 나대다가 피 본 녀석들이 꽤 많거든.”

보기보다 위험한 자인가보다.

하여간 나는 진열된 술병들 사이에서 보드카를 찾으려고 하였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술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굴리다 내가 찾은 것은 무표정한 남자 앞에 놓인 양주병이었다.

하필이면 녀석이 마시고 있는 술이 마지막 한 병 남은 보드카였다.

‘꺼림칙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

어차피 폭력 행위는 불가능하니까.

나는 무표정한 남자의 그림자 옆에 착석해서 능청스럽게 말을 붙였다.

“독한 술을 좋아하는 것은, 인생서 고된 일을 많이 겪었단 반증이지.”

그러나 그림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무표정한 남자’가 보드카를 마시며 당신의 말을 무시합니다.]

‘뭐야, 이 더럽게 재수 없는 놈은.’

나를 무시하겠다면 답은 간단하지.

도둑질은 별로 경험이 없지만, 취객의 술병을 낚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무표정한 남자의 그림자가 줄곧 호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진득하게 취했나 보군.’

나는 딴청 하며 보드카를 슬쩍했다.

그리고 재빠르고, 은밀히 술병에 입을 대고 독한 술을 조금 마셨다.

‘커, 엄청 독하네. 향도 없고.’

[보드카를 훔쳐서 마셨습니다.]

[범죄행각을 저질렀습니다.]

됐다, 훔친 것으로 판정이 났다.

난 술을 내려두고 일어나려 했다.

“멈춰.”

나는 본능적으로 멈췄다.

무표정한 남자가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호수만 보며 짧게 말했다.

“너는 나의 술을 훔쳐서 마셨다.”

[‘무표정한 남자’가 추리합니다.]

[‘불길한 1회차’가 범죄를 저지르다 들켰습니다. 그림자가 벗겨집니다!]

저항할 수 없는 위압적인 분위기.

등골에 식은땀이 밴다.

그림자는 지금 날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내 범죄를 읽었지?

“해치지 않아. 나를 봐.”

전혀 취기가 없는 나직한 목소리.

속삭임일 뿐인데 마음이 연해진다.

내가 그를 돌아보았을 때.

“응?”

술병이 나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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