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45화
“개소리는. 이제 밖으로 나와야지?”
튜크는 출구 가까운 지하에 있을 뿐, 아직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젠장. 전생에서 그렇게 당해놓고 또 내기를 응하다니, 내가 미쳤지.”
밖으로 걸어 나온 청년은 오래간만에 보는 햇빛에 얼굴을 찌푸렸다.
“으윽. 눈부셔 죽겠네.”
나는 화살이 잔뜩 꽂힌 비밀상자를 별것 아닌 것처럼 발로 툭 찼다.
“너, 이 상자 전생에 본 적 있냐?”
“아니, 나도 처음 보는 상자인데?”
“지하도에 굴러다니더라고.”
“지하도를 부쉈던 전생도 있지만, 그런 상자를 발견한 적은 없었어.”
지하도에서 항시 상주하던 회귀자조차 발견 못 했다는 상급 비밀상자!
나는 꽤 기뻤지만 도벽을 자극할까 봐 딱히 표정에서 드러내진 않았다.
튜크가 놋쇠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하여간 이 멋없는 반지는 뭐야?”
“자살기도회에서 아크 리치 원정을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만 나눠주는 반지다. 너도 그 원정에 참전해라.”
“하, 어째서 말이지? 회차목표를 이뤄 회귀를 멈춘다고 뭐가 있어?”
아크 리치를 죽여야 할 이유이자, 내가 회차목표를 이뤄야 할 동기.
나는 오히려 반문하였다.
“만약 지금이 마지막 삶이라면, 너는 어쩔 거냐?”
“그야…… 지금처럼 막살면 안 되지. 그래도 마지막 삶이라면 좀 더 멋지게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이번 회차를 마지막 삶으로 만들 거다. 그러니까, 오라고.”
가만히 날 보던 튜크가 픽 웃었다.
“하여간 회차마다 그 포부하고는.”
아크 리치 원정에 대한 정황과 지리를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내가 튜크의 놋쇠반지를 가리켰다.
“반지가 뜨거워지면, 그게 신호다. 내가 말했던 협곡으로 찾아와라.”
“뭐, 밖에 나와서 할 것도 없고 지루하니 부하들이나 이끌고 가볼까.”
튜크가 휘파람을 불며 나에게 암흑색 망토를 가볍게 던졌다.
피를 쏟는 파멸의 망토!
나는 망토를 쥐고 인상을 구겼다.
“……어느 틈에 훔쳤냐?”
튜크가 킥킥 웃었다.
“귀중한 망토에 바람구멍 나실까 봐, 함정 길목에 들어가기 전에 슬쩍 했었지.”
함정에 들어가고서부터 정신이 없어서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차림새가 거지여도 실력은 대도에 가장 근접한 도둑 길드 수장다웠다.
튜크가 내 표정을 보더니 비웃음을 머금고 반짝이는 뭔가를 던졌다.
“만났던 기념으로 이거나 받아둬.”
난 조그만 쇠붙이를 받아 쥐었다.
“이게 뭐냐?”
“락픽. 내가 옛날에 쓰던 거라 낡긴 했는데, 꽤 써줄 만하지. 뒷구멍이나 혓바닥 밑에다 숨기기 편해.”
……숨기는 신체 부위가 꺼림칙하긴 하지만, 사람 챙길 줄 아는군.
나는 호주머니에 락픽을 넣었다.
“튜크 님. 모시러 왔습니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기겁하며 칼자루를 잡았다.
어느새 흑색 로브로 몸을 감싼 사람이 내 옆에 홀로 서 있었다.
그런데 튜크는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아, 빨리도 와줬군. 시카타.”
“이번 회차에서는 일찍 몸을 드러내셨군요. 많은 분이 기다리십니다.”
“그래, 슬슬 가봐야겠네.”
흑색 로브의 사람이 손을 내밀자, 튜크는 그 손을 잡고 날 돌아봤다.
“다음에 보자고, 나를 죽였던 형.”
“아크 리치를 죽이러 갈 때 보자꾸나. 전혀 알지도 못하는 동생아.”
두 사람의 모습이 스륵 사라졌다.
나는 그 현상에 의문이 들었다.
“순간이동 비슷한 걸 한 겁니까? 둘은 어디로 사라진 거죠?”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예? 회귀자도 모른단 말입니까?”
“도둑 길드에는 깊이 관여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회귀자에게조차 위험한 비밀들을 간직하니까요.”
튜크 그놈, 보기보다 능력도 출중하고 굉장히 위험한 녀석이었군.
하여간 도둑도 사라졌으니, 드디어 상급 비밀상자를 개봉할 시간이다.
어느새 퀸소히니베가 내 옆에 척 앉아서 상자를 탐욕스럽게 보았다.
“아름다운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이야.”
“그 튜크조차 발견 못 했던 상자라면 엄청난 아이템이 있을 거예요.”
“식자재가 들었으면 좋겠군요. 최근 식량 소모 속도가 참 빠릅니다.”
기대를 품고 상자를 보는 일행.
비밀상자는 이계 각지에 숨겨져 있으며, 예상치 못한 장소에 존재한다.
거기다 비밀상자 속에는 일반 보상함보다 진귀한 보물이 놓여 있단다.
‘자, 과연 뭐가 들었을까?’
괜스레 상자 안쪽 내용물이 화살에 손상됐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나는 상급 비밀상자를 열어보았다.
끼익.
상자 안에 든 보물은 아주 놀랍게도 쭈글쭈글한 눈알 한쪽이었다.
“…….”
일행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오로지 헤르탄만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알을 맛있게 조리하려면…….”
“이건 식자재가 아닙니다. 헤르탄.”
“눈알을 씹으면 침대 위에서…….”
“정력제도 아니에요. 어라, 그런데 눈알이 정력에도 좋았습니까?”
눈을 반짝이는 나를 퀸소히니베가 꼬집었고, 살점이 뜯기는 줄 알았다.
“아악! 인마!”
“흥. 내 노예는 앙큼한 욕심 따윈 품지 말아야 하는 것이야.”
반면 카티에는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괜찮다고 봐요, 대장.”
넌 뭐가 괜찮다는 거냐.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어쩐지 상자가 가볍더라.’
나는 다행히도(?) 멀쩡한 눈알을 손가락으로 들고 살펴보았다.
『모놀칸의 눈동자(왼쪽)』
교역도시 모놀칸을 설립한 최초의 시장, 모놀칸 레이베르의 왼쪽 눈. 지엄한 시장이자 유물사냥꾼이었던 그의 혜안과 마력이 담겨져 있다.
+눈알을 씹어서 삼키면, 특수한 재능을 A급으로 발현시킨다.
+눈알을 왼쪽 의안으로 맞춰서 끼우면, 몹시 환상적인 성능을 얻지만 평생을 쉼 없이 눈물 흘려야 한다.
초대시장 모놀칸의 눈동자!
하지만 입으로 씹어서 삼켜야만 효과가 발휘되는 눈알이라니.
“인간 눈알도 눈 감고 씹으면 비릿하지만 꽤 먹을 만해요. 대장.”
“범철이 고생해 얻은 전리품이니, 당연히 범철이 가져야만 합니다.”
“그 눈알, 맛없어 보이는 것이야.”
눈물겹게도 일행은 나를 위해서 귀중한 보물을 선뜻 양보해 주었다.
나는 눈알과 눈싸움을 하였다.
“조리해 먹으면 안 되겠죠?”
“마력이 담긴 눈알이니 날것으로 먹어야 본 효과가 발휘될 겁니다.”
먹고서 배탈 안 나면 다행이겠군.
역겹기는 하더라도,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다.
난 바로 눈알을 입에 넣고 씹었다.
“흐음.”
뭐랄까, 물컹거리고…….
아주 식감이 끔찍한…….
으윽, 입속에서 터진다…….
꿀꺽!
[모놀칸의 눈알을 삼켰습니다.]
[이미 A급 이상의 보물탐색 재능을 지녔습니다.]
[대신하여, 현재 보유한 보물탐색 재능이 크게 일깨워집니다.]
시야가 깨끗하게 바뀐다.
아니,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나뭇가지에 몰래 올라서 도토리를 갉아먹는 청설모나 땅에서 꿈틀대는 지렁이들의 숨구멍조차 선명하였다.
그 와중에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
나는 희미하게 환한 돌을 주웠다.
평범한 돌멩이처럼 보이던 그것이 자수정의 원석이란 것을 이젠 안다.
[SSS급 보물탐색 재능의 확장!]
[어느 회귀자도 발견 못 한 특수한 보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됐습니다.]
[고급 감정(Lv1)을 깨달았습니다! 일반 감정보다 정밀히 관찰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1씩 오릅니다.]
[전생에서 누구도 찾지 못한 보물을 탐색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보물탐색의 재능 확장!
물욕을 충족하기 위한 힘이다.
회귀자조차 발견 못 하는 히든 피스를 찾도록 도와주는 재능 아닌가.
‘내가 회귀자를 압도하는 데 있어 밑받침이 될 수 있는 재능.’
120회차에서는 어지간한 보물, 비기는 전부 파헤쳐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회귀자들의 착각일 뿐이다.
아직 120회차에는 회귀해도 발견되지 못한 극소수의 요소가 있었다.
내가 최초로 완수한 지옥의 시련이나 샤라펠의 미궁처럼 말이다.
보물탐색 재능만 있다면 난 미발견 아이템들을 최초로 찾아낼 수 있다.
그때 카티에가 걱정스러워하며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요, 대장?”
“그래, 눈이 맑아진 기분이다.”
나는 씩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몸에서 뽑아낸 화살들을 땅을 파내서 묻었다.
[피 묻은 화살들을 묻었습니다.]
[희귀 등급 칭호 ‘화살의 비를 뚫는 모험가’를 획득하였습니다.]
[지속효과: 화살에 맞았을 때 파상풍, 출혈, 독 면역이 오릅니다.]
특수한 칭호는 능력치 상승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효과를 올려줬다.
특히 파상풍, 독, 출혈은 화살로 사망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깔끔하게 효율성이 훌륭한 칭호까지 습득하였다.
나는 새삼 감탄했다.
‘혼자서 화살함정을 뚫지 않았다면, 정말로 후회할 뻔했겠는데.’
거물이 설치한 수천 통의 화살은 나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극한의 효율!
내가 이곳에서 쟁취한 보상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제 가볼까.”
“정말 파티가 머지않았네요.”
“마침내 폐성에서 미확인된 존재가 어떤 인물인지 볼 수 있겠습니다.”
“밤을 꼬박 새워서 피곤한 것이야.”
우리는 달의 폐성으로 향하였다.
***
……그 상황이다.
나는 두려워 몸이 떨린다.
또다시 그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거뭇거뭇한 단발의 카티에가 나의 배 위에 올라타고 있다.
예리한 단도가 나를 향해 빛난다.
“…….”
카티에가 무어라 말한다.
다만 표정도, 말도 읽을 수 없다.
그 어떤 상황보다 무섭다.
소중한 사람이 날 죽이는 것은.
“…….”
칼이 내려온다.
***
“아, 망할.”
나는 한숨을 뱉으며 깨어났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헝클어뜨린다.
잊을 만하면 나를 찾아오는 악몽.
도대체 언제까지 이 등신 같은 개꿈을 꿔야만 하는 거지?
“하아암. 대장, 벌써 일어났어요?”
“…….”
나는 눈을 비비는 소녀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다급히 일어났다.
“대장?”
밤길을 걷는다.
혼자서 산책을 하며 되뇌었다.
‘요새 자꾸만 그 악몽이 떠올라.’
가끔씩 이런 의심이 든다.
어쩌면 내가 120회차에서 아주 조금씩 미쳐가는 것은 아닐까.
사람을 죽이고, 강해지는 것도 그런 정신병의 일환에 불과했던 걸까.
사방이 회귀자고, 미친놈이니 나도 그들과 같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야.’
숨이 거칠어진다.
나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
떠오르는 모든 추측을 부정한다.
나는 평온하며, 제정신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회귀하기 이전.
평안한 일상을 살아가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평가할까?
‘분명히…….’
“범철.”
어깨를 만진 손에 화들짝 놀라며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헤르탄이 날 보며 의아해한다.
“폐성은 이쪽이 아닙니다. 급하게 달려서 따라잡느라 힘들었습니다.”
“……방향을 착각했나 봅니다.”
“혼자 가는 것보단 같이 가는 것이 좋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땀을 닦고 숨을 몰아쉬었다.
“위험할 수 있다고요?”
“아직 ‘미확인된 존재’의 정확한 정체를 모릅니다. 그자가 우리를 파티에 초대한 이유도 그렇지요.”
미확인된 존재.
화염봉헌팔찌의 제작자.
내가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 내게 막대한 힘을 부여해 준 강자였다.
그자가 가진 극소량의 극소량 힘만 갖고도 나는 멸살군주를 죽였다.
‘오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겠군.’
나는 헤르탄과 불가로 돌아갔다.
카티에가 토라져 입술을 내밀었다.
“요즘 대장이 나하고만 자꾸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요.”
“너랑 위험한 짓 하는 꿈을 꿔서.”
그러자 소녀가 뺨을 살짝 붉혔다.
“괜찮아요. 나도 가끔씩 그래요.”
“…….”
밤이 될 때까지 충분히 휴식한 우리는 짐을 꾸리고 분지에 올라섰다.
달의 폐성.
그야말로 달밤이 되는 날에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특이한 폐성이다.
‘이름처럼 영락없이 버려진 성.’
과거엔 장대했겠지만 황폐한 외견은 그저 초라한 건축물일 뿐이었다.
파티는커녕 성안에서 몬스터나 나오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다.
성 앞에 내가 서는데, 가느다란 불빛이 나의 손등을 훑었다.
[폐성이 침입자를 살펴봅니다.]
[악마의 펜타그램에서 ‘미확인된 존재’의 초대인장이 감지됐습니다.]
[위대한 파티를 즐기십시오.]
낡고 큼지막한 성문이 열렸다.
퀸소히니베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딱 보아도 수상한 것이야.”
“하지만 여기까지 힘들게 와놓고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어요.”
우리가 반신반의하며 도개교를 건너고 성안에 들어가던 그 순간.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눈앞의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