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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43화 (43/200)

나만 1회차 043화

놈은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전생에서 나를 죽여 봤다고 한다.

나는 칼을 꽉 쥐고서 경계했다.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나? 삶이 슬퍼 안달 난 도둑놈.”

어둠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노곤한 어조였다.

나는 어둠을 노려보며 물었다.

“나를 아나?”

“알다마다. 전생에서 우리 둘이 얼마나 관능적인 관계였는데, 형.”

분명히 남자 목소리인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라 나는 경악하였다.

설마 전생에서 내가 남성과 사랑에 빠졌던 삶이 있었던 것인가?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카티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농담은 재미가 없다고 일곱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튜크.”

“뭐, 우리가 열정적이긴 했었잖아. 서로 죽고 죽였던 관계였으니까.”

저편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탄이 조금 더 나아가 횃불을 내밀자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해줘. 눈이 부시다고.”

반쯤 뜬 눈을 찡그리는 청년.

땟국이 흐르는 몰골인데 더러운 민소매를 입었어도 의외로 훤칠하다.

헤르탄이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삶에서도 모놀칸의 지하도에서 생활하고 있었군. 시궁쥐 튜크.”

“도벽 치료엔 여기만 한 곳이 없어.”

“네 부하들은 어디로 간 거지?”

“뭐, 항상 똑같지. 다 놀고 있어.”

내가 속삭여서 물었다.

“저 회귀자는 누구입니까?”

“현 도둑 길드 수장이자 황색대륙에서 대도에 가장 근접한 자입니다.”

대도.

도둑의 왕을 뜻하며 노략질의 정점에 오른 자에게만 주어지는 칭호.

하지만 눈앞의 청년이 그렇게 엄청난 실력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강자가 왜 이런 지하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이 시궁쥐께서 병이 있어서야.”

작게 속삭였는데 튜크는 내 입 모양만 보고 단번에 대화를 파악했다.

“아주 심각한 병이야. 나는 보이면 죄다 훔쳐. 완쾌하려면 밖에 나가면 안 돼. 사람을 만나선 안 된다고.”

저건 또 뭔 개소리람.

난 놈을 보며 칼자루를 매만졌다.

“전생에서 날 죽여 봤다고?”

“딱 한 번. 너랑 의형제를 맺고 술을 나눌 때, 네 잔에 독을 탔었어. 그런데 너도 내 잔에 독을 탔더라고. 사이좋게 형제가 함께 죽었지.”

“…….”

서로 배신 때리려다가 죽었다니.

정면에서 겨뤘던 것은 아니었군.

그래도 전생의 나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 걸 보면 보통 녀석은 아니다.

내가 놈을 레이피어로 겨냥했다.

“이번 삶도 나를 죽일 생각인가?”

“내가 뭐하러? 그딴 건 옛날 일이지. 이젠 그냥 다 귀찮고 우울해.”

“그런데 단도는 왜 던진 거지?”

“네가 막았잖아. 알고 던졌어.”

“그 헛소리를 나보고 믿으라고?”

“이래서 1회차는. 설마 네가 내 단도를 칼로 튕겨낸 게 이번 삶에서 최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튜크는 먼지 뿌연 바닥에 편히 눕고는 다리를 멋대로 꼬았다.

도둑답게 자유분방한 놈이군.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질문했다.

“왜 그쪽으로 가지 말란 거냐?”

“그것은 두 가지 이유야. 첫째는.”

튜크가 검지를 펼쳐 들었다.

“내가 너희한테 뭘 훔칠지 몰라.”

“……그게 이유가 되냐?”

“물론이지. 나를 뭐로 보고. 너흰 내 눈에 탐스러운 과육이랑 같아. 당장에라도 내 손에 쥐고 씹고 싶어.”

튜크는 나를 척 가리켰다.

“특히 범철, 너 말이야. 지금만 해도 그 갑옷과 망토가 탐난다고. 당장 벗겨 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야.”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의외로 도도하게 나서며 나를 변호해 줬다.

“내 노예의 물건은 나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빼앗지 못하는 것이야.”

튜크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아가씨가 세 걸음만 걸어도 발가벗기고 마음까지 뺏을 자신 있지.”

“하, 어디 한 번 해보라는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도발적인 표정을 지었고, 튜크는 일어서려다가 앉았다.

“……안 돼. 후. 또 넘어갈 뻔했네. 나는 도둑질 끊기로 했다고.”

나는 그 모습이 상당히 의외였다.

“도둑이 왜 도둑질을 끊으려 하지?”

“도벽이란 것은 아무리 많이 훔쳐도 만족 못 하는 법이야. 나는 회귀해오며 온갖 보화를 훔쳤어. 하지만 지금조차도 만족을 못 하고 있지. 이건 고질병이자, 내게 내린 저주야.”

그 말을 하는 튜크의 눈빛은 밤하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뭐랄까, 꽤나 염세적인 회귀자로군.

“게다가 친구들의 남편, 아내 마음을 삼백쯤 훔치고 나서야 내가 심각한 지경이란 걸 자각하겠더라고.”

……그냥 지금 죽여 버릴까?

튜크는 등 뒤를 엄지로 가리켰다.

“둘째, 이 뒤쪽은 화살밭길이야.”

“화살밭길이라고?”

“화살함정들이 도사리고 있거든. 설령 회귀자라도 피해갈 수 없는.”

카티에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걱정 없어요. 난 이곳 지하도 지리를 전부 외우고 있으니까.”

“쯧쯧, 거물이 그리 만만해 보여?”

튜크는 잘 보라는 듯 바닥의 돌멩이를 줍고는 저편으로 던졌다.

그러자 날아가던 돌멩이가 날아든 화살세례를 맞고 퍼석 부서졌다.

카티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긴 함정이 없는 곳인데……?”

“얼마 전에 사병들이 이곳에 와서 시설을 갈아엎고 함정들을 새로 설치하더군. 화살만 수천 통은 넘게 쓰였을걸? 나는 괜히 거물에게 시비 걸리기 싫어서 숨어만 있었지.”

나는 놀라서 헤르탄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창천의 여제는 표적이 여기로 도망칠 것도 방비해 둔 겁니다. 그래서 함정 위치를 전부 바꿔 놓은 거지요.”

카티에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낭패예요. 설마 이곳까지 막혔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나도 그 말에 공감했다.

이대로 되돌아가면 우리를 쫓는 사병들에게 잡히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다고 도시 밖으로 나가자니 함정에 당해서 화살꽂이가 될 것이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로군.

나는 눈썹을 찌푸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왜 이런 정보를 우리에게 친절히 넘겨주는 거지?”

“숨어서 너희가 죽는 걸 지켜보는 것도 편하고 좋지. 다만 그건 비록 서로 죽였더라도, 우애의 술을 나눴던 옛 형님에 대한 예우가 아니지.”

그 말에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회귀자가 예우도 따지나?”

그러자 튜크가 처음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나를 똑바로 보았다.

“내가 전생에서도 말했지만, 회귀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고. 우리가 다 인성이 파탄 난 줄 알아? 회귀자는 인간이야. 바보는 바보고, 선한 자는 선해. 전부 비정하진 않다고.”

“도둑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어, 그건…… 아, 제기랄. 그 말은 반박 못 하겠어.”

튜크가 짜증을 내며 드러누웠다.

어째 재미난 구석이 있는 놈일세.

나는 저편을 향해서 턱짓하였다.

“도둑이라면서 함정해체는 못 해?”

“저쪽 길부터는 인간이 지나는 순간 고슴도치가 되도록 설계됐다고. 내가 해체하려고 갔다간 금세 화살에 꿰뚫려 버릴걸? 저 길목은 골렘이나 되어야 지날 수 있을 거야.”

인간이 걸으면 죽게 되는 함정.

……잠깐만.

굳이 피해 가야 할 필요가 있나?

내가 가만히 눈을 빛냈다.

“화살함정만 있다고 했지?”

***

“미친 짓이야.”

튜크가 내 계획을 듣고 평가했다.

“정말 미친 짓이라고.”

회귀자한테서 저런 말을 듣다니.

나는 감회가 새로워 확신했다.

“그 말을 들으니 꼭 해야겠는데.”

나의 계획이란 정말로 간단했다.

화살함정으로 가득 찬 길목을 내가 혼자 출구까지 달려서 통과한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이 내가 밟아놓은 안전한 길을 따라서 나온다.

‘분명 무모하기야 하겠지.’

아크 리치를 사냥하기 위해서 나는 절대 이곳에서 죽을 수야 없다.

영웅이 사라진 120회차, 살아남기 위해서는 회귀자보다 무모해야 한다.

튜크가 황당한 얼굴로 날 봤다.

“돌았군. 저 빽빽한 화살함정들을 통과하겠다고? 내가 잘못 기억하나. 너는 회귀 못 하는 것 아니었어?”

“1회차 맞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도리어 뻔뻔하게 받아치자, 튜크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한편 카티에는 구슬땀까지 흘리면서 열심히 긴 밧줄을 묶었다.

“나는 내 말 안 듣는 대장의 무모한 짓을 말리기를 포기했어요.”

“그런데 그 밧줄은 뭐에 쓰려고?”

“교살용이에요. 대장이 죽으면 나도 빨리 자살해 회귀해야 하니까요.”

“…….”

지금 맹세하겠노라.

나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헤르탄은 건너편에다 계속 돌을 던지고 있었는데, 화살이 날아들었다.

콰작! 콰작! 콰작!

화살세례가 돌을 깨다가, 불현듯 돌이 굴러도 화살이 나오지 않았다.

“앞쪽 감지함정은 다 쓰였습니다. 다만 타일을 밟거나 와이어를 당기면 발동되는 함정도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헤르탄.”

나는 뻣뻣한 다리를 풀었다.

헤르탄은 날 가만히 보다 말했다.

“1회차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변수에 유연히 대처한다는 것이겠지요.”

회귀자는 전생지식에 의해 고정된 패턴에만 익숙해져 사고가 굳는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사고방식과 대처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롭다.

나는 쓰게 웃었다.

“유연히 대처한다기보다 처음 겪는 일이라 변수인지도 모르는 거겠죠.”

“아닙니다, 범철. 그대의 임기응변과 상황판단은 제가 보아온 어떤 회귀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10년 동안 한 도시에서만 처박혀서 지루하게 살았던 내가 말이죠?”

“자질은 대부분 뒤늦게 발견이 되니까요.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가끔가다가 약간 감동하곤 한다.

헤르탄처럼 믿음직한 동료를 둔 것은 나의 몇 안 되는 행운이 아닐까.

퀸소히니베는 저 멀리 바닥에 떨어진 화살들을 우습다는 듯 바라봤다.

“용의 비늘이라면 저런 화살 따윈 가볍게 튕겨내 버리는 것이야.”

“너, 아직 비늘 안 나지 않았냐?”

“흥. 내가 완전한 성체가 되면 분명히 멋들어진 비늘이 날 것이야.”

한참을 딴청 하며 어물쩍거리던 그녀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죽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넌 빨리 진짜 어른이나 되라.”

내가 미소를 짓는데, 유령마가 푸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주인이여! 앞길을 탐사하였다.」

「저와 동생이 다녀온 길목에는 샛길과 몬스터 시체가 있었답니다.」

고대기사의 건틀렛으로 소환된 7인의 유령기사단!

유령은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기에 함정 탐사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나는 유령들이 조사한 함정 위치와 길목을 머릿속에 암기하고 물었다.

“출구까지의 거리는?”

「인간의 뜀박질로 30분은 걸릴 것 같아요. 할 수 있으시겠어요?」

“죽기 살기로 해봐야지.”

금발 여기사 유령이 검은 단발 여기사의 귓속말을 듣고 환히 웃었다.

「와아, 동생은 주인이 유령이 되면 함께 다녀보고 싶다고 하네요.」

「하하! 유령도 꽤 편해, 주인!」

「주인이 죽으면 꼭 유령이 되길 바란다. 그땐 마구 괴롭혀주겠어.」

내가 죽기를 바라는 유령 기사단.

……다시금 맹세하노라.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제가 대신해 가도 됩니다, 범철.”

“아뇨. 헤르탄은 덩치가 너무 커요. 그리고 대표로 다툴 시간 없어요.”

나는 팔을 가볍게 풀었다.

“여기서 오랫동안 지체하면 거물의 사병들이 쫓아올 게 분명합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아예 목에다 밧줄을 걸어버린 카티에가 다가왔다.

“혹시 모르니 기적 써줄게요. 갑옷 빈틈은 확실히 보호될 거예요.”

“이거 효과가 얼마나 간댔지?”

“10분이에요. 하지만 화살에 맞아도 스치는 상처 하나 없을 거예요.”

10분이면 촉박하겠군.

“잠시만.”

나는 화살함정 길목으로 뛰기에 앞서 전생의 의동생의 어깨를 쳤다.

“내기할까?”

“뭐, 갑자기 무슨 내기를?”

“내가 무사히 함정을 통과하면, 너도 이제 밖에 나와라. 꼴이 뭐냐?”

나는 안쓰러워하며 놈의 더러운 머리칼을 한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튜크는 당황한 표정으로 흠칫 날 보다가, 피식 비웃더니 끄덕였다.

“그래, 살기만 해봐라. 나가주마. 대신 죽으면 네 유품은 내 것이다.”

“필요하면 시체까지 가져가든가.”

나는 팔다리를 모두 풀었다.

몸에 기적도 제대로 걸렸다.

준비가 끝나자, 긴장은 넘쳐흐른다.

타앗!

내가 함정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화살이 날아와 관자놀이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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