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39화 (39/200)

나만 1회차 039화

『발광주』

광인처럼 취할 수 있는 술. 오래 묵힐수록 엄청난 효능을 발휘한다.

*마시면 개인체질에 따라 기막힌 힘이 불끈 솟구친다.

*상온에 보관하지 않으면 효능이 사라지고, 맛이 크게 상한다.

힘을 얻게 해주는 진귀한 독주.

뚜껑을 살짝 열자 술의 향기가 미궁을 메울 만큼 진하고 강렬했다.

“……윽.”

나도 술은 즐기는 편이지만, 냄새만 맡아도 현기증이 날 만큼 독하다.

“이상한 향인 것이야. 콜록!”

후각에 예민한 퀸소히니베가 금방 기침을 했다.

나는 술병을 천에 곱게 포개어 배낭 깊숙한 곳에 넣어놓았다.

‘이건 일단은 보관만 해놔야겠군.’

격한 싸움으로 우린 녹초가 됐다.

특히 안도니크는 잦은 통역으로 피곤했을 텐데도 손수 차를 타주었다.

“다들 수고했다. 차 마셔라. 이걸 많이 마셔야 운수가 좋아진다.”

“고맙…… 커헉!”

내가 차를 마시다 갑자기 목을 움켜쥐자 카티에가 기절초풍하였다.

“대장! 독이라도 마신 거예요?”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자 안도니크가 설탕통을 내려놓았다.

“설탕 타 먹어라. 달다.”

“……고맙습니다.”

행운의 라임 차는 끝내주게 시지만 피곤한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었다.

카티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그나마 밴시가 나오진 않아서 다행이에요.”

카티에가 가장 불안해하던 것은 밴시에 대한 우려였다.

만일 언데드 몬스터로 밴시가 출현했다면 우린 진작 전멸했을 것이다.

주된 전력인 카티에와 헤르탄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져버렸을 테니까.

[B10층 휴식처를 발견했습니다.]

[투지력이 회복되었습니다.]

[탐사를 관두고 나가겠습니까?]

드디어 휴식처에 닿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긴 했지만 과욕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투지력이 회복되었더라도 다음 휴식처까지 갈 수 있을 확률은 낮다.

“이제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감이에요. 너무 지쳤어요.”

“용에게도 휴식은 필요한 것이야.”

“나도, 너희도 수고했다.”

네 사람의 형체가 사라지며 모두 미궁 밖으로 귀환하였다.

‘그럼 이제 나도 나가볼까.’

혼자 남은 나도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미궁에서 나가려던 순간.

“어?”

불현듯 나의 왼쪽 손등에서 붉은 펜타그램이 환하게 빛났다.

[악마의 펜타그램이 빛납니다!]

[현재 착용한 ‘밴시 대모의 반지’가 미궁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특이한 기연을 접하게 됩니다.]

드드드…….

미궁 B10층이 거세게 진동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벽면이 갈라지더니 통로가 열린다.

[미궁의 샛길을 발견했습니다!]

……숨겨져 있던 길이 펼쳐졌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B10층에 혼자 남은 나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적막이 흐르는 비밀통로.

내가 손등을 보자 방금까지 환하던 펜타그램의 빛이 꺼져 있었다.

‘또 악마의 펜타그램이로군.’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한 지옥의 시련을 깨고서 내가 얻은 보상.

도대체 이 펜타그램은 무엇이기에 이토록 많은 변수를 만드는 걸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일단은 눈앞의 문제에만 집중해 본다면.’

나는 미궁의 샛길을 쳐다보았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혹시나 B9층보다 강한 몬스터가 출현한다면 나는 패배할 것이다.

‘언데드를 출현하게 해줄 사령술사도 없고, 교단 물품도 전부 썼다.’

투지력을 소진해 미궁 밖으로 쫓겨나면 전리품은 소멸해 버리고 만다.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카티에까지 없으니 어쩌면 싸우다가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다.

‘위험해. 저 샛길로 가는 것은.’

지금까지 획득한 전리품을 전부 잃어버릴 감수를 하는 것은 무모했다.

특히 산들바람이 실린 요정장화는 절대 잃어서는 안 될 장비품이다.

‘밴시 대모의 반지가 미궁과 인연이 있는 장신구라고 했지?’

나는 손가락에 착용한 반지의 성능을 다시금 살폈다.

『밴시 대모의 반지』

수수께끼의 반지. 어느 밴시가 이 반지를 애타게 찾아다닌다고 한다.

+밴시 대모의 쉼터를 찾는 단서.

+투명화(0.5초당 마나극대량 소모, 대기시간 반나절, 제한횟수 0회).

본래 4번만 가능하던 투명화는 전부 썼지만 혹시 몰라 끼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반지를 처음 얻었을 때 신경 쓰지 않던 문구가 걸렸다.

‘밴시 대모의 쉼터를 찾는 단서.’

오크 부족의 땅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수많은 밴시가 배회하고 다닌다.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저 밴시라면, 1회차인 나에게는 그다지 강력한 몬스터는 아니야.’

회귀자에겐 끔찍한 천적인 밴시.

그러나 회귀하지 못하고 이번 삶만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저 잡졸이다.

‘휴식처에서 마나는 다 회복됐어.’

혹시나 밴시가 출현한다면 마법을 활용해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

그래도 부족할 시엔 건틀릿을 써서 유령기사단을 가세시키면 된다.

나는 오랜 시간 깊이 고민해 보고서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가보자.’

전생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 미궁에서 숨겨져 있던 기연을 겪었다.

이것은 분명 둘도 없는 기회.

위험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의 보상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애당초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난 120회차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콰라라락!

통로 내부로 걸어가자 예상했던 대로 돌아가는 출구가 닫혀 버렸다.

나는 어두운 샛길을 이곳저곳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걷던 와중에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으후우우우……!

밴시의 울음소리!

나는 긴장해서 식은땀이 배인 손아귀를 꽉 쥐었다.

어둠에 화염구를 띄운 손을 휘젓자, 샛길에 떠 있는 밴시들이 보였다.

‘……저게 다 몇 놈이야.’

수백 마리의 밴시가 부유하였다.

태어나서 이토록 수많은 유령은 난생처음 보았다.

재빠르게 화염구를 생성하는데, 밴시들이 난처해하며 마구 울어댔다.

「접근해서는 안 돼애애……!」

「대모님의 반지를 가졌어……!」

「건드려서는 안 돼애애……!」

‘반지라고?’

나는 혹시나 해서 손가락에 낀 밴시 대모의 반지를 높이 들어 보였다.

그러자 밴시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고 그저 주위에 서성이기만 하였다.

흐음, 말을 하는 걸 보면 어린 밴시들보다는 지성이 높은 것 같은데.

내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봐. 이 길의 끝엔 뭐가 있지?”

내가 질문을 던지자 밴시들은 소란스럽게 웅성대며 날 신기하게 봤다.

「으후우우우우……!」

「인간이 말을 걸었네에에……?」

「우리가 무섭지 않나아……?」

밴시들의 재잘대는 소리조차 인간의 귀에는 끔찍한 소음이었다.

“망할, 좀 닥치고! 대답 안 하냐?”

내가 짜증스러워서 호통을 치자 밴시들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으후우우우우……!」

「마, 마법이 두려워어어어……!」

「우리를 소멸시키려고오오……?」

나는 인내심을 갖고서 화염구를 꺼트린 뒤에, 빈손을 들어 보였다.

“너희가 나를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나도 공격하지 않겠다. 이 샛길은 어디로 통하는 통로야? 대답해 줘.”

방금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밴시들이 느릿느릿 대답을 해줬다.

「대모님의 쉼터어어어……!」

「인간은 오면 죽일 거야아……!」

밴시들의 경고에 나는 턱을 매만지다가 반지를 들어 보였다.

“이 반지를 갖고 있어도 말이냐?”

「미궁의 밴시들은 저 반지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어어……!」

「저것은 대모님의 반지……!」

「대모님께서 찾으시는데……!」

뒤로 돌아가는 길은 막혀 버렸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나는 밴시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럼 너희가 나를 길의 끝까지 안내해라. 되도록 안전하게 말이야.”

그러자 밴시들이 기가 차다는 듯이 어지럽게 날며 비웃음을 날렸다.

「밴시는 인간을 싫어해애……!」

「하, 고작 길안내 따위를……?」

「자존심이 용납 안 해애……!」

“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이깟 반지, 당장에라도 부숴 버리겠어.”

내가 반지에 칼날을 대자 밴시들이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날아다녔다.

「따라와라아아아……!」

샤라펠 미궁의 샛길은 여러 갈림길로 나뉘어져 있었고, 무척 복잡했다.

밴시들에게 지름길을 안내받지 않았다면, 열흘은 족히 헤맸을 것이다.

수백 마리의 밴시를 따라 걸어 내가 도착한 곳은 넓은 납골당이었다.

‘여기는 또 뭐하는 곳이야?’

널따란 밀실에는 시들지 않는 장미꽃 사이로 화려한 관이 놓여 있다.

설마 미궁 내부에 이토록 성대한 장소가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바닥에는 잡동사니가 많았다.

「후우으으으……!」

「인간, 인간이다아아아……!」

「쉼터에 어떻게 찾아왔담……?」

조그만 밴시들이 내 주윌 돌았다.

이곳이 밴시 대모의 쉼터인가 보군.

납골당에 있던 녀석들까지 합쳐지자 족히 밴시 숫자가 수천은 됐다.

「인간이 이곳에 무슨 볼일이냐.」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밴시들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고 고집스러운 인상의 여자였다.

밴시 치고는 굉장히 또렷한 발음.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밴시들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증거일 것이다.

“당신은 누구지?”

「내 질문에 먼저 답해라, 인간.」

까칠하시군.

난 밴시 대모의 반지를 내보였다.

“나는 반지의 주인을 찾고 있다.”

「그 반지는 나의 것이다.」

늙은 외견의 밴시 대모가 날 내려다보면서 자신을 소개하였다.

「내 이름은 샤라펠. 저주를 받고 죽어 밴시가 되었으나, 나는 살아생전 미궁을 건설했던 마법사였다.」

샤라펠 미궁의 건설자!

설마 미궁의 주인이 밴시 대모가 되어 이곳에 남아 있었을 줄이야.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샤라펠은 눈매를 좁히며 바라보았다.

「수상스럽군. 탐사자가 숨겨진 납골당을 발견할 수는 없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고작 반지 주인을 찾겠다고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고, 진귀한 보물을 얻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겠지?」

눈치가 참 빨라서 좋군.

샤라펠은 미궁의 주인답게 훌륭한 눈썰미로 귀찮은 과정을 생략했다.

「인간이 왔다면 부탁이 있다. 내 유골을 미궁의 밖으로 옮겨다오.」

나는 납골당에 놓인 유일한 관을 가리켰다.

“저 관짝 말이냐?”

「그래, 저곳에는 나의 유골이 담겼다. 그러나 밴시는 물리적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래서 밖으로 유골을 가져가지 못하고 갇혀 있다.」

“왜 뼈를 밖에 가져가려는 거지?”

「나는 유골이 파괴되어야 소멸되고 안식을 얻는다. 그리고 저주 탓에 유골 주위만 맴돌 수 있지. 최소한 바깥을 보고 안식하길 원한다.」

그러나 난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내가 널 도우면 뭘 해줄 거지?”

「물론 제대로 보상하겠다. 유골을 꺼내주면 관속에 있는 나의 전설적인 유품은 네가 가져가도 좋다.」

“관속에 유품이 있다고?”

「그렇다. 고대의 마법사들이 손에 넣기를 꿈꾸었던 절대비기이지.」

그 이야기에 나는 유혹되었다.

‘그 비기를 내가 얻을 수 있다면.’

「네가 유골을 챙겨서 저 자루에 담아라. 관에 올라가 있는 황금장미 꽃을 뜯으면 밖에 나갈 수 있다.」

나는 관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그런데 관 뚜껑에 손을 대는 순간.

나의 양팔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샤라펠의 유골에 손을 대어 도굴꾼을 벌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제 샤라펠의 허락 없이는 미궁에서 절대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밴시 대모 샤라펠이 인생의 반쪽을 공유해 반평생 따라다닙니다.]

[저주를 풀려면 적색대륙 비밀결사가 가진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

「저런 무식한 호구를 다 봤나!」

샤라펠이 나를 보며 킬킬거렸다.

수천의 밴시가 나의 주위를 원형으로 떠돌며 기분 나쁘게 비웃었다.

내가 관 뚜껑을 잡고서 힘을 줘봤지만 굳게 잠겨서 꿈쩍도 안 했다.

나를 속인 샤라펠은 납골당이 떠나가라 비웃음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하하하! 적색대륙으로 가 그 관의 열쇠를 찾아내어라! 그 관 뚜껑을 열어야만 너의 저주가 풀리고, 내가 되살아날 유골도 써먹을 수 있다. 이제 너는 나의 몸종으로 살아야만 할 것이다! 아아, 드디어 이 답답한 미궁에서 탈출하겠구나!」

그녀가 나를 호구로 보며 얕볼 때.

나는 바닥에 떨어진 얇은 쇳조각을 주워서 관 자물쇠에 비집고 돌렸다.

철컥! 끼익!

관 뚜껑이 허무하게 열렸다.

[샤라펠의 관을 열었습니다.]

[잠금 해제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도둑과 호감도가 오릅니다.]

[몸에 걸린 저주가 풀렸습니다!]

샤라펠이 화들짝 놀라 기겁했다.

「어, 어, 어떻게! 무슨 수로 그 관을 보석열쇠도 없이 열었……?」

밴시의 말은 들어줄 가치도 없다.

관에 바싹 마른 해골이 있었다.

난 샤라펠의 유골을 칼로 부쉈다.

「끄아아아악!」

밴시 대모가 깨끗이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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