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36화
“대장은 항상 내 말은 안 듣네요.”
“내 노예는 네년이 싫은 것이야.”
“……정말로 그런 거예요?”
카티에의 목소리가 낮아졌고, 나는 퀸소히니베에게 꿀밤을 딱 먹였다.
“중상모략은 그쯤에서 끝내지?”
“노예에게는 주인을 때릴 자격이 없는 것이야.”
그녀가 으르렁거렸으나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를 위해 훈계할 의무는 있지.”
“……흥.”
퀸소히니베가 삐쳐서 콧방귀를 뀌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달의 폐성 가는 길에 있잖아. 식후에 차 한잔하면 좋지, 뭐.”
미확인된 존재가 초대한 파티를 위해서 우리는 폐성에 가야만 한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오크 부족의 땅은 폐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오크 부족의 영역은 회귀자들조차 점령하지 못했던 땅입니다. 손님으로서 초청받는 것은 오랜만이군요.”
“어, 그렇습니까?”
“오크를 지배하려던 회귀자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오크가 나중에 회귀자들을 적대하기 때문인가요?”
“그런 이유도 있지만,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의 얼굴은 드물게 굳어 있었다.
오크들이 어떤 문제를 가졌기에 그 덤덤한 헤르탄이 저렇게 반응하지?
거기까지 대화를 나눴을 때 안도니크가 나뭇가지를 헤치며 가리켰다.
“여기가 우리 부족의 땅이다.”
칼과 창을 꼬나 쥔 두 오크전사 형상의 토템(Totem)이 관문에 보였다.
오크 부족의 땅은 간소하였다.
물소가죽의 원추형 천막이 수백 개나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난생처음 보는 이종족의 생활 양식에 감탄하며 말했다.
“많은 가구가 함께 사는군요.”
“족히 2,000명은 된다. 오크의 출산율은 인간들과 비할 바 못 된다.”
퀸소히니베도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게 오크의 전부인 것이야?”
“오크 부족들은 분파만 오십이 넘는다. 우리는 흰 사슴뿔 부족이다.”
“다들 여기 정착해 사는 겁니까?”
“한 곳에서만 계속 머무르진 않는다. 겨울엔 촌락으로 떠나서 산다.”
안도니크는 잡아 온 회귀자들을 처형고문 기술자의 손으로 인도했다.
끌려가는 그들은 공포로 질려 있었지만 일말의 동정심도 못 느꼈다.
‘하여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군.’
오크들의 생활양식은 단출하나 언행에는 느긋한 여유가 보였다.
성인들은 사냥감을 잡으러 가거나 가죽을 직접 씹어 무두질을 하였다.
오크 꼬마들은 재잘재잘 떠들거나 칼싸움, 인형놀이를 하며 잘 놀았다.
무엇보다 회귀자의 삭막함이 없다.
“오크는 따로 부모가 없다. 모두가 모두의 가족이다. 그래서 소중하다.”
꽤 마음에 드는 거주지였다.
오크들은 부족에 들어와 노니는 우리를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너희를 보면 족장님이 좋아하실 거다. 오크는 은혜를 꼭 갚는다.”
안도니크는 우리를 흰 사슴뿔 족장의 천막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는 말 그대로 새하얀 사슴뿔 모자를 쓴 늙은 오크가 앉아 있었다.
“카동카동. 레볼볼볼. 샤를랄랄!”
으억, 깜짝이야.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족장이 대뜸 소리쳤고, 카티에가 놀라서 물었다.
“저 말이 무슨 의미예요?”
안도니크는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 뜻도 없다. 우리 족장님, 요새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
손님 대접은 받을 수 있는 걸까.
다행히도 안도니크가 다가가 손잡고 속삭이자 족장의 눈이 맑아졌다.
“카트레탈. 레모라샬. 레트린. 레트로므라. 오골타골. 레바르샤.”
“족장님께서 너희들의 활약을 귀담아들으셨다.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가장 귀한 차를 대접하신다 한다.”
오크족장은 몸소 일어나 찻잎을 꺼내 나무 컵에 담고 차를 우려냈다.
아랫사람을 시켜도 될 텐데 연로하신 몸으로 솔선수범 고생하시는군.
우리는 가죽으로 덧댄 의자에 앉았고 김 오르는 차가 탁자에 올랐다.
향기가 아주 상큼하고 상쾌한걸.
내가 가볍게 한 모금 맛을 보았다.
“크흠.”
나는 가까스로 차를 뱉지 않았다.
……차가 시큼하다.
혓바닥까지 까질 정도로 심각하게.
[절벽 끄트머리에서 채취한 행운의 라임 차를 처음 맛보았습니다.]
[행운이 1 올랐습니다.]
행운 능력치가 아니라 혓바닥의 맷집부터 올려야 할 것 같은데.
레몬의 수십 배는 신 것 같았지만 나는 꾹 참고 차를 깨끗이 비웠다.
“레날트? 모놀모놀. 쿨라라랏!”
“뭐라고 하신 겁니까?”
“족장님은 그 시큼한 차를 어떻게 다 마셨냐고 감탄하며 비웃으셨다.”
“…….”
“설탕 타 먹어라. 달다.”
안도니크가 설탕통을 가져왔고 족장은 내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줬다.
“흰 가루를 타니 맛좋은 것이야.”
시큼함에 아예 대놓고 인상을 구기던 퀸소히니베가 금세 얼굴을 폈다.
오크족장은 껄껄 웃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곧 진지하게 말하였다.
“족장님께서는 외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무엇이 말입니까?”
“도대체 최근 인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오크 부족도 바보는 아니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인간들의 변화.
언젠가부터 인간들에게 감도는 기류가 퍽이나 역겨워졌다고 하였다.
“족장님의 눈에 요새 인간은 모습만 인간이지 속은 짐승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나는 회귀자들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 120회차가 선한 영웅들은 자살한 미친 세상이란 것도.
“이번 삶의 회차목표는 세 대륙의 지배자 살해입니다. 그 목표를 이뤄야만 사망회귀를 멈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하는 것이고요.”
오크족장은 물론이고 안도니크 또한 의심스러운 눈빛을 해보였다.
“족장님은 믿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직접 전생에 관해서 물어보십시오. 이 둘은 회귀자니까.”
나는 카티에와 헤르탄을 가리켰다.
안도니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희 둘은 아닌가? 인간이잖나.”
“저는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회귀를 못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나는 감히 인간 따위와는 비교조차 불허한 종족인 것이야.”
안도니크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족장의 질문을 전달했다.
“족장님은 전생에서도 우리들과 만나본 적이 있냐며 궁금해하신다.”
카티에는 고개를 저었지만 헤르탄은 차를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
“누런 말코, 보라 소발굽, 허연 토끼 귀 부족과는 접촉한 적 있습니다만, 흰 사슴뿔 부족은 처음입니다.”
“족장님은 허연 토끼 귀 놈들은 아주 싸가지가 없다고 분개하셨다.”
“그래서 전생에서 몰살시켰습니다.”
“족장님은 너의 시원스러운 솔직함이 전사의 귀감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
이번 삶만 아니면 괜찮다는 건가.
오크들은 사고방식도 참 유연하군.
“족장님이 원수 같은 허연 토끼 귀 부족장의 이름을 질문하셨다.”
“타볼크입니다. 그는 부족들 몰래 흑요석을 모아 저장해 두고 있지요.”
“이방인이 부족장의 비자금까지 캐고 있다면 믿을 만하다고 하셨다.”
오크족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염치불구하고 부탁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것은……”
안도니크가 통역을 하던 도중, 갑자기 을씨년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으후우우우……!
어라, 언젠가 들어본 음색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른 일행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꺄아악!”
카티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더니 나에게 덥석 달라붙었다.
소녀뿐만이 아니었다.
쾅! 쾅! 쾅!
놀랍게도 헤르탄은 정신병자처럼 탁자를 이마로 마구 내리찍었다.
회귀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나는 소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으흐우우우……!
밴시의 울음이다.
***
나는 다급히 천막을 뛰쳐나갔다.
오크들의 수많은 천막들 위로 비명 지르는 밴시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하나, 둘, 셋…… 저게 다 몇이야?
대형 언데드가 지나간 길이 아니고야 저 많은 밴시가 꼬일 리가 없다.
밴시가 어떻게 이곳을 습격했지?
마력을 휘감은 손을 들어 올릴 때 안도니크가 나를 완곡히 말렸다.
“죽이지 마라.”
“몬스터 아닙니까? 퇴치해야죠!”
“저 밴시들은 오크의 재산이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때 뼈를 쥔 오크 사령술사가 손을 흔들자 밴시들이 멀리 날아갔다.
으흐우우우……!
오크는 밴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족의 오크들은 밴시 따윈 신경 쓰지 않고서 일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내가 상황을 파악한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오크들은 부족의 영역을 밴시를 이용해 외지인으로부터 지킵니다.”
헤르탄이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핏방울을 닦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족장의 천막에 다시 들어온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회귀자들이 오크 부족의 땅을 함부로 점령할 수 없는 거군요.”
“회귀자가 밴시에게 당하면 회귀를 할지라도 영원한 백치가 되니까요.”
밴시는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일수록 정신을 크게 감퇴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수천 년을 살아온 회귀자들에게는 숙적이자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바닥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마로 탁자를 박살 낸 것은 너무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탁자를 부숴도 얕은 상처만 남은 그의 맷집이 새삼 놀라웠다.
헤르탄은 우울하게 상처를 훑었다.
“아픔은 공포를 잊는 수단입니다. 침착하기 위해 자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오크족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귀한 기물을 파손해 죄송합니다. 탁자는 새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족장님은 회귀자에게 무지했던 자신의 실수이니 염려 말라 하셨다.”
밴시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두 회귀자는 간신히 진정하였다.
“너는 좀 괜찮아?”
“손 놓으면 자살해 버릴 거야.”
“…….”
불안증 환자인 카티에는 아직 두려움이 남았는지 내 손을 꽉 쥐었다.
퀸소히니베가 코웃음을 쳤다.
“회귀자들은 겁쟁이인 것이야.”
“입을 꿰매 버리기 전에 닥쳐요.”
김이 샌 나는 입맛을 쩝 다셨다.
“하여간 저희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일이 무엇입니까?”
“족장님은 자물쇠 부수는 것을 도와줬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부숴만 주면, 보상은 제대로 할 것이다.”
나는 의아해하며 눈썹을 올렸다.
“자물쇠를 부숴달라고요?”
***
거주지로부터 떨어져 구석진 지역.
종유굴의 형태와 비슷하나 복잡한 양식을 새긴 건축물이 보였다.
우리는 오크 부족의 젊은이들을 대동하여 그곳의 앞에 모여 있었다.
“말씀하신 장소가 여기입니까?”
안도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먼 옛날, 이 땅의 강력한 마법사가 만들어낸 미궁이다. 내부에는 보물이 산처럼 쌓여있다곤 하지만, 우리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미궁의 입구에는 번뜩이는 대문짝 만한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었다.
어찌나 단단한지 내가 자물쇠를 칼로 그어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이 미궁은 옛날부터 이곳에 있었다. 오크들은 미궁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자물쇠가 풀리지 않아 매일 울상만 지었다.”
헤르탄은 자물쇠를 직접 만지고 형태를 살펴본 뒤에 말했다.
“봉인된 자물쇠로군요. 일반적인 해체기술로는 절대 열지 못합니다.”
“오크들도 그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 부족의 젊은이들이 자물쇠를 부수려 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힘을 깨나 쓸 줄 안다는 젊은 오크들이 기죽은 표정을 지었다.
안도니크는 이어서 오크족장이 흥분해서 떠드는 말을 통역했다.
“그래서 회귀자들에게 묻고 싶다. 전생에서 이 자물쇠를 부수고 미궁을 탐사했던 사람이 있었나? 만약 있다면 미궁 내부는 어떤 곳인가?”
눈앞에 보물을 두고도 미궁에 들어가지 못하니 속이 썩어났을 것이다.
오크들이 탐욕스럽다기보다는, 그것은 생물로서 당연한 본능이었다.
그러나 두 회귀자 일행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회귀자들이 아는 장소냐?”
“아뇨. 오크 부족의 땅에 들어올 일도 얼마 없었던 데다가 밴시 때문에 보통은 피해 가는 장소니까요. 여기 미궁에 관해선 들어본 적 없어요.”
“전생에서 누군가 미궁을 개척했다면 정보가 나돌았을 것입니다. 이곳 오크 부족의 미궁은 120회차에서는 몹시 드문 미발견 지역입니다.”
회귀자들의 말을 전해 들은 젊은 오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들은 회귀자의 도움으로 미궁을 탐험할 기대에 부풀어 있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현실을 부정하며 우리를 아예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카티에가 눈썹을 확 찡그렸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구요?”
안도니크는 중간에서 혼자 여러 대화를 통역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다. 카파콜은 지금껏 누구도 자물쇠를 부수지 못했으니 너희를 이해한다고 끄덕였다. 하지만 나파보는 너희가 사기꾼이 분명하니 당장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 그리고 바얀은 슬슬 배가 고프니 멧돼지나 사냥하러 가자고…….”
철컥!
내가 레이피어를 넣고 돌리자 커다란 자물쇠가 맥없이 풀렸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오크와 회귀자들을 나는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안 들어가고 뭐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