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35화
“손에 든 그 물건은 무엇이야?”
“나는 당신에게 화내지 않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인 것이야?”
“무식한 것은 죄가 아니니까.”
나는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스쳐 가는 바람결이 시원스럽다.
이것이 얼마 만에 맛보는 평화롭고 달콤한 경관이란 말인가.
“네년은 얄미운 꼬마인 것이야.”
“흥. 나도 당신이 아주 싫네요.”
카티에와 퀸소히니베는 서로를 새침한 눈길로 도도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당신을 좋아하려 노력은 해보겠어요. 함께 여행할 거니까.”
“나도 네년을 조금은 탐내보겠어.”
“그러든가요.”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 것이야?”
“이건 지도에요. 인간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지리를 표기한 종이죠.”
두 여성의 유별난 대화를 뒤로 한 채 나는 눈을 감고서 말하였다.
“헤르탄.”
“왜 그러십니까.”
“이런 곳만 다닐 수 있다면 미친 세상의 여정도 괜찮은 것 같아요.”
“필리안 초원은 꽃과 수목이 아름답기로 매우 유명한 곳입니다.”
나, 카티에, 헤르탄, 퀸소히니베가 협곡을 떠난 지 어느덧 사흘째였다.
자살기도회 본부에 있을 때, 나는 일레아흐 본부장과 대면하였다.
“자살기도회는 아크 리치를 어떻게 물리칠 계획입니까?”
“아크 리치는 향연香煙의 산맥에서 서식합니다.”
향연의 산맥.
황색대륙에서 가장 음험하고, 가서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영역이다.
미개발 영역을 탐험하거나 산을 타고 지름길로 교역하던 사람들이 향연의 산맥에서 모두 실종된 것이다.
향연의 산맥의 끔찍한 악명은 단순히 실종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사라진 사람들은 무언가에 의해 뼛가루가 되어 산기슭에 뿌려진다.’
숙련된 농부가 산맥 근처의 토양을 조사해보고서 밝혀낸 사실이다.
그러한 괴기스러운 풍문 탓에 모두가 지나기조차 꺼려 하는 지역이었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그곳에서 아크 리치가 살고 있단 말입니까?”
“모험에 미쳐 버린 회귀자들이 수없이 죽어가며 알아낸 진실이죠.”
과연 120회차 세상이긴 하다.
그 위험한 곳까지 탐사가 됐다니.
“향연의 산맥 관문에는 아크 리치의 결계가 걸려 있습니다. 그 저주를 풀고서 산에 오르는 데에만 4,000개의 축복받은 성물이 필요합니다.”
“성물을 4,000개나 말입니까?”
성물은 일개 교단에서도 몹시 귀중히 취급해 가치가 귀한 물품이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규모에 입을 벌렸지만 일레아흐는 태연히 말했다.
“저희는 대륙 곳곳에 일원들을 풀어 필요한 물품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최소 석 달은 소요될 것입니다.”
아일레흐의 지도력과 자살기도회의 조직력은 나의 짐작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의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황색대륙은 모조리 뒤져도 성물 4천 개가 나오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그보다 저희가 범철에게 바라는 것은 압도적 성장입니다. 당신의 재능은 기백 회귀자보다 값지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살기도회와 별개로 나는 나만이 가능한 준비를 하는 것이 최선이다.
“여정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반지를 받아주십시오.”
일레아흐를 대신하여 히사네가 내게 놋쇠 반지 여러 개를 내밀었다.
“리치 토벌의 준비가 마쳐지면 이걸로 연락하겠습니다. 반지가 뜨거워진다면, 그것이 집합 신호입니다.”
그 뒤로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아, 혹시 여유가 되시면 아크 리치에 대항할 병력을 모아주십시오. 수가 많으면 가능한 전략도 많아질 테니까요.”
지배자에 대항할 인간이 적다는 것을 알기에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자살기도회 본부를 벗어나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창고에 들렸다.
자살기도회 무기고에는 아크 리치를 대비한 각종 교단의 물품이 많았다.
“원하시면 뭐든지 가져가도 좋다고 본부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단, 맨 아래층에는 고위성물이 보관되어 있어 그쪽은 가실 수 없습니다.”
멸살군주와의 싸움에서 칼이 부서져 버려 나는 지금 무기가 없었다.
‘회귀자들이 대륙 각지에서 수집한 귀중품들이라서 그런지 질이 높군.’
성수, 가시관, 구유, 성안포 등등!
교단의 교주들이 자살해서 소유물을 훔쳐오기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창고를 돌다가 성스러운 축복이 깃든 얇은 칼을 쥐었다.
『영광스러운 영애의 레이피어』
축복받은 일가의 영애가 애용하던 칼. 장식이 세련되고 날이 얇다.
+찌르기 시 힘 15 증가.
+언데드, 유령에게 피해량 +50%.
+영광스러운: 일격을 가할 때마다 3% 확률로 빛의 축복이 부여된다.
가장 무난하고 좋은 검이었다.
사실 이보다 우월한 장비도 많았지만 모두 특정 교단에 몸을 담아야 한다는 착용제한이 걸려 있었다.
그 외에도 나는 쓸모 있어 보이는 교단 물품을 전부 챙겨서 나왔다.
“범철이 칼을 가르쳐주셨던 그 경험은 회귀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아크 리치를 죽일 때 또 봅시다.”
마지막으로 암론을 비롯한 크레스 시 일원들과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서, 우리는 자살기도회를 떠나갔다.
협곡을 나오고서 여행을 하는 며칠 간은 별다른 사건 없이 평화로웠다.
그 평화는 지금까지 지속되어 우리는 들판에서 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시체도 없고, 경치까지 좋은 곳에서 식사하니까 음식도 더 맛나요.”
나 역시 카티에의 말에 동의했다.
이계로 온 뒤부터 도시에서만 살았기에 나는 지금의 여행이 즐거웠다.
처음 밟아보는 땅과 멋진 풍경.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하는구나.’
작은 도시에만 눌러앉고 살았다면 분명히 평생 모르고 살았겠지?
세상에는 아직 내가 밟아보지 못한 멋들어진 땅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헤르탄이 마법단열배낭에서 얼음을 꺼내어 넣은 붉은 수프를 떠주었다.
“더운 날이라 차게 해봤습니다. 적색대륙 본고장의 전통음식이지요.”
찬 수프를 듬뿍 떠먹으며 퀸소히니베가 은근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과연 헤르탄은 무척 탐이 나는 노예 후보인 것이야.”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과찬이십니다만, 제가 모시는 분은 단 한 명뿐입니다. 퀸소히니베.”
“하, 그게 어떤 놈인 것이야?”
헤르탄이 나에게 눈짓했고, 퀸소히니베는 눈살을 찌푸리며 꾸중했다.
“내 노예가 가질 수 있는 아랫사람은 오직 자기 새끼뿐인 것이야.”
“거, 그래. 여럿이 다니니까 좋네. 여행에 활기도 들어차고 말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빈정거렸다.
간만에 여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여행만 무작정 즐기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가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나의 왼쪽 손등에 표기되어 있었다.
‘악마의 펜타그램.’
멸살군주와 싸울 때 ‘미확인된 존재’가 나에게 그려낸 표식.
그곳을 건드리자 글귀가 떠올랐다.
[‘미확인된 존재’가 초대한 파티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정된 날짜까지 개최 장소인 ‘달의 폐성’에 도착해 파티를 즐기십시오.
파티 개최까지 남은 기한-30일]
‘120회차 세상에서 열리는 파티.’
나에게 엄청난 힘을 빌려줬던 미확인된 존재가 나를 그곳에 초대했다.
우리는 그 존재의 정체를 알기 위해 파티가 열리는 폐성에 가야 했다.
“미확인된 존재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파티까지 여는 걸까요?”
“글쎄다. 우선은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지.”
퀸소히니베는 궁금하다는 눈초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티가 무엇인 것이야?”
“인간들이 모여 기쁨을 즐기고 함께 사교하는 장입니다. 분위기가 흥겨워 사람을 사귀기도 좋습니다.”
헤르탄의 간략한 설명에 퀸소히니베는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였다.
“파티에서 가지각색의 노예들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야.”
“…….”
하여간 저 용의 취향하고는.
오이, 식초, 토마토, 기름이 뒤섞인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니 끝내줬다.
내가 금세 한 그릇을 비우고 냄비에서 국자를 휘젓던 때였다.
“꺄아아악!”
귓속을 파고드는 끔찍한 비명.
나는 국자를 내려놓고 눈매를 좁히며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저건 오크(Orc)들이로군요.”
아주 멀리 희미한 곳에서 사람들이 오크 떼에게 거칠게 쫓기고 있었다.
여자, 남자가 섞인 스물이 될법한 일행 뒤로 기십의 오크가 보인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회귀자치곤 드물게 얼굴이 공포로 질려져 있었다.
“아아악!”
가장 느려서 뒤처졌던 남자는 오크들에게 짓밟혀 묵사발이 되었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쫓아오는 오크들의 기세가 맹수 떼처럼 잔혹했다.
“의외로군요. 오크가 필리안 초원에 침범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네년. 수프 좀 더 달라는 것이야.”
“당신이 알아서 떠요. 무례한 용.”
저런 긴박한 광경을 보면서도 내 일행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입술을 씹었다.
“이대로 가만히만 있을 거냐?”
“하지만 음식이 남은 것이야.”
“우리가 끼어들어 봤자 손해예요.”
삭막함이 절정에 치달은 120회차.
나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떻게 저런 광경을 보고도 태연히 앉아서 식사만 할 수 있지?
“움직이시겠습니까, 범철?”
역시 헤르탄이다.
나는 칼자루를 쥐고서 일어섰다.
“오크들을 도와야겠습니다. 당장.”
***
정신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들은 정면으로 달려갔다.
칼을 들고서 앞장서 뛰는 나를 보고는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 살았다! 오크를 해치워 줘요!”
“얼른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나의 칼은 가장 앞에서 달리던 여자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꺄아아악!”
“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폐에만 얄팍한 구멍만 수어 개 뚫은 뒤 나는 즉시 화염구를 쏘았다.
헤르탄은 덩굴로 회귀자들을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팔다리를 뭉갰다.
퀸소히니베는 냉담한 눈초리로 걸어가 겁에 질린 그들을 훑어보았다.
“너희는 노예로 쓸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야.”
비록 인간 모습이나 알맹이는 용이기에 그녀의 완력은 수준이 달랐다.
퍼걱!
그녀가 주먹을 후려칠 때마다 회귀자들의 몸이 단숨에 깨져 나갔다.
카티에는 후방에서 우리에게 축복을 걸어 몸의 속도를 높여줬다.
“카벤! 레쿠를! 모크리타!”
우리가 진로를 방해한 덕분에 오크 떼가 회귀자들을 금세 따라잡았다.
퍼걱! 퍽! 퍼억!
“끄, 끄어억!”
“제, 제발 살려줘……!”
오크들의 장병기가 피로 적셔졌다.
도망치던 회귀자들은 죽거나 피투성이가 되어 오크들에게 붙잡혔다.
오크들은 갑작스레 난입한 우리를 보며 의문스러운 눈길로 수군거렸다.
“모코르. 타베라롱. 샤벨트?”
“샤메르토. 오토몽? 라벨루브. 샤테난. 오르카나.”
나는 괜스레 피를 닦고서 물었다.
“저 오크들 뭐라고 하는 거냐?”
“오크들은 우리랑 언어가 달라요.”
“너는 할 줄 몰라?”
“전혀요. 나는 이종족의 언어에 별다른 관심을 둔 적이 없거든요.”
그때 헤르탄이 앞장서 말했다.
“라벨테르. 오토칸. 하채마르.”
그가 말하자 오크들은 안심한 눈으로 피 묻은 무기를 손에서 내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헤르탄은 오크어도 합니까?”
“간단히 몇 마디만 할 줄 압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었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오크들 사이에서 머리가 산발한 근육질 몸집의 여전사가 다가왔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안다. 약간의 오역이 있을 수도 있다.”
억양이 몹시 어색하긴 하나 알아듣는 데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나는 시체들을 흘깃 턱짓했다.
“범죄자들이었죠?”
오크 여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들은 우리 부족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험한 짓을 하려 했다.”
역시나.
나는 오크들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문화는 익히 알고 있다.
‘오크들이 타인의 영역까지 침범해 사람을 죽이려는 경우는 오직 아이에게 손댄 자를 처형할 때뿐이다.’
세간의 차별적인 소문과 다르게 오크는 미개하거나 원시적이지 않다.
감정적인 성향이 클 뿐 그들은 부족사회와 종족 간 예절을 중시한다.
그러나 그러한 오크일지라도 아이를 건드리려는 자는 용서치 않는다.
“저는 범철이라고 합니다. 여행하다 초원에 머무르던 참이었습니다.”
“안도니크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괜스레 범죄자 추격에 저희가 해를 끼친 것이 아닐까 염려됩니다.”
“아니다. 솔직히 너희에게 놀랐다.”
“뭐가 말입니까?”
안도니크는 초원에 난자한 범죄자들의 시체들을 가리켰다.
“오직 진정한 전사만이 아동성애자를 이토록 무참히 죽일 수 있다.”
“성범죄자를 처벌하는 오크들의 유명한 고문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내가 말하자 밧줄로 묶인 회귀자들이 흠칫하며 몸을 덜덜 떨었다.
안도니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그래도 인간 중에서는 괜찮다. 요즘 인간들 정신이 나갔다.”
“우리가 언제 안 그런 적 있어요?”
“원래 그랬지만, 요새 참 심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계에서 회귀하는 것은 인간들뿐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오크들은 아예 회귀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의미다.
나는 회귀자들을 사납게 노려봤다.
저 자식들이 어째서 오크들의 아이를 노렸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
‘회귀를 못 하는 이종족은 그야말로 회귀자에게 만만한 먹잇감이겠군.’
회귀자보다 살아온 세월도 짧고, 삭막하지 않으니 노리개로 부린다.
그 실상을 깨닫고 나자 나는 회귀자 놈들이 한층 더 역겨워졌다.
“하여간 범죄자의 체포를 도와준 것에 사례를 표하고 싶다. 부족의 땅에서 차를 대접하려는데 괜찮나?”
안도니크가 손을 내밀었을 때, 카티에가 재빨리 나에게 귀띔했다.
“대장. 거절하는 것이 좋아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오크들은 언제나 회귀자들과 앙숙이었거든요. 지금은 회차 초반이라 괜찮지만 앞으로 인간들에게 원한이 쌓인 오크들이 늘어날 거예요.”
오크들에게는 전생의 지식이 없다.
그래서 무분별한 희생양이 되어 회귀자로부터 고통받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모든 회귀자가 무시하는 그들과 기꺼이 악수를 나눴다.
“당신들 부족은 어디에 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