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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34화 (34/200)

나만 1회차 034화

내가 의식이 든 것을 보니 이곳은 저세상인가보다.

자, 눈을 뜨면 천국일까 지옥일까?

나는 잔뜩 설레면서 눈을 떴다.

“응?”

날 끌어안는 이 하얀 머리칼 소녀, 악마는 아닐 테니 천사인가보다.

그런데 거참, 요즘 천사들은 복장 규율이 엉망인가 보군.

어여쁘게 생기긴 했는데 머리 위의 링이랑 날개는 어따 팔아먹은 거냐.

“요즘 천국근무환경은 자율복장체제입니까?”

“헛소리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제정신이네요.”

카티에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자살기도회 본부 회복실.

나는 온몸에 고약을 바른 붕대를 잔뜩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른 환자들은?”

“여기는 독실이에요.”

나는 허리를 일으키다가 곡소리를 냈다.

크허헉, 온몸이 끝내주게 아프군.

“네가 날 간호해준 거냐?”

“아니요. 간호는 암론이 다 했고, 난 다른 걸 하다가 막 왔어요.”

“다른 거? 뭐?”

내가 묻자 나의 손을 꼭 잡은 카티에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목맬 준비요. 나는 대장이 죽으면 이대로 자살하려고 했어요.”

“……참 고맙다. 내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 하나를 상기시켜 줘서.”

소녀도 부러진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티에가 문을 열어주자, 가운을 걸친 헤르탄이 걸어 들어왔다.

“옆방에서 말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용케 죽지는 않았네요. 이번에도.”

그 말은 명백한 실수였다.

헤르탄은 주섬주섬 산야초를 꺼내서 내밀었다.

“고들빼기입니다. 씹으면 정신이 나는 데 그만입니다.”

“…….”

아, 글쎄 무쳐 먹고 싶단 말입니다.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쓰디쓴 고들빼기를 씹었다.

“내가 쓰러지고 어떻게 됐습니까?”

“승리했습니다. 사망한 아군은 백을 넘지 않지만, 적은 전멸했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시체를 수습하거나 적의 진영을 탐색 중입니다.”

그나마 피해가 적어서 다행이군.

헤르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범철. 멸살군주와 싸우던 도중 그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그러한 강함은 아직 지금 시점의 그대의 것이 아닙니다.”

카티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대장의 그런 싸움은 회귀하며 처음 봤어요. 그 멸살군주가 그렇게까지 참혹히 당했던 것도요.”

나는 붕대가 감아진 손아귀로 머리를 긁적이며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존재가 그대에게 힘을 빌려주었단 말입니까?”

“예. 혹시 전생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경우가 있었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없습니다.”

기억력이 출중한 카티에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멸살군주조차 제압하는 힘을 빌려 주는 존재라니. 정체는 몰라도 범접 못 할 강자가 분명해요.”

내가 미확인된 존재에게 빌린 힘은 극소량의 극소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존재의 완전한 힘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안 갔다.

그때 헤르탄이 무릎을 꿇었다.

“무엇보다 범철. 그대가 멸살군주와 정면에서 싸울 때 감히 저희가 돕지 못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아뇨.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오히려 무의미한 희생만 늘었을 테니까요.”

나는 괜스레 뺨을 긁적였다.

헤르탄은 좋은 사람이지만 저 윗사람한테 충실한 태도는 참 거북해.

그가 머리를 살짝 숙였다.

“그럼 휴식에 방해되실 테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와줘서 감사했습니다. 헤르탄.”

카티에는 불안해하며 붕대가 감긴 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대장.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요?”

“네가 무슨 우리 엄마냐?”

“흥. 내가 살아온 세월이 대장 어머님보다 훨씬 많아요.”

“어르신. 얼른 가서 쉬세요.”

카티에는 볼을 부풀리고 나갔다.

나 혼자 남아서 고요해진 독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냐?”

“나는 너무나 약했던 것이야.”

나의 침대 커튼 뒤에서 퀸소히니베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안색은 힘이 없어 보였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완전히 중립을 어겼어. 분명히 제약을 받겠지.”

“그러냐?”

퀸소히니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태생적으로 중립을 지키도록 태어난 것이야. 그러니 중립을 어긴 내겐 끔찍한 제약이 걸려 버리겠지.”

“네가 어떤 제약을 받는데?”

“중립을 벗어난 용은 오래간 절대 본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해. 다른 종족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야.”

용이 용의 모습으로 지낼 수 없다.

실생활을 이종족으로 변한 채로만 살아야 한다면 크게 불편할 것이다.

강대한 용의 위상도 잃게 되니까.

‘퀸소히니베가 그렇게나 중립을 지키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군.’

나이 어린 용은 상당히 풀이 죽고 자신감도 잃은 모습이었다.

퀸소히니베의 표정이 울적했다.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패배한 것이야. 멸살군주란 놈에게.”

“겨우 한 번 싸웠다가 진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말할 거야 있냐.”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어. 나는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하는 것이야.”

나는 하품을 크게 했다.

오래 잔 것 같은데 아직도 졸립군.

“그럼 건강해지게 살 좀 찌워라.”

“앞으론 열심히 먹을 테야.”

“너무 열심히는 말고. 식량 동나.”

그런데 퀸소히니베는 그것 말고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다가 마지못해 도와주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계속 나 혼자 남기를 기다렸냐?”

“……너와 함께 다니고 싶어.”

나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나의 매력이 종족의 벽마저 뛰어넘을 만큼 엄청났단 말인가?

“하, 고백해 주는 거냐?”

“네놈이 아주 미친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날 죽일 듯 쏘아봤다.

그야 당연히 농담이다.

자존심을 버리고 부탁하는 것이 용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연이군. 내가 너한테 할 마지막 부탁도 그거였는데.”

“뭣이야?”

그녀가 중립을 어기게 된 것은 나의 탓이니, 책임져줘야만 했다.

나는 피곤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말했잖아. 같이 여행하자고.”

퀸소히니베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일순간 떠오른 기쁨을 보았다.

“……그저 당분간 인간으로 지내야 하니, 내 노예가 필요한 것이야.”

“누가 뭐라 했냐? 됐고, 나중에 밥이나 해먹자. 쌀밥 해줄게.”

“네가 내게 해주는 밥은 언제나 맛 나고 따뜻해.”

어째선지 이 어린 용, 나한테는 조금씩 살가워지는 것 같다.

퀸소히니베가 즐겁게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늘은 내 노예랑 밤새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인 것이야.”

……아이고, 이런, 맙소사.

***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갔다.

상흔과 부러진 뼈들은 온갖 고약과 회복마법으로 얼추 회복되었다.

‘카티에가 밤새워서 고생해 줬지.’

아주 못해도 반년은 요양해야 할 부상이 일주일 만에 회복되다니.

확실히 성녀의 치유력은 대단했다.

‘이게 멸살군주의 깃발인가?’

나는 몰락한 멸살군주의 진영 중앙에 세워진 높은 깃대를 찾아냈다.

6개의 별이 새겨진 육성기六星旗.

거물의 세력을 뜻하는 그 깃발을, 나는 화염구를 쏘아 불태워 버렸다.

[적 본진의 깃발을 태웠습니다.]

[유일 등급 칭호 ‘거물을 멸살하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한정효과: 회귀계 거물 사냥 시 보상 극대화 보너스 1회.]

“와아아아!”

적의 진영에서 물자를 옮기던 자살기도회 일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타버리는 깃발을 올려보면서 그들은 다시금 승전의 쾌감을 되새겼다.

“범철! 범철! 범철!”

일원들이 입을 모아 내 이름을 외쳤다.

몇몇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뜨거운 함성까지 내질렀다.

“제발 제게 검을 가르쳐 주세요!”

“거봐, 역시 범철 님이야! 내가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

“윤회수뇌부 따윈 필요 없어! 범철 님만 계시면 이번 삶에서 우리는 반드시 회차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하, 저런.

어쩌면 멸살군주를 제압한 내가 영웅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전혀 익숙하지가 않군.’

회귀자들에게 환호를 받게 되다니.

내가 걸어갈 때마다 일원 한두 명이 설레는 얼굴로 질문을 해왔다.

“1회차가 어떻게 회귀자들 사이에서 칼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나요?”

“재능인데요.”

“대륙지배자 죽이실 생각이시죠?”

“예.”

“1회차로 살면 기분이 어떤가요?”

“엿 같습니다.”

평소라면 성의 있게 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볼일이 있어 귀찮았다.

나는 그들의 뜨거운 관심에 대충 답만 던져주고 내 갈 길을 갔다.

멸살군주의 진영을 나와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협곡을 걷는다.

‘오면서도 봤지만 시체 천지로군.’

본부로 돌아가는 길, 협곡에 쓰러진 시체들이 발에 채도록 많았다.

그러나 참혹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세상이 회귀자투성이가 되어버린 뒤로 시체를 좀 많이 봤어야지.

“이봐, 3조에 기름 좀 더 채워줘!”

“우리 조는 불씨가 한참 부족해!”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시체를 한곳에 모아 불태우고 있었다.

하기야 요새 앞에 시체가 많아서야 경관이 좋진 않을 테지.

위생문제도 있고.

‘미로 같던 바위도 대개는 부서져 나갔고.’

바닥이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평평했다.

난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었다.

최소한 도로공사는 된 셈이군.

‘어디 보자…….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멸살군주의 시체를 찾고 있었다.

그래도 회귀계의 거물이다.

혹시나 진귀한 아이템이라도 주울 수 있을지 모른다.

‘막 죽였을 때는 바로 정신을 잃어서 아이템 챙길 틈이 없었지.’

보상은 빼먹을 수 있을 때 모조리 빼먹는 것이 좋다.

‘전쟁이 끝나고 시간도 꽤 흘렀으니 누가 먼저 수색했을지도 몰라.’

나는 한참을 걷다가 유독 피가 배인 고깃덩이를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멸살군주의 시체였다.

‘……하, 내가 이렇게 심했던가.’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원래 죽여야 할 놈이긴 했다만.

참혹한 시체가 그러하듯 입고 있던 장비도 폐기물처럼 뭉개져 버렸다.

‘이래서야 뭐, 건질 것도 없겠군.’

나는 가만히 시체를 내려다봤다.

‘멸살군주 바르녹.’

유독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비록 나와는 대적했으나 아랫사람을 진심으로 아끼던 상사였다.

전장에서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던 수하들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

나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시체 근처에 뭔가가 반짝였다.

나는 걸어가서 그것을 주워들었다.

사진 따위를 넣어 목걸이에 다는 갑, 로켓이었다.

‘이 로켓, 멸살군주가 목에 차고 있던 거잖아?’

싸우다가 떨어졌던 모양이다.

로켓에서 보호막이 흘러나와 내 칼날을 막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딱히 아이템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도 장비의 효력이 다한 것이리라.

덮개를 열자 로켓에는 작은 그림이 담겨져 있었다.

‘이 사람은…….’

노후한 여인의 초상화였다.

솔직히 말해서 미인이라고 볼 순 없는 그녀였다.

그러나 멸살군주는 이 그림을 로켓에 넣고 소중히 간직해 왔다.

이 여인은 누구에게 웃어주고 있는 것일까?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여인을 한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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