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33화
서걱!
멸살군주의 콧등이 떨어져 나갔고, 왼쪽 뺨이 움푹 베였다.
이런 개 같은!
이마를 노렸는데 놈의 반사 신경이 보통 빠른 것이 아니다.
“그 갑옷, 평범한 장비가 아니군.”
멸살군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할 때마다 찢겨진 뺨으로부터 누런 치아가 드러나 보였다.
놈의 손이 나에게 뻗어왔다.
“내놓아라. 한낱 1회차가 가질 물건이 아니다.”
“엿을 먹어라.”
나는 뛰어오르듯 일어나 칼을 내찔렀다.
그러자 멸살군주는 발등으로 검신을 후려쳤다.
끔찍한 괴력에 손목이 비틀어질 것만 같았다.
“범철! 돕겠습니다!”
암론을 비롯한 자살기도회 일원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멸살군주는 오히려 가볍게 피해 내가 맞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타당탕!
엇나간 화살들이 갑옷으로부터 튕겨나자 녹색의 불꽃이 휘감겼다.
공격받으면 10%의 확률로 소환되는 명계의 잔불!
소유자를 제외한 모든 것을 태우는 불에 놈이 비소를 지었다.
“그래, 그 갑옷이 더더욱 탐나는군.”
“원하면 입혀주지. 네놈 시체한테.”
나와 멸살군주가 동시에 달려들어 맞부딪혔다.
놈이라 할지라도 활활 타오르는 갑옷을 함부로 칠 순 없다.
한 손이 부러진 데다, 나를 향한 공격 범위도 갑옷에 보호되지 않는 손, 발, 머리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수하들을 몸에 각인한 멸살군주는 강대했다.
“네놈을 이기는 것은 나이고, 나를 이기는 것은 세월뿐이다.”
“큭!”
모든 방면에서 칼을 휘둘러 내리꽂고 올려쳤다.
그러나 멸살군주의 팔다리가 나의 칼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휘두른 검이 역으로 튕겨질 때마다 난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굵은 손아귀가 날아들었고, 나는 예상을 하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커헉!”
멸살군주의 손이 나를 잡아채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콰앙!
내 주변 돌바닥에 금이 갔다.
갑옷으로도 머리의 피해는 막을 수 없었다.
뒤통수가 찢어졌는지 축축했다.
“쿨럭!”
“상황이 역전되었군.”
시간이 지나서 갑옷의 불길이 사그라졌다.
멸살군주가 내 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나는 꼼짝하지 못하고 팔만 꿈틀거렸다.
“과연 인정하겠다. 네놈은 이제껏 전생에서 보아온 지금 시점의 범철 중에서 가장 까다로웠다. 그야말로 변수덩어리로군.”
갑옷을 압박하는 힘이 강해진다.
그러나 나는 조금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멸살군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의 뺨을 후려쳤다.
“크흑!”
“엄살 마라. 죽지 않도록 친 것이니.”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입안이 찢겨져 피를 토했고 목이 부러질 듯 꺾였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혼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물의 힘이다. 나조차 이기지 못한 네놈이 대륙 지배자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엿…… 먹어.”
“그래, 네놈의 그 혓바닥과 눈빛만은 늘 마음에 들었다.”
멸살군주가 칼을 몰래 잡으려던 나의 팔을 걷어찼다.
“아악!”
간신히 쥔 칼이 날아갔다.
왼팔이 부러진 것처럼 축 늘어진다.
불멸자의 갑의를 착용하지 않았더라면 팔이 날아갔을 것이다.
“내가 네놈을 바로 죽이지 않는 것은 해줄 말이 있기 때문이다.”
놈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뺨과 콧등이 잘린 멸살군주의 얼굴은 기괴했다.
“네놈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아냐고 물었었다, 범철.”
나는 눈동자에 핏기를 세우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발에 깔려 버린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는 사려 깊게도 발의 압력을 더욱 높이며 담담히 말하였다.
“너로 인해 나의 수하들이 죽었으니, 나도 똑같이 해줘야겠지.”
멸살군주는 찬 눈빛을 보내며 내 이마를 검지로 짚었다.
“네놈은 늘 1회차이니 뭐라도 잃으면 그대로 끝이다. 너의 모든 사람을 죽여서 깨닫게 해주마. 회귀가 계속되길 바라는 나의 심정을.”
놈이 주먹을 높게 쳐들었다.
몇 초 뒤 내 머리가 박살 난다.
죽기 싫지만,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끝난다.
전부.
‘……나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던 바로 그때.
별안간 기분 나빠지는 웃음소리가 귓속에 퍼지는 것이었다.
[화염봉헌팔찌의 내재된 조건이 해금되었습니다.]
[팔찌의 제작자가 접선합니다.]
[미확인된 존재가 당신 꼬락서니를 보며 킬킬거리고 웃습니다.]
***
협곡이 울렸다.
천정에 달린 종유석들이 떨어진다.
일레아흐는 냉철히 상황을 판단하고 명을 내렸다.
“물러나라! 누구도 저 둘의 싸움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히사네가 명령을 전달하자 카티에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왼손이 망가져 있어 기적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요? 대장 혼자 죽게 내버려 둘 셈이에요?”
“성녀시여. 저 둘의 싸움이 우리가 관여해도 될 만큼 너그러워 보입니까? 괜히 걸림돌이나 안 되면 다행이겠군요.”
“됐어요! 나 혼자만이라도 도울 테니까!”
카티에가 입술을 깨물며 날 선 표정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때 가녀린 어깨를 커다란 손이 꽉 잡았다.
소녀는 신경질적으로 거한을 휙 돌아봤다.
“헤르탄! 당신도 나를 막을 셈이에요? 가만히 있을 거냐구요!”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
“일레아흐의 명은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헤르탄이 두 남자를 가리켰다.
그곳에서 위험한 분위기가 달궈지고 있었다.
“우선 물러나야만 합니다. 저 둘의 싸움에 우리들까지 휩쓸릴 테니까.”
***
지금 상황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멸살군주 바르녹은 놈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틀림없이 범철은 죽었어야 했다.
놈이 자신에게 대항할 힘이 없단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바르녹의 주먹이 범철의 손아귀에 막혀 버렸다.
[미확인된 존재가 자기 힘을 빌려 주며 강제 초대를 성사시킵니다.]
[악마의 펜타그램에 ‘미확인된 존재’가 위치 문양을 새겼습니다.]
[잠시 동안 절대적인 명성의 힘을 극소량의 극소량만 빌려옵니다.]
손등의 펜타그램이 찬란히 빛난다.
범철의 왼쪽 손아귀가 멸살군주의 주먹을 꽉 쥐고서 놓지 않았다.
바르녹은 자신이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내가 힘에서 뒤처지고 있다고? 용의 기력조차 태워 버린 내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범철의 손아귀는 가공할 만한 힘으로 바르녹의 주먹을 부쉈다.
“아아악!”
바르녹은 순식간에 한쪽 손을 잃었다.
반면에 범철은 천천히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었다.
온몸이 지옥 불처럼 뜨거웠고 장검은 눈부시게 울부짖고 있었다.
[현재 장비가 절대적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능이 폭주하나 내구력이 매섭게 내려갑니다!]
[영혼의 플랑베르쥬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규합니다!]
[잠시간 검의 상태가 ‘유린의 검, 레페크샤’로 변화합니다!]
눈앞에서 무수한 글귀가 떠올랐다.
그러나 범철은 단 한 문장도, 한 줄도, 한 글자도 전혀 읽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당황스럽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화염봉헌의 팔찌는 과거 자신을 죽이려던 회귀자에게서 뺏은 것이다.
그런데 그 팔찌에 내재된 조건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해금되다니.
‘펜타그램은 또 왜 빛나는 거고.’
범철은 혼란스러웠으나 지금은 칼자루를 꽉 쥐는 수밖에는 없었다.
플랑베르쥬가 희푸르게 빛나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쏟아내고 있었다.
‘각성!’
칼의 각성은 이계에서조차 명검들 사이에서만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
그런데 플랑베르쥬가 알 수 없는 힘을 빌려 갑작스레 각성한 것이다.
‘멍하니 보낼 시간 따위는 없다.’
당황스러웠으나 침착해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칼날에 생겨난 실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자칫하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칼의 내구력이 완전히 다할 것이다.
“네놈…… 무슨 짓을 벌인 거지?”
바르녹이 으깨진 손목을 내리곤 범철을 노려보았다.
범철은 입술의 피를 살짝 핥았다.
“이제부터 함께 알아가야지.”
두 남자는 호흡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서로에게 뛰었다.
“커헙!”
칼이 코앞에 다가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바르녹은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어지간한 쇠 따윈 깨부숴 버리던 주먹이 놈의 칼로 단숨에 찢겨졌다.
스쳐 베인 왼쪽 뺨의 치아가 깨지고, 바닥을 거칠게 구른다.
“이런……!”
욕설을 뱉으며 일어나려던 순간.
그의 턱을 범철의 칼이 올려친다.
‘어느 틈에?’
바르녹은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턱 끝이 잘려나가며 얼어버리자 이를 악물며 주먹을 굳세게 올려쳤다.
그러나 범철은 그의 반격 따위는 우습게 회피해 버린다.
‘방금까지와 격이 다르다.’
놈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힘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범철은 조금 전보다 움직임이 훨씬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영민해졌다.
‘도대체…… 뭐지?’
바르녹은 갑작스레 증폭된 적의 힘과, 그러한 힘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는 범철의 재능이 두려웠다.
피는 흐르고 피로는 더해진다.
‘제기랄. 상처가 벌어지고 있다.’
마침내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 상황에서 승산이 없단 것을.
바르녹은 싸움을 미루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상대가 허락하지 않았다.
퍼걱!
부서져 가는 칼날이 벼락처럼 바르녹의 정수리를 내리꽂는다.
“커헉!”
멸살군주가 고꾸라지며 넘어지고 돌바닥이 부서진다.
칼날이 조각 나버려 즉사는 면했으나 머리 일부가 얼어붙고 말았다.
그 탓인지 활동이 크게 느려졌다.
‘쓰, 쓰러져선 끝장이다. 곧장 일어나야……!’
그러나 범철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퍼억! 퍽! 퍼억!
부서진 칼자루 따윈 내다 던지고 발로 바르녹을 힘껏 짓밟는다.
주걱뼈를 부수고, 복사뼈를 박살 내고, 다리뼈를 아작 낸다.
범철은 차분히 그를 때려 했다.
‘싸움은 막싸움이 최고라지.’
“카, 카어헉!”
협곡이 울리며 종유석이 떨어진다.
그 멸살군주가 피를 토하며 사납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범철은 실소조차 짓지 않고서 등뼈를 후려갈겼다.
우드득!
척추가 아스러진다.
“아아악!”
엎치락뒤치락하던 형세가 완전히 범철에게 넘어왔다.
농락籠絡!
범철은 피비린내 나는 혈투에서 완벽한 우위를 점하였다.
일방적인 승부였다.
감히 그의 앞에서 바르녹은 손끝 하나 반항할 수가 없었다.
퍽! 퍼억! 우드득!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범철은 죽어야 할 적 앞에서는 핏물로 칠갑을 한 맹수처럼 잔혹했다.
쓰러진 바르녹을 계속 짓밟고 내려치며 으스러뜨린다.
“크헉……!”
수하를 흡수한 바르녹의 생명력은 강대하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그는 질긴 생명력 탓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범철의 폭행은 회귀자가 감내하는 통증을 아득히 넘어선다.
회귀하면서도 이토록 고통스러운 순간은 손에 꼽았다.
“차, 차, 차라리 끝을 봐라……! 개 자식…….”
머리끝까지 피를 흠뻑 뒤집어썼어도 범철은 멈추지 않는다.
시신마저 뼛가루로 빻아버릴 것처럼 주먹을 지독하게 내려친다.
눈알은 광기를 담았고 주먹은 독기를 품었다.
“어억!”
멸살군주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멸死滅의 공포를 느꼈다.
눈물이 흐르던 눈알이 터져버린다.
이빨이 박살 나고 잇몸에서 피가 흐른다.
기어코 죽음에 대한 경각심보다 눈앞의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공포심이 훨씬 커졌다.
“제, 제발 죽여라, 제발……!”
마침내 그 멸살군주 바르녹이 범철의 앞에서 자존심을 접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주름진 손아귀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것은 회귀한 거물로선 상상조차 불가한 애처로운 목숨 구걸이었다.
범철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입을 열었다.
“왜 회귀자는…….”
“으, 으으…….”
“고통스레 뒤질 때만 인간다울까.”
“아아아악!”
회귀자 살해의 재능!
지독한 폭행이 끔찍하게 지속됐다.
결국 바르녹은 회귀해오며 가장 사정없고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콰자악-!
범철의 주먹이 바르녹의 머리뼈를 부숴 버린다.
한낱 유언조차 남길 새도 없었다.
바로 이곳에서 멸살군주는 전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회귀계의 거물, 멸살군주 바르녹의 군세를 완전히 처치했습니다!]
[멸살군주를 직접 죽였습니다.]
[적의 본진의 깃발을 가져와 태우면 유일 등급 칭호를 얻게 됩니다.]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압승을 거둬 모든 능력치가 3씩 오릅니다.]
[피를 쏟는 파멸의 망토 효과로 능력치 성장 효율이 증대합니다.]
[체력이 1 추가로 올랐습니다.]
바르녹은 완전히 사망했다.
범철은 털썩 주저앉아 증폭된 힘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다잡았다.
그러나 듣지 못하였다.
범철은 기진하며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