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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31화 (31/200)

나만 1회차 031화

박쥐 떼가 협곡 바깥을 가로지른다.

소년병은 그 편대비행의 꽁무니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천정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할 녀석들이 왜 나올까.

“어서 일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게냐.”

“아, 군주님!”

멸살군주 바르녹은 간편한 복장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소년병이 당황하자 그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네가 다른 회귀자들의 노동을 따라가려니 힘겹겠지.”

소년병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년은 바로 이전 삶, 119회차에서 영혼을 바쳐 신병으로 영입되었다.

원래부터 폐병을 앓고 있었고, 사망일은 회귀 시점 한 달 후였다.

그래서 지금껏 살아온 기간도 10년가량.

여타 회귀자들에 비해 무척 짧았다.

‘그조차도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삶이었어.’

남들이 회귀 후 일생을 살아갈 때, 소년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시한부로서의 한 달에 불과했다.

지독히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서 떠돌 때 바르녹과 마주쳤다.

멸살군주에겐 이미 일천이 넘어가는 병력이 있었다.

일생에 수하로 둘 수 있는 숫자도 10명으로 한정된다고 했다.

소년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는 회귀자 멸살로 악명이 자자한 거물이었다.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시한부를 구제해 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바르녹은 소년병을 수하로 들여서, 폐병을 낫게 해줬다.

‘어째서 날 선택하셨을까. 나는 무엇 하나 잘하는 것도 없는데.’

바르녹은 습격을 지휘할 땐 악마처럼 무자비한 군주였다.

하지만 때론 친할아버지처럼 자상했고, 짓궂은 농담도 던졌다.

직접 옷깃을 찢어서 다친 수하의 상흔을 지혈해 준 적도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군주님.’

‘너희의 반항심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하다. 갚지 마라.’

수하들은 친우처럼 벽 없이 그를 따랐다.

소년이 본 멸살군주는 익히 악명으로 알려진 인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남들에겐 비정해도 자기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지도자였다.

“따라 오거라. 피트. 너는 오늘 나의 시중을 들 것이다.”

바르녹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소년병은 멸살군주가 자신을 배려해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보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놀랐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나요?”

“나는 나의 사람을 잊은 적이 없다.”

영혼을 바친 수하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피트는 본능적으로 군주의 뒤에 따라붙었다.

한참을 걷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수하가 걸어와 경례했다.

“그래, 진격이 지연되고 있다고?”

“군주님. 그것이…….”

“됐다. 굳이 너희에게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겠구나.”

피트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멸살군주 세력은 미로 같은 협곡을 부수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원래라면 내일쯤이면 본부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아가야 할 방향에 커다란 생물이 잠들어 있었다.

“흡……!”

피트는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르렁거리며 숨을 쉬는 생물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아주 멀리서 보이지만 그 크기가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용이잖아.’

등이 따가울 만큼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떨렸다.

용의 콧바람 한 번이면 피트쯤은 단숨에 날아가 버릴 것이다.

수하가 저편에서 잠든 용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 회차가 그렇게 진행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용을 증원해 복병으로 불러들였는지 의문입니다.”

눈썹을 찡그리고 목걸이의 로켓을 매만진다.

이것은 예상 못 한 변수였다.

바르녹은 회귀자가 그러하듯, 변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적측에 용을 길들인 작자가 있나?’

곧바로 바르녹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어떠한 회귀자도 성공해 내지 못한 업적이다.

그럴 만한 인물이 자살기도회 본부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잠자는 용을 함부로 깨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다들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자니 나아갈 수도 없어 난감한 상황입니다.”

“비늘이 없다.”

“예?”

“아직은 어린놈이야. 세월을 적시지 않았어. 그러하면 방법이 있지.”

손을 천천히 들자, 수많은 수하들이 모여들었다.

바르녹은 싸늘한 눈빛으로 잠자는 용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저 용을 치워야겠다. 모두 내 지시를 들어라.”

***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마라.

하지만 잠자는 용에 관한 격언은 없다.

용을 함부로 깨운 자들은 모두 죽었기에.

퀸소히니베는 용이 그러하듯, 깊이 잠자기를 좋아했다.

둥지에서조차 그녀가 잠이 들면 노예들은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녀를 기분 좋게 깨우는 것은 어머니의 달콤한 숨결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함부로 그녀의 잠을 깨우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회귀자들에 의해 바뀌었다.

곤히 자던 그녀는 대가리에서 따끔한 감촉을 느꼈다. 지독한 불쾌감을 느끼며 퀸소히니베는 거칠게 눈을 떴다.

“지금 누가 감히 고귀한 용의 수면을 방해한 것이야!”

뿔 근처로 그녀에겐 바늘만큼 미세한 화살이 꽂혀 있었다.

용은 어지간한 소음에 잠이 깨지 않는다.

그러니 일부러 그녀를 깨우기 위해서 이랬다는 것이리라.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말을 걸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소.”

활을 든 남자가 우두커니 혼자 서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침착히 말했다.

“나는 바르녹 런델라르요. 부디 그곳에서 비켜주시길 부탁하오. 단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은 우리 군의 진로를 막고 있소.”

멸살군주 바르녹의 말투는 굉장히 정중했다.

그러나 퀸소히니베는 같잖은 연기에 코웃음 칠 뿐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네 수하들이 숨어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이야?”

“어린 것이 아주 바보는 아니로군.”

“뭣이야?”

“나와서 용을 덮쳐라!”

암반 밑에서 잠입하고 있던 수하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후방에서 마법과 화살로 용을 사격하고, 전방은 돌격한다.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은 힘의 병력이 그녀를 집중 공격했다.

“이 우둔하고 나약한 것들이-!”

퀸소히니베는 격노를 담아서 포효를 쏟아냈다.

한낱 인간이 단잠을 깨웠단 사실만으로도 미친 듯이 화났다.

단 한 놈들도 살려둘 생각이 일절 없었다.

“저 멍청한 용을 찢어발겨라.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바르녹이 냉소를 머금고 명령했다.

용과 천 명이 넘는 회귀자 군세.

과연 최후에 이기는 것이 어느 쪽일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이기겠군.’

바르녹은 전세를 보고서 예상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카아아악-!”

용이 거세게 포효했지만 누구 하나 떨지 않았다.

멸살군주의 수하들은 본능적으로 명령에만 복종한다.

바르녹은 거세게 소리쳤다.

“용의 포효는 무시해라!”

절대복종하는 수하들은 사기가 꺾이는 법이 없었다.

용의 몸에 수천 개의 화살이 꽂히고, 칼이 살점을 도려냈다.

기백의 수하들이 가서 때리자 피가 흐르고 멍이 들었다.

‘비늘이 없으니 저런 공격조차 튕겨내질 못하는군.’

용은 강대한 종족이다.

그러나 바르녹은 전생에서 용의 습격에 대항해본 경험이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저 어린 용은 하수에 불과했다.

‘아직 어려서 힘을 쓰는 방법을 몰라. 육신도 마른 편이고.’

노해서 발톱과 꼬리를 휘두르지만 동작이 일관됐다.

몇 번 당하고 나자 병력의 피해를 충분히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난동만 부려댈 뿐이다.

‘무엇보다 브레스를 내뱉지 못해. 몹시 치명적이지.’

용이 내뱉는 브레스는 광범위하게 생명체를 즉사시켜 버린다.

그러나 이 용은 브레스는커녕 불씨 하나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저 용이 풋내기에 불과하다는 방증이다.

물론 아군에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용이 한 번씩 후려칠 때마다 수십의 병력이 휩쓸려 죽어버렸다.

그러나 손실되어가는 병력을 감안해도, 이길 수 있다.

‘너의 화력은 위대하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바르녹은 회귀자다.

지금껏 겪어본 전쟁만 수백 번이 넘었다.

눈앞의 용은 비록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넘겨낼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 변수를 내가 이용할 수 있겠군.’

바르녹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범위를 계산했다.

화살과 마법의 화력을 높이고, 전방의 돌격 병력을 더 늘렸다.

그러자 병력의 손실이 커졌지만,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용은 협곡의 자잘한 바위를 부수며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싸움이 오래되자, 퀸소히니베는 멸살군주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뒤를 돌아볼 새조차 없어서 금방 눈치채지 못했다.

꼬리에 닿는 감촉에 눈을 힐끗 돌리자, 그곳엔 요새가 있었다.

그는 용과 싸우며, 본부로 통하는 길로마저 뚫어버린 것이다.

용의 변수가 오히려 내일 있을 본부로의 진격을 앞당겨 버렸다.

병법서술가들이 보았다면 달필을 쉼 없이 써 내렸을 지휘였다.

그러나 바르녹은 오만하지 않았다.

풋내기라도 위험성 많은 용은 살려 두면 안 된다.

“끝내라.”

땀과 피로 지쳐가는 수하들이 마지막 혼신의 일격을 퍼부였다.

퀸소히니베의 몸에 박힌 화살과 쇠붙이가 수천에 달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눈앞이 파르르 흔들렸다.

“허억……!”

모든 기력을 잃은 용이 대가리를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멸살군주의 세력이 한 팔을 들어 올리며 승전의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멸살군주의 앞에 무릎을 꿇어라!”

병력의 절반가량을 손실했지만, 값진 승리였다.

오백의 수하들로도 본부를 집어삼키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바르녹은 열기가 식을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가 외쳤다.

“보아라! 저 용의 모습이 너희가 맞이할 이번 삶의 최후이다!”

그러나 요새는 조용했다.

누군가 탄식을 터뜨리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자살기도회 본부는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 어째서?’

바르녹이 의문을 품고 미간을 찌푸리던 찰나.

쓰러진 용에게 다가가는 작은 형체가 보였다.

‘저건……?’

눈동자를 가늘게 뜨자 형체가 뚜렷해졌다.

그 순간, 바르녹은 이를 악물고 불같이 소리쳤다.

“저 빌어먹을 계집년이! 쏴! 쏘라고! 어서, 저년을 죽여 버려!”

수하들이 다급히 활을 들었다.

그러나 용의 거구에 절묘하게 가려져 화살을 목표에 맞히지 못했다.

카티에는 피에 젖은 살갗에 양손을 대었다.

그러자 끔찍한 빛이 용의 몸을 휘감았다.

“어서 일어나 뒈질 때까지 싸워요. 말라깽이 도마뱀.”

“저것들 다음에는…… 네년부터 쳐죽일 것이야.”

[성녀가 기적을 발휘했습니다!]

[용의 모든 생명력이 회복되며 저주가 깨끗이 사라집니다.]

[살갗에 파고든 이물질이 소멸됩니다.]

끔찍한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퀸소히니베의 몸에 꽂힌 화살촉과 쇠붙이가 빛에 사그라졌다.

용이 완전히 회복하여 불타는 눈동자로 몸을 일으켰다.

“마, 말도 안 돼!”

“서, 성녀가 저놈들 편에 붙어 있었단 말이야?”

지금껏 병력을 손실하며 이끌어온 싸움은 허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요새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와아아아!”

자살기도회 일원들이 함성을 내뱉으며 요새를 뛰쳐나왔다.

완벽히 출정을 준비한 적들이 전투로 지친 수하들을 척살했다.

누가 소환했는지 적들에겐 7인의 유령기사단까지 섞여 있었다.

흥분 속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은 잊혀진 지 오래였다.

퀸소히니베가 적진에 뛰어들며 전장을 휩쓰는 포효를 터뜨렸다.

“너희를 모조리 살육해 버리겠다-!”

순식간, 정말 순식간이다!

조그만 변수들이 모여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버리고 말았다.

‘제기랄!’

용이 연기해 일부러 이곳까지 그를 유도했을 리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진즉에 자신이 눈치를 챘을 테니까.

도대체 누가 이런 변수를 꾸몄단 말인가?

“물러…….”

바르녹이 다급히 퇴각 명령을 내뱉으려던 찰나.

불현듯 뒷목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커, 커헉!”

목을 쥔 힘에 숨조차 똑바로 쉴 수 없었다.

바르녹의 눈에 핏기가 섰고, 몸이 허공에 뜨는 것처럼 올려졌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목에 맞닿았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못 채줘서 고맙다. 그러니 죽어라.”

‘이, 이 목소리는…… 설마?’

전생에서 분명히 들어본 목소리였다.

회귀자 가득한 세상에서 칼의 정점에 올랐던 1회차!

하지만 지금 그가 무슨 수로……?

감히 대응할 틈조차 없었다.

목에 닿은 칼이 올려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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