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30화
‘왜 회귀는 멈춰져야만 하는가.’
바르녹 런델라르는 보호마법이 걸린 로켓(Locket)을 딸깍여 열었다.
그는 매 삶마다 회귀자들에게 그것을 되묻곤 한다.
너희는 어째서 회귀를 멈추려 하는가.
‘삶이 지겨워서인가. 죽음에 이끌려서인가.’
거의 모든 회귀자가 1회차를 잊어 버렸다.
그러나 바르녹은 달랐다.
그에게 첫 번째 삶의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했다.
나의 첫 인생은 어리석고, 알량했으며, 우둔했다.
그것이 전생의 자신에게 내린 객관적인 평가였다.
바르녹은 푸줏간의 주인이었다.
가난하며, 글도 읽을 줄 몰랐고, 신분마저 천했다.
유일한 재주는 가축을 도축하고, 그 고기를 써는 일이었다.
‘멸시받으면 자신을 싫어할까 봐 화를 삭였고, 자신감이 부족해 먼저 약속을 잡을 용기조차 없어서 지인이 많지도 못했다.’
너무 흔하고, 그래서 하찮은 삶.
그러나 그 머저리에게도 쥐뿔만 한 행운은 있었다.
자기껍질을 휘황찬란한 색채로 덧칠해 꾸며서 여자와 결혼했다.
‘무능력한 남편만큼이나 열등한 계집년이었다.’
딱 머저리에게 어울리는 수준의 여자였다.
그녀 또한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셈이 서툴러 자주 실수했다.
어떤 날은 은화의 수량을 착각해 하루 장사를 망치기도 했다.
하물며 외모까지 형편이 없었다.
‘거기다 아이도 없었지.’
부부는 50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다.
문제가 있던 것이 머저리였는지, 여자였는지는 확실치 못했다.
다만 남들이 건실히 키운 자식을 자랑할 때 소외당할 뿐이었다.
‘딱 한 가지는 좋았다.’
그 여자는 참 잘 웃었다.
언젠가 단둘이 팔짱을 끼고 호숫가로 놀러 갔던 하루가 있었다.
평소에 먹고살기 바쁜 터라 모처럼 휴가를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머저리의 계획을 망쳐버렸다.
먹구름이 노해 비가 몰아치고, 호수는 흙탕물처럼 탁해졌다.
‘비가 그칠 때까지 저 나무 아래서 쉬어가자.’
멍청한 부부는 편백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용케 꽃잎을 간직하는 들꽃이 무성했다.
그러나 머저리는 휴가를 망쳤다는 초조함에, 그녀의 동그란 귓가 옆에 은방울꽃 한 송이 꽂아줄 발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불현듯 젖어 있는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손이 차갑잖아. 바르녹.’
그녀가 머저리의 차디찬 손을 감싸 쥐고 웃었다.
모처럼의 휴가를 망쳤는데 웃어주는 그녀가 이해 가지 않았다.
비에 젖은 코가 반들거리고, 작은 눈이 별처럼 빛났다.
모든 것이 최악인 날, 그녀는 자신에게 미소 지어줬다.
그 미소가 몇 년 치 장사해 버는 돈보다 아득히 값졌다.
그러나 머저리는 머저리였기 때문에 그 귀중함을 자각 못 했다.
‘그녀가 강에 빠져서 죽은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징검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강물에 휩쓸려 버린 것이 사인이었다.
머저리는 의미 없는 눈물만 며칠 짜내고, 장사를 지냈다.
그렇게 그냥 죽을 때까지 살다가 뒈졌고, 회귀하게 되었다.
눈을 떠보니 과거였다.
세상이 혼란에 빠졌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은 분명했다.
머저리는 죽었던 아내를 찾아서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습게도 회귀 시점은 계집년이 죽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회귀해도 그녀는, 너는 여전히 죽어 있다.
그제야 머저리는 그 계집년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단 걸 알았다. 과거로 돌아와도 그녀까지 돌아오진 않는다.
그 여자가 없으면 새로이 살아가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머저리는 땅에 이마를 처박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면 뭐든 할 텐데.
딱 하루만 더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그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을 텐데!
머저리는 절망했고, 그 후로도 여러 삶을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회귀한다 한들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무의미한 삶만을 반복할 때.
머저리는 자신에게 독보적인 능력이 생긴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일생에서 10명의 영혼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영혼을 빼앗긴 인간은 신체에 활기를 얻는다.
눈동자에 검은자가 없어지고, 육체 능력이 인간을 넘어선다.
거기다 무슨 말이든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부하가 되는 것이다.
‘고작 일생에서 10명의 숫자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놀랍게도 획득한 영혼의 수는 과거로 돌아가도 ‘유지’가 되었다.
10명의 수하를 거느리다가 죽어서 회귀하면, 그 영혼들이 그대로 손에 있었고, 그 삶에서 또 10명의 영혼을 뺏을 수가 있었다.
즉, 회귀할 때마다 부하를 10명씩 늘려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머저리는 매 삶마다 10명의 영혼을 손에 넣었다.
영혼을 가져오는 조건은 몹시 까다로웠다.
진정한 친우를 사귀어 자신에게 영혼을 바치게끔 마음먹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괴악한 조건이 머저리의 인생을 바꾸었다.
‘열심히 살아가며 친우를 얻었고, 새로운 인연들을 맺었다.’
회귀자들 사이에서도 병자들이 존재한다.
과거로 돌아와도 평생 앉은뱅이거나 몸의 힘줄이 끊긴 사람들.
머저리가 영혼을 손에 넣은 부류는 주로 사회에서 소외된 무리였다.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들과 그는 거리낌 없이 친우가 되었다.
‘그들을 설득해서 영혼을 바치게 했고, 병사로 만들었다.’
친우들은 그에게 영혼을 봉헌했고, 장애의 한계를 극복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싸워 나갔으며, 때론 그들과 같이 울었다.
그가 선해서 좋은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
절망한 머저리가 열성적으로 재기할 수 있던 동기는 간단했다.
‘다시는 나의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
머저리는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서 악惡을 택하였다.
휘하에 거느린 병력의 숫자가 100명을 넘겼을 때.
그는 회차목표를 이루려는 회귀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우리가 뭘 했다고 회차마다 습격하는 겁니까?
-이 빌어먹을 회귀를 멈추고자 하는 게 뭐가 잘못됐다고?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머저리는 그런 말 따윈 무시하고 회귀자들을 거침없이 죽였다.
모든 회귀자가 그를 증오하고, 악명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별것 아니었지만 회귀할수록 그의 세력은 거대해졌다.
‘과거로 돌아와도 유지되는 능력’을 가진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회귀할수록 강해지는 극소수의 여섯 회귀자들.
언젠가부터 자신을 포함한 이들은 ‘거물’이라 불렸다.
그렇게 어느덧 120회차.
멍청한 푸줏간 주인이던 그 머저리는 약 1,100명의 수하를 거느리고서 요새로 진격하고 있다.
딸깍.
머저리는 간이침대에 걸터앉아서 로켓을 닫았다가 도로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것을 보았다.
그때 천막 밖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님. 출정하실 시간입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알았다. 곧 나가지.”
딸깍.
로켓을 닫는다.
천막 안은 어두웠다.
공허한 어둠을 보면서 바르녹은 생각했다.
‘남들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별이 증오스러웠다.
헤어지고서 혼자 남은 자의 고독함을 아는가.
바르녹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사별이 싫었고, 죽음이 미웠다.
‘절대 누구도 죽어선 안 돼. 내 사람만은.’
바르녹은 처음에 영혼을 뺏은 부하들을 도구로만 여겨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녀석들이 가슴에 흘러들었다.
‘나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회귀가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이 확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자 바르녹은 ‘죽음’이 더욱 증오스러웠다.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 때문이 아니다.
또다시 이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못난 계집년처럼, 내 사람이 헛되이 죽도록 되풀이하지 않겠다.’
그러니, 자그마한 가능성조차 멸살滅殺할 것이다.
바르녹은 천천히 일어섰다.
오십 후반의 육체는 젊은 날에 비하면 녹슨 톱니바퀴 같았다.
정정한 편에 속했으나 다리는 삐걱거리고 허리에선 불협화음이 인다.
‘세상은 반복되어야만 한다. 영원한 죽음이 없도록.’
천막을 걷자 협곡의 웅장함이 눈에 들어왔다.
천 명이 넘는 수하들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르녹은 단상처럼 드높은 암반의 정중앙에 섰다.
“그 누구도 회귀를 멈추게 두지 않을 것이다.”
연설은 늘 간결하고 짤막하다.
이윽고.
바르녹이 양팔을 펼치고 크게 외쳤다.
“나아가라, 너희야말로 나의 진정한 모든 것이다.”
“와아아아!”
허연 눈의 수하들의 함성이 협곡 가득히 울려 퍼진다.
세상은 바르녹을 멸살군주라 일컫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죽지는 않았군요.”
자살기도회 본부 회복실.
헤르탄이 문을 열고서 들어왔다.
나는 이마 위에 올려둔 물수건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암론.”
“아뇨.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더 말씀하세요.”
암론이 눈치 있게 환자실에서 나갔다.
단둘이 남게 되자, 헤르탄은 산야초를 내밀었다.
“씀바귀입니다. 씹으면 정신이 좀 날 겁니다.”
“…….”
보통은 무쳐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쓰디쓴 씀바귀를 씹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 본부는 특이한 곳이군요. 본부장만 봐도 그래요.”
“일레아흐는 성격은 추하지만, 능력은 확실한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걱정되기도 하는군요. 그 히사네란 여인이 수족처럼 도와주긴 하지만 아기의 여린 몸으론 위험한 일이 많을 텐데.”
“히사네는 블라이넨과 맞섰던 권사입니다. 육아 또한 격투만큼 뛰어나 그녀에게 걱정은 불필요합니다.”
블라이넨.
나와 비견되는 칼솜씨를 가졌다는 황색대륙의 회귀자였다.
그때 나는 물어봐야 할 것이 떠올랐다.
“퀸소히니베는요?”
“성벽 위에서 혼자 웅크려 있습니다. 범철이 올라오지 않으면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럼 카티에는?”
“방금까지 울다 지쳐 쓰러졌습니다. 방탕한 범철을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며 하소연했지만 회귀한단 사실을 깨우쳐주자 포기하더군요.”
“…….”
뒷말은 차라리 안 듣는 것이 나을 뻔했군.
헤르탄이 의자에 앉고서 말했다.
“그보다 저는 걱정이 앞서는군요.”
“어째서 말입니까?”
“용은 중립을 크게 어기면 힘이 제한됩니다. 특히 어린 용은 심하죠.”
태생부터 용은 중립에 서야 한다.
그것은 종족으로서의 본능이다.
“그녀는 이미 상당 시간을 우리와 함께했습니다. 이번 전투까지 무모하게 싸우게 된다면 용으로서 커다란 제약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용이잖습니까? 제약을 받아봤자 그렇게까지 심하겠어요?”
“아직 비늘이 돋질 않았으니까요. 수많은 면에서 취약할 겁니다.”
“하, 그렇습니까?”
“비늘은 용이 성체가 되었다는 증거이자 정체성입니다. 어느 빛깔의 비늘이 돋아났느냐에 따라 일생의 위용과 권능이 결정되니까요.”
나는 창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느새 저녁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날이 꽤 저물었군요. 저는 그만 성벽에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아주 예민한 상태니까요.”
나는 회복실을 나와서 계단을 올랐다.
성벽 위에는 수많은 일원들이 술렁이며 모여 있었다.
보안대 대장 디코브가 나를 보며 반갑게 소리쳤다.
“아, 드디어 오셨군요! 이봐, 다들 여길 보라고! 범철 님이 오셨어!”
호기심 많은 일원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첫인상과 상반되게 디코브는 나에게 굉장히 살갑게 굴었다.
“아니,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신분을 밝히셨으면 진즉 귀빈 대접을 해드렸을 텐데. 아니, 아무튼 저 몹쓸 용이 아까부터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범철 님만 찾아대지 뭡니까.”
이름 하나 밝혀졌다고 대접이 천지차이로군.
나는 귀찮아서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걸어갔다.
용은 사람들과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혼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야.”
내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퀸소히니베는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네놈은 아주 앙큼한 인간인 것이야.”
“헷갈리게 말해준 나의 잘못이 크다만, 그렇다고 성벽에서 밀어 떨어뜨릴 것까진 없지 않았냐.”
자자고 속삭인 순간 퀸소히니베는 나를 힘차게 밀어버렸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날이 긴 플랑베르쥬를 벽에 꽂지 않았다면 추락사했을 것이다.
“노예는 주인의 육신을 탐할 수 없어. 함께 새끼를 만들 자격도 없지. 네놈은 내 기대를 배반한 것이야.”
“뭐, 나한테 기대라도 해줬다니 고맙다.”
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내가 자자고 말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인 것이야?”
“섹스하자는 게 아니었다고, 인마.”
퀸소히니베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성벽에서 떨어지는 경험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으며 말했다.
“너희 용들은 잠잘 때 깨우면 화나서 전부 휩쓸어버린다면서?”
“그 누구도 잠자는 용을 감히 깨울 수 없지.”
“그럼 잠을 방해한 피라미들을 뭉개버리는 것은 중립에 전혀 위반되는 행위가 아니겠군.”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야?”
퀸소히니베는 본인도 헷갈린다는 눈치였다.
하기야 중립이란 말이 얼마나 애매하단 말인가.
나는 멀리서 보이는 멸살군주 세력을 가리켰다.
“저기, 내가 아늑한 잠자리 맡아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