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29화
“이대로 자살기도회 본부까지 가는 겁니까?”
“본부 3층 홀로 가겠습니다. 멸살군주가 아직 본부 근처까진 병력을 뻗치지 못했다고 했으니까요. 본부 안쪽은 지부장의 독단적인 판단으로만 갈 수 있으니 안전할 겁니다.”
포석이 일순간 진동했다.
풍경이 어그러지며 주위가 흙탕물처럼 뒤엉켰다.
으윽, 어지러워 죽겠네.
‘이곳은……?’
어느덧 눈앞의 광경이 바뀌어져 있었다.
우둘투둘한 석조로 이뤄진 실내.
처음 보는 병사들이 수십 개의 창과 활을 우리에게 겨누고 있었다.
***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암론은 말까지 더듬이며 당황했다.
“어, 음. 제, 제가 기억하던 것보다 경계가 삼엄하네요.”
“저들은 눈알이 희지 않다. 도끼를 내려라.”
턱수염을 기른 중년이 말했다.
그러자 똑같은 군복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무기를 내렸다.
“나는 자살기도회 본부 보안대 대장 디코브다. 혹시나 멸살군주가 지부장을 협박해 포석을 악용할 것을 대비해 경계 중이었다.”
디코브가 뒷짐을 지고서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낯이 익군. 전생에서 봤었던가? 신분을 밝혀라.”
“크레스 시 지부장 암론 아그넨입니다. 근황 보고하러 왔습니다.”
“촌구석 출신이군. 전부 다 자살기도회 일원인가?”
“아뇨. 이분들은…….”
“외부인이란 말인가?”
디코브가 눈매를 매섭게 세웠고, 무기들이 다시금 겨누어졌다.
나는 눈동자를 좁히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때 헤르탄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일레아흐 본부장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본부장님을? 그분께 감히 무슨 볼 일이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과거의 왕이 돌아왔다고 하십시오. 그녀는 알아들을 것입니다.”
***
자살기도회 본부는 실용적인 외관이었다.
번듯한 최소한의 장식조차 없고, 구조까지 단순하다.
기백은 될 법한 회귀자들이 본부 내부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본부에선 보통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평소에는 황색대륙 지배자를 죽이기 위한 연구, 조사, 원정 따위를 합니다. 다만 지금은 본부를 수비하느라 다들 바빠 보이네요.”
암론을 비롯한 크레스 시 일원들은 근황 보고를 하러 갔다.
그래서 나, 카티에, 헤르탄, 퀸소히니베는 본부장실로 안내받게 되었다.
나는 본부가 돌아가는 광경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제멋대로인 회귀자들을 이렇게 완벽히 단합시킬 수 있다니.’
자살기도회 본부장은 수준급의 지도력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번 회차도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다.
이들과 함께한다면 아크 리치를 죽일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한편 카티에는 여러 곳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퀸소히니베를 쏘아봤다.
“한눈팔지 말고 제대로 따라와요. 말라빠진 도마뱀.”
“네년의 말투는 나를 상당히 자극하고 있어.”
“흥. 날 죽이면 대장이 당신을 따라가기나 할 것 같아요?”
“하, 네년은 앙칼스러운 계집애인 것이야.”
어떨 때는 기 싸움이 칼싸움보다.
매섭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여간 우리는 본부장실로 안내받았다.
퀸소히니베는 털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어색해했지만 나를 따라서 얌전히 기다릴 눈치는 있었다.
끼익.
풍채가 좋고 매서운 인상의 검은 단발 여인이 문을 열고서 들어왔다.
한창 육아 중인지 그녀는 귀여운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일부러 살갑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일레아흐 본부장님. 따님이신가요? 아주 귀엽습니다.”
“과연 상당히 실례되는 말씀부터 내뱉으시는군요. 전하.”
여인의 품에 안긴 우윳빛 피부의 아기가 차갑게 옹알이했다.
나는 충격받아서 말을 잇지 못했다.
헤르탄은 시선을 자신의 팔짱 낀 손에 고정하고서 말했다.
“오랜만이군. 일레아흐.”
그러자 젖살도 안 빠진 아기가 찬웃음을 흘렸다.
“네놈의 개뼈다귀 면상도 여전하구나, 헤르탄.”
“이번 삶의 기저귀는 부디 빠르게 졸업하길 바라지.”
“연초는 끊었냐? 한동안 모자람 없이 태우더니.”
“가슴이 아파서 단명한 뒤론 손이 안 가더군.”
“부디 피워라. 어서 죽도록.”
여인이 아기를 감싼 포대기를 가슴 위로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갈색 머리 아기의 눈높이가 나의 시선과 딱 맞았다.
옹알이지만 발음이 신기할 만큼 또렷했다.
“하여간 다시 뵙니다. 전하, 아니, 이제는 범철이라고 불러야 맞겠지요. 과거 당신을 보좌했던 일레아흐 에베콧이라고 합니다.”
자살기도회 본부장 일레아흐는 놀랍게도 갓난아기였다.
***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회귀 시점에서 어린아이였던 회귀자들도 봤었으니까.
그런데 설마 자살기도회 지도자가 아기였을 줄이야.
퀸소히니베는 질투 담긴 눈빛을 보내며 내 어깨를 찔렀다.
“인간의 새끼들은 원래 저렇게 말을 잘하는 것이야? 내가 새끼용이던 시절보다 훨씬 우수하잖아.”
“다들 저러진 않지.”
나는 표정관리를 하고 입술을 핥은 뒤 말했다.
“당신이 전생에서 저를 보좌해 주셨단 말입니까?”
“저와 저기 저 덩치는 범철이 세운 국가의 건국공신이었습니다.”
일레아흐가 짤막한 주먹을 삐죽 내밀어 헤르탄을 가리켰다.
“뭐, 결국 다들 발정 난 들개들처럼 다투다가 망했지만요.”
상당히 말투가 신랄하시군.
귀엽게 옹알거릴 것만 같고 천사처럼 맑은 눈을 가진 아기가 저렇게 시니컬하니 영 적응이 안 된다.
카티에게 나에게 속삭였다.
“일레아흐는 대장을 도운 건국공신들 사이에서도 최연소로 손꼽히는 영재였어요. 매 삶마다 아기의 몸이지만 수장으로서 자살기도회를 이끌어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죠.”
하기야 나이가 과하게 어리긴 하네.
아기는 머리가 커서 몸체의 균형이 불안정하다.
일레아흐의 고개를 끄덕이려다 깜짝 놀라서 바동거렸다.
“저 고지식한 덩치가 당신과 성녀까지 데리고 당도했다는 것은…… 히사네, 좀 더 뒤로. 고마워. 회차목표를 위해서겠죠.”
“맞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협력해 황색대륙의 아크 리치를 죽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본부의 상황을 모르시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물에게 고립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현재 싸움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현재 멸살군주 바르녹과의 교전 상황은…….”
아기의 발음은 또렷해도 목소리는 작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고함에 말이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전령이 왔다!”
일레아흐는 포동포동한 볼이 부르르 떨리도록 한숨을 쉬었다.
“성벽 위로 가시죠.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
가관이로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저게 다 몇 명이야?”
“천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만한 화력이 나온단 말입니까?”
비좁은 협곡 끝에 놓인 석재요새.
그것이 자살기도회 본부였다.
본부로 통하는 길목은 미로처럼 복잡하고 성인이 드나들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그래서 오로지 지부장의 의지로 발동하는 포석만이 본부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멸살군주는 보란 듯이 그 규율을 깨뜨렸다.
쾅! 콰광!
단순 무식하지만 괴악한 광경이다.
멸살군주의 세력은 협곡의 바위를 뜯어내고 있었다.
일천 이상의 병력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저 속도라면 내일이나 모레쯤만 되어도 본부 앞까지 닿겠어요.”
카티에가 우려했고, 일레아흐는 긍정했다.
“정 안 되면 중요한 것들만 챙기고 요새를 내어줄 생각입니다. 미공개 포석을 이용해서 전원이 도망치려면 꽤 걸리겠지만.”
나였어도 그녀의 주장에 적극 동의했을 것이다.
저 광경을 보고도 이길 만하겠단 생각이 든다면 미친놈이지.
‘이건 뭐, 적이 상식을 초월하니 전략도 무용지물이겠군.’
멸살군주의 수하가 강력한 완력을 지녔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런 병력이 천 명이 넘으니 그 파괴력이 무지막지했다.
바위를 두부처럼 부수는 그들은 사상최강의 군단처럼 보였다.
“나는 자살기도회 본부장을 만나러 왔다!”
하늘에는 흰색 양탄자를 탄 허연 눈동자의 남자가 있었다.
나는 공중에 두둥실 떠오른 양탄자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
“저게 뭐냐? 마법인가?”
“날아다니는 양탄자예요. 본래 적색대륙에서만 제작되는 수공품인데 드물게 파도를 타고 황색대륙에도 떠밀려 와요. 황색대륙 회귀자들 사이에서도 귀하고, 비싸게 거래되죠.”
카티에가 해준 설명에 나는 상황도 잠시 잊고 감탄하고 말았다.
다른 대륙에서는 저렇게 신기한 물건도 만들어진단 말이야?
일레아흐가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기를 업은 여인, 히사네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분이 본부장님이시다! 여기까진 무슨 볼일이냐!”
“멸살군주의 명을 전하러 왔다!”
양탄자를 탄 전령이 모든 일원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회차목표를 이루려는 행위를 즉시 중단해라! 멸살군주께서는 자비롭게도 그것만 서약한다면 모든 병력을 물리겠노라 말씀하셨다!”
일레아흐가 또 무어라 말했다.
히사네가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소리쳐주었다.
“그렇다면 본부 앞으로 내려와라! 맹세의 서신을 써내겠다!”
전령은 양탄자의 고도를 낮추었다.
그 순간, 외곽에 선 일원들이 일제히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화살 비가 솟구쳤다.
“으아악!”
벌집이 되는 것은 회귀자에게도 유쾌한 죽음은 아니다.
전령은 허겁지겁 화살을 피해 양탄자를 끌어당기며 물러났다.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그 꼴을 보면서 낄낄대며 비웃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전령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후회할 짓을 한 것을 후회해라! 우리 또한 응전할 뿐이다!”
“사지를 찢어서 고문하지 않은 것은 네가 날고 있기 때문이다!”
전령은 다급히 돌아가 저 너머의 점이 되어버렸다.
자살기도회는 매 삶을 첫 삶처럼 살아가는 규율이 정해져 있다.
적이 지키지도 않을 서약을 위해 자존심을 내다 버리진 않는군.
“과연 멸살군주답군요. 회차목표를 포기하는 것이 철수 조건이라니.”
헤르탄의 말에 카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회귀가 끝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니까요. 다들 회차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회차지만, 일말의 가능성까지 멸살하려는 것이겠죠.”
일레아흐는 침이 줄줄 흐른 턱에 포대기를 오물조물 비볐다.
“보신 것처럼 상황은 이렇습니다. 회차목표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요새를 넘겨버리면 앞으로 활동에 제약이 커지겠죠.”
“하지만 거물에게서 이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지독하게 낙관적인 가치관이 부럽군요. 저 광경을 보고도 거물에게 이길 만하단 생각이 들 만큼 당신의 세상은 너그러웠나요?”
물론 내가 미쳤거나 너그러운 세상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어느 회귀자도 예상 못 한 변수가 있다.
“저 멸살군주의 병력조차 압도할 화력이 있다면 어쩔 겁니까?”
“어디에요? 누가? 설마 당신이?”
일레아흐는 소악마처럼 뺨을 잔뜩 부풀리며 비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모습마저 귀엽고 사랑스럽단 생각이 드는 거냐.
갓난아기란 정말 무서운 존재로군.
나는 운명을 딛고 살아난 용을 가리켰다.
“퀸소히니베. 그녀는 용입니다.”
주위에서 오가던 말소리가 멈추었다.
멀리서 멸살군주 세력이 길을 넓히는 잡음만이 맴돌았다.
모든 일원들이 흠칫하며 우리를 힐끔 보았다.
“용? 저 여자가 용이라고?”
“무슨, 헛소리겠지. 그런 용의 이름은 회귀하면서도 들어본 적 없어.”
“저 사람, 밴시한테 홀린 것 아니야?”
몇몇은 대놓고 비웃기까지 했다.
일레아흐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 열었다.
“……굉장히 불쾌한 농담이군요.”
헤르탄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저었다.
“범철의 말은 진실이다. 일레아흐. 퀸소히니베는 용이 맞지만,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용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 회귀자는 아무도 없었어.”
일레아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퀸소히니베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나는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애완동물이 아니야.”
그녀의 옷이 찢기며 등짝에서 용족의 날개가 확 뻗어 나왔다.
모두의 눈동자가 커졌다.
주위에서 경악한 비명이 울렸다.
“지, 진짜였어!”
“정말로 용이다!”
“저런 몬스터를 본부 안으로 들였단 말이야?”
몇백의 일원들이 다급히 그녀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퀸소히니베는 화가 나서 못 참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때 일레아흐가 굳은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무기를 거둬라.”
“본부장님! 하지만……!”
“거두라고 했다.”
히사네가 커다란 목소리로 그녀의 명령을 전체에게 전달했다.
과연 적절한 대처로군.
나는 퀸소히니베를 팔로 감싸고 진정시키며 화제를 돌렸다.
“우리에게 용이 있다면 거물도 쓸어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헛소리! 나는 중립이다. 절대 인간을 위해 싸우지 않을 거야.”
퀸소히니베는 용족이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순순히 우리 편에서 싸워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뭐든지 꼼수는 있는 법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너, 내 두 번째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않냐?”
“맞아. 나중에 결정한다고 했었잖아. 그게 무엇인 것이야?”
“지금 말할 테니까, 잘 들어.”
퀸소히니베가 약간은 진정하며 날개를 집어넣었다.
나는 순진한 용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진지하게 속삭였다.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