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28화
“저 개자식이!”
움찔하던 것도 잠시.
허연 눈동자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나는 날이 긴 플랑베르쥬를 뽑아 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든 남자의 쇠도리깨가 내 목을 노려왔다.
눈썹을 스칠 뻔했으나 피해내고, 칼을 내려쳤다.
“아악!”
갈라지는 남자의 어깨에 칼이 파고들어 상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힘은 강해졌어도 생명력은 평범하군.
그러나 내 칼에 꽂힌 남자는 피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자, 잡았다! 어서!”
나의 뒤에서 다른 남자가 치고 들어왔다.
당장 칼을 뽑아 반격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폴암이 내 뒤통수를 강타하려던 찰나.
화르르륵!
“끄아악!”
얼굴에 불덩이를 처맞은 남자가 뒤로 쓰러져 굴렀다.
카티에의 손아귀에서 마력이 뿜어졌고,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일제히 칼을 뽑으며 돌진했다.
“각자 목숨을 쏟아서 싸워라!”
암론이 소리치면서 가장 덩치가 작은 남자에게 뛰어갔다.
양손검은 검술과 마법을 교차하면서 싸우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칼을 집어넣고 반지에 마력을 쏟았다.
“이, 이런 제기랄! 투명화다!”
멸살군주의 부하들은 회귀자답게 투명화 대처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비명과 피가 튀는 난전 속에선 침착한 대처란 불가했다.
화르륵!
나는 양손에서 화염구를 생성해 놈들에게 던졌다.
투명한 상태에서 마법을 퍼붓는다.
마나가 폭포수처럼 낭비됐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원래 투명화 상태에서 다른 마법을 시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만 국한된 정설이다.
나는 할 수 있다.
그 누구와도 비교조차 불허한 마법 재능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아아악!”
가장 빈약한 덩치의 남자를 제외하고, 모든 적이 죽었다.
다행히 우리 쪽에서 피해 입은 것은 제 발에 넘어져 무릎에 찰과상을 입은 암론뿐이었다.
내가 투명화를 쓰고 여러 사람들의 전투를 보조한 덕이다.
“제, 제기랄!”
마지막 남은 남자는 혀를 깨물려고 했다. 우리에게 정보를 넘길 바엔 자살하려는 것이다.
나는 친절하게 주먹질을 해서 혀를 끊을 이빨을 부러뜨려줬다.
“어어억!”
남자가 찢어진 입에서 피를 쏟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 행동에 자살기도회 일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티에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이 남자한테서 정보를 빼내야겠네요. 적진의 병영 위치, 물자이동, 전략, 멸살군주의 계획 등등 모든 것을요. 어차피 멸살군주에게 영혼도 빼앗긴 처지이니, 배신하는 일도 쉽겠지요?”
한마디로 고문해야 한다는 것인가?
무릎 꿇은 남자는 피를 쏟으며 악을 썼다.
이빨이 부러져서인지 발음이 상당히 웅얼거렸다.
“닥…… 쳐라! 우린 그분에게 영혼을 빼앗긴 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 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나한테 말대답하는 꼬마는 벌을 받아야 해요.”
소녀의 손아귀에서 끔찍한 빛이 일렁였다.
자비심 한 점 없는 얼굴이 날 대할 때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때 헤르탄이 담담히 말했다.
“카티에, 여긴 제가 하겠습니다.”
“흐음, 하긴 헤르탄이라면 믿을 만하겠네요.”
카티에의 손아귀에서 빛이 사그라졌다.
헤르탄은 퀸소히니베를 업고 있어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여동생을 업은 오빠 같아서, 나는 괜스레 씁쓸해졌다.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헤르탄은 퀸소히니베를 암론에게 조심히 맡기고 나를 돌아봤다.
“범철.”
“예?”
“손이 더러워지는 일은 신하의 몫입니다.”
헤르탄이 반항하는 남자를 끌고서 맞은편 숲속으로 걸어갔다.
숲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다만 끔찍한 비명만이 오래도록 울렸을 뿐이다.
돌아올 때 헤르탄은 혼자였고, 양 손이 피에 젖었으며, 적진에 관한 모든 정보를 꿰고 있었다.
***
「저자는 우리를 기사단이 아니라 한낱 도구로만 여기고 있다. 결코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
「우리가 비록 육신 없는 유령일지언정 기사로서의 자부심마저 내다 버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썩 꺼져라! 우리는 부하를 아끼지 않는 주인은 섬기지 않는다.」
으스스한 고대기사의 건틀릿으로 소환된 유령기사단!
오래간만의 소환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게 돌아선 상태였다.
하기야 마지막으로 소환했던 용도가 마법방패 막이었으니까.
그러나 우리 사이의 앙금은 생각보다 가볍게 사라져 버렸다.
「안녕하신가요. 주인.」
「평화로운 오후처럼 따사로운 하룻날이 되길, 용맹스러운 주인님.」
「허어엇……!」
내가 확실히 성장하기는 했나 보다.
고대기사의 건틀릿 고유특성!
소유자가 성장할수록 최대 20인까지 새 유령기사단원이 편성된다.
다섯의 기마병을 제외하고도, 처음 보는 신참유령기사단원이 두 명이나 생겨난 것이다.
빛나는 창을 든 여기사는 검은 단발에 무심한 인상이었고, 활을 꼬나 쥔 기사는 금발에 싱글싱글 웃는 미인상이었다.
“너희는 뭐냐?”
「유령기사는 스스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저는 타오르는 화살을 쏘고, 여기 제 쌍둥이 동생은 달빛의 창을 다뤄요. 아직 언니를 많이 의지하는 데다가, 수줍음도 잘 타니 잘 부탁드려요.」
쌍둥이 여기사.
병종으로 따지면 궁병, 창병이로군.
비록 반투명하긴 하지만 두 여인은 수려한 미녀였다.
그리고 그것이 유령기사들의 차가운 가슴에 불을 지폈다.
「커흠! 신참이시군요.」
「쌍둥이 자매치고는 서로 분위기가 많이 다르십니다, 그려.」
「두 분은 유령마가 없으시니 전투 때 제 뒤에 타시는 것이…….」
나는 넌지시 일렀다.
“앞으로 내가 강해질수록 새롭게 편성될 신참이 많을 거다.”
유령조차 유혹에는 홀리는 법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옛일 남겨둬서 뭐하냐. 잊고서 나아가자.”
「흠흠!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오히려 우리가 사과할 일이지. 자주자주 불러줘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인이시여!」
유령기사들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나는 손에 딱 맞게 낀 건틀릿을 쥐었다가 폈다.
‘이거 막상 써보니 상당한데.’
하루 한 번 소환이라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성장할수록 휘하의 병력을 늘려갈 수가 있단 것은 큰 장점이다.
과연 나에게 복수하려고 이를 갈던 회귀자의 장비다웠다.
「하여간 무슨 일로 우리를 소환했는가?」
나는 순간이동 포석을 둘러싼 흰 눈동자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 아래서 잠복하고 있다가 신호를 보내면 적들을 습격해라.”
우리는 며칠째 걸어서 순간이동 포석 부지에 도착했다.
과연 예상대로 멸살군주의 세력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얼추 50명쯤 되어 보이는 병력.
우리는 산기슭 위의 바위 뒤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왜 숨은 것이야?”
“적들에게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 것이야?”
“우리 쪽이 숫자가 밀리기 때문입니다.”
헤르탄의 설명에 그녀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기야 강대한 용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개념이겠지.
퀸소히니베는 한 번 잠들면 남이 납치해도 모를 만큼 깊게 잤다.
그리고 깨어나면 하품을 하고선 이것저것 곧잘 묻고는 했다.
“내가 말한 첫 번째 부탁. 기억은 하냐?”
“잊었다면 바보이겠고, 그건 내가 아니야.”
자존심을 살짝 건드려주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차후에 그녀의 노예가 되는 조건으로 내건 첫 번째 부탁.
그래도 그녀는 약간 망설여지는지 내게 다시금 속삭였다.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내가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것이야?”
“잘 생각해 봐라. 단순히 겁만 주는 건데 그게 편드는 거냐?”
“하지만…….”
망설이는 성년을 일탈하도록 떠미는 것은 간단한 행위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용이란 존재를 써먹지 않을 순 없다.
실제로 내가 한 부탁이 아주 어긋난 것도 아니다.
중립이란 참으로 애매한 위치니까.
“내가 네 노예가 되면 밤새워서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게 정말인 것이야?”
그녀가 솔깃했고, 나는 끄덕였다.
“물론이지. 직업을 갖지 못한 청년들이 실의에 빠지고, 웃어른은 사회에 편협심을 가졌으며, 너도나도 핏줄, 인맥, 권력을 탐하지만, 결국은 모두 상대적 박탈감만 넘쳐나는 세상의 이야기다.”
“너무 끔찍한 세상 이야기라서 오히려 설레어.”
“네가 혼자 외로울 틈도 없을 거야. 내가 곁에 있어줄 테니까.”
퀸소히니베는 결심이 섰는지 바로 일어섰다.
그녀가 산기슭에서 뛰어내린 순간, 매서운 울음이 울려 퍼졌다.
“카아아악-!”
땅이 흔들리고 대기가 진동한다.
작은 산만 한 덩치를 가진 선홍의 용이 아가리를 쫙 벌렸다.
몇 번을 보아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위용이로군.
저편에서 나타난 용을 보고 멸살군주의 부하들이 기겁했다.
“용이다!”
“어, 어디서 저런 용이 갑자기?”
“비, 비늘이 없는 걸 보니 아직은 어린놈이다! 포석을 지켜라!”
회귀자들은 침착하려 애썼지만 대열은 무너져 버렸다.
용의 포효는 적들의 사기를 빼앗아 버린다.
본능적으로 오금이 저리고, 손에서 힘이 빠진다.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기회였다.
나는 힘차게 외쳤다.
“공격하라!”
잠복해 있던 유령기사단이 뛰쳐나왔고, 놈들은 당황했다.
쌍둥이 여기사들은 기마병들의 뒤에 타고 있다가 뛰어내리며 창을 내리꽂았고, 영혼의 불꽃이 담긴 화살을 쏘았다.
무기로 반격하려 해도 영체를 가볍게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이, 이놈들은 유령…… 끄아악!”
“주먹이나 무기는 소용이 없다! 마법으로 대응해라!”
“적들이 용을 끌고 왔다! 도, 도대체 어떻게…… 으악!”
놈들이 대처할 틈을 줄 수야 없었다.
우리는 산기슭 위에서 집단사격을 감행했다.
나의 화염구, 카티에의 불덩이, 그리고 자살기도회 일원들의 화살이 놈들에게 일제히 쏟아졌다.
내가 마력을 끌어모아서 큰 규모의 기름바닥을 만들어내자 불바다가 적들을 집어삼켰다.
“어어억!”
완력은 강해졌을지라도 육체는 인간이다.
유령기사단의 습격, 장거리 공격은 놈들에게 치명적이었다.
헤르탄도 산기슭에서 뛰어내리며 짐승처럼 돌격했다.
곰발로 양팔을 변화해 후려치자 적들의 머리가 무참히 깨졌다.
거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움직임은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활을 못 다루는 암론도 그의 뒤를 따르며 칼을 휘둘렀다.
헤르탄처럼 영웅적인 활약상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최소한 한 사람 몫은 얼추 해냈다.
내가 양손으로 화염구를 던지면서 소리쳤다.
“용을 본 적들은 한 놈도 살려놔선 안 됩니다!”
퀸소히니베는 회귀자들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용이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상대에겐 치명적인 변수.
한 놈이라도 살려뒀다가 정보가 퍼지면 곤란하다.
‘여기서 전부 처리한다.’
후환은 남겨놔선 안 된다.
포석으로 이동하기 전에, 전부 깔끔하게 죽여야 한다.
나의 칼이 피에 적셔졌다.
***
“범철은 정말로 가차 없네요.”
“뭐가 말입니까?”
나는 칼의 피를 털고서 물었다.
암론은 시체더미에 걸려서 넘어졌다가 찡그리며 다시 일어섰다.
“칼을 가르쳐 줄 때만 해도 동네 형처럼 친근했는데, 싸움만 시작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잖아요. 뭐랄까, 냉혹하고 무자비하달까요.”
자살기도회 일원들 전원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휴. 저는 회귀자인데도 심장이 다 떨렸다니까요.”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꼭 피에 절은 학살자 같았어요.”
“며칠 전에, 적 이빨 부술 때는 눈빛부터 달라지시더라고요.”
내가 그렇게까지 가차 없었던가.
사실 회귀자 살해 재능의 영향이 크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담담히 걸어가며 말하였다.
“내 사람한테 잘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요.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호구처럼 살고 싶진 않아서.”
“하긴 그렇죠. 그나저나 믿기질 않습니다.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우리들이 이토록 많은 적을 휩쓸다니. 저는 회귀하면서도 이렇게 통쾌한 싸움은 몇 번 경험을 못 해봤어요.”
자살기도회 일원들이 경상을 입긴 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그에 반면 포석 부지에는 적들의 시체가 한껏 널브러져 있었다.
용의 울부짖음에 적들은 완벽히 압도당해 버렸던 것이다.
카티에가 덩치 큰 시체를 힘겹게 뛰어넘었다.
“읏차. 헤르탄이 정보를 선점해 준 덕분이에요.”
“아뇨. 지휘를 한 범철과 퀸소히니베의 역할이 컸습니다.”
“맞아. 나는 위대한…… 아니, 난 중립이야. 어느 편도 아니지.”
용에게 겸손이란 미덕은 없다.
퀸소히니베는 자기도 모르게 웃다가 얼굴을 구겼다.
“너 그냥 내 편 하면 안 되냐? 너만 있어주면 든든할 텐데.”
그녀가 어림도 없다는 듯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흥. 시끄러워. 넌 도대체 언제 내 노예가 될 생각인 것이야?”
“이미 말했잖아. 부탁 2개는 더 들어줘야지.”
“괜히 잔꾀를 부리다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야.”
우리는 넓은 포석 위에 섰다.
순간이동 포석을 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부장뿐이다.
자살기도회 지부장 암론이 포석에 양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이동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