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27화
화려한 헛방이었다.
불안정하게 쏘아진 화살은 고목나무조차 스치지 못했다.
힘을 충분히 담지 못한 화살이 땅에 떨어졌다.
‘처음 활 쏴봤을 때랑 변한 것이 없군.’
나는 시위를 당긴 손가락을 문질렀다.
내가 궁술에 재능 없다는 것은 이계에 온 직후부터 진작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활을 쏘았느냐.
“궁술은 여전히 어렵군요.”
“하하. 저는 회귀하면서도 한참을 헤매고 있습니다.”
“나도 여러분한테 가끔씩 활을 좀 배우고 싶습니다.”
“아! 그러시다면…….”
“다만 공짜로 배우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활 배우는 조건으로.”
암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짐짓 지나가듯 말했다.
“여러분이 나한테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 전부가 눈을 번쩍 뜨며 일제히 소리쳤다.
“칼을 가르쳐주세요!”
***
“컨돈. 칼자루를 쥘 때 손을 더 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 옛! 감사합니다!”
“사나. 휘두르는 반경이 불필요하게 넓어요. 때론 목을 떨어뜨리는 것도 낭비입니다. 인간은 비좁은 구멍만 뚫려도 죽잖습니까.”
“그럼 시범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나는 칼을 뽑아서 최대한 빠르고, 최소한으로 비좁게 내꽂았다.
그러자 양손검인데도 사나의 한손검보다 찌르는 효율이 좋았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아……!”
어찌 보면 우스운 상황이다.
이들은 몇백 년, 어쩌면 몇천 년 칼을 휘둘러왔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칼을 쥔 경력이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러한 내가 회귀자들에게 칼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의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좋아하다니.’
각자 자세를 교정해 주고 내가 칼 쓰는 시범만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회귀해도 오늘날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그 범철한테서 직접 칼을 배우다니. 다음 삶에서부터 무조건 자랑해야겠어.”
“전생에 블라이넨이랑 겨뤄봤다고 큰소리치던 녀석이 있었는데, 이젠 우스워. 그래 봤자 범철한테 직접 교습받은 거랑 같아?”
나도 반쯤은 심심풀이였다.
그러나 시간 때우기일지언정 결코 체력낭비가 아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나 또한 배우는 것이 많다.
‘전생의 내가 가졌다던 최상의 실력을 최대한 빠르게 따라잡는다.’
비록 이들이 지금의 나보단 못할지언정 명색이 회귀자다.
몇천 년의 세월로부터 나온 칼의 경험에선 뽑아먹을 것이 많다.
짧은 교습 과정에서 나는 일원들과 이전보다 훨씬 친해졌다.
심지어 암론은 당차게 가슴을 치며 자신 있게 소리쳤다.
“범철 스승, 저랑 검술 대련 한 번 붙으시죠!”
나는 씩 웃으며 나무작대기를 주워 들었다.
잠시 뒤,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눈앞에서 작대기로 처맞는 지부장이 인간인지 복날의 개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카티에는 무릎을 끌어안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대장의 능청스러움이 때론 부러워요.”
“인간관계는 남이랑 비교하면 안 된다. 정신만 썩어나거든.”
“나도 친구 꽤 있었어요. 다 자살해서 그렇지.”
참으로 회귀자스러운 대답이로군.
내가 항상 남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런 수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에 관해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헤르탄이 꽤 늦네요.”
카티에가 하품을 했다.
날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다.
원수들이 있을까 정찰 나간 헤르탄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저녁식사시간도 지나가는데.”
“뭐, 혹시 모르지. 오는 길에 들짐승이라도 사냥해 오는 걸지.”
“그럼 좋겠네요. 고기는 언제 먹어도 좋아요.”
시간이 늦어간다.
건조식량으로 간편하게 저녁을 때 운 우리는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헤르탄은 어두워질 때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아니냐?”
“회귀자가 길을 잃거나 하진 않을 텐데, 이상하네요.”
암론이 작대기 끝에 굳은 기름을 묻혀서 횃불을 만들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우선 주변부터 찾아볼까요?”
우리가 그를 찾아 나서려던 찰나.
저편에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눈이 좋은 내가 가장 먼저 어둠 속의 헤르탄을 알아보았다.
“아, 계속 기다렸…….”
반갑게 말하던 나는 뒷말을 흐렸다.
헤르탄은 양손에 피범벅이 된 시체를 한 구씩 들고 있었다.
“거슬리는군요.”
그가 사람시체를 모닥불 근처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헤르탄! 설마 요리하려고 죽여 온 것은 아니겠죠?”
“내가 그렇게까지 돌아버리진 않았습니다, 범철. 아직은.”
뒷말이 신경 쓰였지만 따져볼 틈이 없었다.
헤르탄이 심각하게 말했다.
“당장 모닥불을 끄십시오. 길가에 널브러져 있던 여행자 시체, 자살한 게 아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
살쪄가는 달조차 구름에 뒤덮여버린 자정.
우리는 어둠에 휩싸인 샛길을 뛰고 있었다.
오직 퀸소히니베만이 태평하게 헤르탄의 등에서 잠들어 있었다.
“퀸소히니베는 왜 업고 갑니까? 깨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잠자는 용은 절대 함부로 깨워선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의미지?
나는 뛰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하여간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찰 중에 멸살군주의 부하들과 마주쳤습니다.”
멸살군주 바르녹.
자살기도회 본부를 점령하려 한다는 거물이다.
암론이 깜짝 놀라서 횃불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본부까지는 거리가 꽤 먼데요?”
“자살기도회 지부장에게만 허락된 순간이동 포석. 아무래도 적들은 지부장들의 시체를 이용해 그 포석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맙소사……! 포석이 적한테 이용당하는 경우는 처음이에요.”
우리의 목적지는 본부로 빨리 갈 수 있는 순간이동 포석이었다.
그런데 이미 멸살군주 세력이 그곳을 선점해 두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맞부딪치게 되겠군.
“멈춰라.”
어둠 속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긴장하며 칼을 쥐었다.
암론이 횃불을 크게 휘젓는다.
흰 동공의 남자들이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우리를 보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의 눈알에는 검은자가 없었다.
희기만 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들의 인상은 섬뜩했다.
내가 속삭였다.
“헤르탄. 저들은……?”
“멸살군주에게 영혼을 빼앗긴 회귀자들입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으나, 어느 삶에서든 그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신세지요.”
“어느 삶이라도? 설마 회귀한 이후까지도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 말에 숨이 저절로 턱 막혔다.
회귀해도 숫자가 유지되는 절대복종의 병력이라니?
어째서 회귀자들이 거물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카티에가 앞장서 차갑게 말했다.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죠? 당장 비켜요.”
“땅꼬마만 한 계집애는 닥치고 있어라.”
씨근덕거리는 목소리가 매우 거슬렸다.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쪽 사람 중 두 놈이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그쪽에 있지.”
헤르탄이 들고 왔던 두 명의 시체를 말하는 건가?
그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목숨을 노려온 것은 그자들이었습니다만.”
“어허, 그건 중요하지 않아.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람이 그쪽에게 당했다는 거지. 의리가 아니야, 자존심이 상하잖아.”
흰 눈의 남자들은 횃불이 없어도 어둠 속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감히 멸살군주의 세력에 손을 댄 사람을 그냥 보낼 수야 있나? 그분의 위상에도 해가 끼칠 테지. 그러니 이렇게 하자고.”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손가락 두 개를 올려 보였다.
“딱 두 대만 주먹으로 때리겠다. 죽은 사람당 한 대씩, 딱 두 대만으로 봐주겠단 거야. 때리는 곳은 가슴 중앙. 갑옷이든 뭐든 어떤 방어구를 입어도 좋아. 너희 중 한 명만 나와라. 두 대만 때리고, 그냥 보내 준다.”
카티에는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냉랭히 비웃었다.
“당신들의 완력이 철판조차 찢어낸다는 것을 모를 것 같아요?”
“저런. 싫은 건가? 모두 죽을 것을 한 명으로 끝내주겠다는데.”
남자들이 기분 나쁘게 킬킬 웃었다.
저 자식들, 언짢군.
애당초 우리를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너희, 손맛은 맵냐?”
“손맛이 매운지 몰라도, 주먹은 꽤 쓰라린 편이지.”
“좋아. 그럼 어느 정도 쓴맛인지 내가 맛봐주겠다.”
암론을 비롯한 일행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앞장서 걷고 있었다.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씩 웃으며 걸어 나왔다.
“호오, 회귀자라도 내 손에 뭉개져 죽는 고통은 피하려고 애를 쓰는데. 결단력이 있어서 마음에 드는군.”
놈이 주먹을 뚜드득 소리 나게 푼다.
권사拳士의 팔뚝보다 우락부락한 근육.
과연 철갑옷 병사라도 저 주먹이 꽂혔다간 정말로 즉사하겠군.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턱을 올리며 얄궂게 말했다.
“새 갑옷처럼 보이는데, 부수게 되어 미안하군.”
“혀가 길다.”
놈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순순히 가슴을 내밀었다.
“자, 때려라.”
“맹랑한 놈.”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팔을 뒤로 쭉 뻗은 뒤, 강력하게 쳤다.
갑옷 전체가 진동했으나,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우드득!
길가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놈이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감쌌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주먹 뼈가 완전히 아작 났다.
팔꿈치 끝에서 전박골까지 약간 튀어나왔다.
흰 눈알의 남자들이 뜻밖의 광경에 당황해 웅성거렸다.
“뭐야, 그 알빈의 주먹을 혼자서 끄떡없이 버텨냈어?”
“알빈은 강철갑옷도 일곱 개나 부순 적이 있잖아.”
“저 갑옷, 미스릴이나 성좌의 금속이라도 되는 건가?”
“내 눈에는…… 그냥 평범한 쥐색 갑옷으로만 보이는데?”
쓰러진 알빈이란 놈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웃으며 말을 돌려줬다.
“솜털주먹처럼 보이는데, 부수게 되어 미안하군.”
“제기랄……! 으어억……!”
알빈이 이를 갈며 뼈가 튀어나온 팔을 감쌌다.
그때 내 갑옷에서 녹색 불빛이 타올랐다.
화르륵!
피격 시 10% 확률로 명계의 잔불이 소환되는 성능.
불멸자의 갑의가 초록색 불꽃에 휩싸였다.
적들에겐 지옥불 같겠지만, 소유자인 나만은 전혀 뜨겁지 않다.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냐?”
“뭐, 뭐……?”
“아직 한 대 남았잖아. 어서 날 때려라.”
알빈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타오르는 갑옷을 맨손으로 치라니.
제아무리 철판도 내찢는 괴력의 소유자라도 꺼려지는 짓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냐?”
“어, 어?”
“그럼 지켜주게 해주마.”
나는 놈의 뒤통수를 쥐어 잡았다.
그리고 불타는 갑옷에다가 놈의 머리를 꽂아버렸다.
“아악! 아, 안 돼!”
놈은 저항했지만, 한 팔만으론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부러진 팔을 걷어차자 놈이 거칠게 이끌려왔다.
이윽고 고통에 찬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아아악!”
불길에 휩싸인 갑옷에 맞닿아서 놈의 안면이 익어버린다.
갑옷에 머리를 여러 번 내려친다.
연거푸 반항하지만 결국 놈의 숨통이 끊어졌다.
시체를 걷어차 버리고.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당황한 남자들을 쏘아봤다.
“자, 어디 한번 쳐보라고. 이 망할 자식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