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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26화 (26/200)

나만 1회차 026화

“용은 절대 동행하거나 애완동물로 삼을 수 있는 생물이 아니에요.”

카티에가 완강하게 반대부터 하고 나섰다.

우리 세 사람은 탁자에 앉아 나아갈 방향을 논하고 있었다.

내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하지만 용이 나서줘야 거물을 휩쓸어버릴 수 있잖아.”

“그건 그렇죠.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는 입맛을 다셨다.

이것, 참.

황색대륙 지배자 아크 리치.

그 존재를 살해하기 위해선 자살기도회 본부와 접촉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본부는 멸살군주 바르녹이라는 ‘거물’의 공격에 의해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퀸소히니베의 화력을 이용해 거물을 쓸어버리자는 것이 나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나의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120회차까지 수많은 회귀자가 용을 길들이려고 도전했어요. 하지만 전부 잡아먹혀서 삶을 마감할 뿐이었죠. 그러니 대장이라고 해낼 수가 있겠어요? 안 그래요, 헤르탄?”

카티에는 옆에 앉은 헤르탄을 올려다보며 협조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창밖을 보며 원치 않는 답을 내놓았다.

“글쎄요. 저 용은 범철에게 꽤나 호의적인 것 같습니다만.”

퀸소히니베는 앉아서 내가 나오길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본인은 자각도, 인정도 안 하겠지만 맹한 애완견 같은 모양새다.

“보기보다 어린 것 같습니다. 용으로 변했을 땐 아직 비늘도 돋아나지 않아 선홍빛 살결이 있더군요. 아마도 갓 성인이 된 나이일 겁니다.”

카티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용의 알을 훔쳐서 키우려던 회귀자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새끼 용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키워준 사람들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구요.”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방식으로 용을 키워서입니다. 가벼이 이득만 취하길 좋아하죠. 그러나 퀸소히니베에게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헤르탄이 총평을 내렸다.

“인간에게 협력한다는 행위를 그녀가 반길지 미지수지만 적대심이 없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나는 탁자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런데 용은 회귀할 수가 없는 겁니까?”

“용 또한 크게 보자면 몬스터로 분류되니까요. 회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들뿐입니다.”

용은 고등하지만, 인간이 아니기에 회귀를 할 수가 없다.

그럼 정령이나 요정처럼 지적인 생물들도 회귀는 할 수 없다는 거군.

이어서 헤르탄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뭐가 말이에요?”

“120번을 살아가는 우리 둘조차 퀸소히니베라는 용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단 것입니다.”

완전기억능력을 가진 카티에 역시 동의하며 턱에 손을 짚었다.

“하긴 그래요. 용족과 쉼 없이 다투고 전쟁한 회차도 있었는데.”

“이것은 내 추론입니다만.”

헤르탄이 낮게 말했다.

“퀸소히니베는 원래 매 삶마다 죽었어야 할 용이었을 겁니다.”

일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녀는 우울증으로 아사할 만큼 혼자 굶다가 수상한 속삭임을 듣고서 둥지를 나섰다고 했었지요. 원래는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단 겁니다.”

나는 그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했다.

헤르탄은 막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들린 속삭임.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아라.’ 그 한마디의 변수가 그녀의 생사를 바꿔 버린 것입니다.”

카티에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퀸소히니베라는 용을 모르는 것도 설명이 되네요. 원래는 매 삶마다 회차 초반에 죽었을 용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120회차에서 그녀가 죽을 뻔한 이유는 회귀자들의 농락으로 인한 우울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인간들이 회귀에 익숙하지 않던 초기의 회차에서 그녀는 어떻게 죽게 된 겁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느 삶이든 오래 생존했었다면 분명 내가 알아보았을 겁니다. 나는 전쟁을 위해 황색대륙을 떠돌며 용의 개체 수를 파악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왼쪽 손등의 펜타그램을 바라보았다.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아라.’

그 속삭임이 원래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했을 용을 살려냈다.

누가, 어떻게, 어째서 그런 변수를 일으킨 걸까?

카티에가 한숨을 쉬었다.

“대장의 새로운 재능들도 그렇고, 이번 회차는 의문이 많네요.”

헤르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의문들을 깨끗이 해소하기 위해선 120회차 세상의 여정을 계속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120회차에선 이토록 강렬한 변수들이 생겨난 것일까.

그 해답은 여정의 끝에 있으리라.

카티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저 용은 어쩌죠?”

“범철, 그대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헤르탄 말대로 퀸소히니베가 협력하는 행위를 반길 리 없습니다.”

용은 강한 만큼 자존심이 드높다.

창가 끝에는 꾸벅꾸벅 조는 퀸소히니베가 있었다.

나는 운명을 딛고 살아난 용을 보았다.

“그러니 본인조차 모르도록 그녀를 뼛속까지 이용해먹어야겠죠.”

***

“나의 노예가 되어줘.”

“어째 네가 나를 이용하려 하냐?”

“지금 뭐라고 한 것이야?”

나는 골치가 아파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꼭두새벽부터 도시를 떠나서 도로를 걷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10명이었다.

나, 카티에, 헤르탄, 퀸소히니베, 그리고 자살기도회 일원 6명.

나는 크레스 시 지부장 암론을 바라보았다.

“도시에 남으셨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보통은 본부와 전서구로 통신을 주고받지만 연락이 끊겼거든요. 그래서 본부에 직접 크레스 시의 회차 상황을 보고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지부장이 자리를 비우면 업무가 밀리지 않습니까?”

“각 지부에 해당된 업무는 정보보고가 전부입니다. 본부와 지부가 갈린 이유도 회귀 시점에서 일원들의 위치가 다양해서예요.”

하기야 까다로운 업무량이 많으면 회귀자들 통제가 안 되겠지.

그의 말대로라면 자살기도회 본부는 엄청난 정보력을 지녔겠군.

“본부로 가는 길목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멸살군주가 어디서부터 진을 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흘이면 지부장에게만 허락된 순간이동 초석에 도착할 겁니다. 그쪽으로 가면 걸리는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어요.”

그나마 그 소식은 반갑군.

한편 카티에는 퀸소히니베를 매섭게 주시했다.

“대장을 잡아먹으려 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내 노예가 될 인간은 먹지 않아.”

“너는 왜 자꾸 나한테 노예가 되어 달라고 하냐?”

나는 길가에 널브러진 여행자의 시체를 뛰어넘었다.

회차목표가 포기된 120회차라서 자살한 시체가 가끔씩 길에 보인다.

퀸소히니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회귀자들이랑은 다른 것 같으니까. 나는 회귀자들이 싫어.”

“흐음, 우린 생각보다 취향이 잘 맞는 것 같다.”

“대장! 나도 회귀자예요!”

카티에가 울컥해 어쩜 그리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헤르탄이 산만해진 대화를 정리했다.

“퀸소히니베. 우리는 그대에게 협조를 구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줬으면 하는 것이야?”

“거물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안 돼.”

퀸소히니베는 단칼에 거절했다.

“용은 중립을 지켜야 해. 그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어르신들께서 줄곧 지켜왔던 신념이야. 내가 멋대로 어길 수는 없어.”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그녀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넌지시 물었다.

“내가 만약 노예가 된다면 너는 나를 어떻게 부릴 거냐?”

“둥지로 가지고 가서 같이 지낼 거야. 혼자 있을 땐 너무 외롭단 것을 알았어. 노예는 나랑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해야 해.”

어째 이 용은 노예 말고 전혀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은데.

뭐,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퀸소히니베가 선심 쓰듯 말했다.

“그냥 납치할 수도 있겠지만, 네가 자살할까 봐 참고 있는 것이야. 네가 허락만 해준다면 당장 너를 노예로 삼아줄 수 있지.”

“뭐, 못할 것도 없지. 내 조국에선 노예 짓이 흔하기도 했고.”

“그게 정말인 것이야?”

퀸소히니베가 혹하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어젯밤 일행과 상의해서 결정한 제안을 꺼내놓았다.

“내 부탁을 몇 가지만 이뤄준다면.”

나는 구슬프게도 사회에 찌든 어른이었다.

비록 그것이 용일지라도.

갓 성인이 된 새내기의 열정을 뽑아먹기란 쉬운 일이다.

***

“아, 그렇게 쏘는 게 아니라니까요!”

“옹이구멍을 노려야지, 지금 기둥에만 자꾸 꽂히시잖아요.”

“지부장님은 120번이나 살면서 활도 제대로 못 다뤄요?”

노을빛이 완연한 저녁, 우리는 노숙 준비를 일찍 마쳤다.

내일도 새벽녘부터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심심한지 암론에게 활을 가르치고 있었다.

먼 곳에 위치한 가련한 고목나무의 옹이구멍이 과녁이었다.

“끄응. 이게 생각처럼 잘 안 되네.”

암론은 땀까지 삐질삐질 흘렸지만 화살은 비실비실 빗나갔다.

과녁을 한참 벗어날 때마다 일원들이 웃으면서 야유를 해댔다.

저들은 위아래로 격이 없었고, 서로가 편안해 보였다.

‘모든 회귀자들이 저러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카티에는 뻐근한 다리를 콩콩 두드리고 있었고, 헤르탄은 지치지도 않고 주변을 정찰하러 갔다.

그리고 퀸소히니베는 몸을 웅크리고 일찍이 잠에 들었다.

그녀는 용답게 잠이 아주 깊었다.

‘용을 타고 날아가면 본부까지 금방 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퀸소히니베가 그렇게 해줄 리가 없다.

그녀가 날다가 나만 빼고 전부 떨어뜨리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암론이 난처하게 웃으며 내뱉은 말이 나의 귓가에 박혔다.

“내가 활에 재능이 없는데 뭘 어떻게 해보겠어? 나는 아무리 회귀해도 재능은 절대 못 따라잡겠더라고.”

재능이라.

나는 일어나서 그들에게 걸어갔다.

내가 오자 그들은 나누던 말을 멈추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 범철? 무슨 일이신가요?”

나는 암론이 손에 쥔 활을 가리켰다.

“나도 한 번 쏘아봐도 되겠습니까?”

“예, 예? 활을요?”

일원들이 당황해서 저들끼리 눈치를 보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잘 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 그게. 1회차이신 데다가 검사 아니셨나요? 범철이 화살을 쏘면서 싸웠다는 말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없어서…… 욱!”

그렇게 말하던 남자 일원의 등짝을 여자 일원이 확 때렸다.

남자 일원은 맥을 못 추고 말을 끊으며 허리를 굽혔다.

다들 나를 굉장히 어려워하는군.

암론이 활을 넘겨주며 말했다.

“활쏘기가 취미셨군요?”

“아니요. 처음 해봅니다.”

“그럼 조금 가르쳐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암론도 잘 못 쏘시던데.”

“어, 처음이시면 무조건 헛방일 텐데요.”

“혹시 모르죠. 나에게 지난 삶에 없던 궁술 재능이 생겨났을지.”

일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줬다.

나의 시력에 나무 옹이구멍은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곧은 자세로 화살을 메기고 시위를 쭉 잡아당긴다.

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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