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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25화 (25/200)

나만 1회차 025화

하늘에서 여자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왜냐고? 이미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지는 것도 한 번 봤으니까.

‘헤르탄도 그렇고, 회귀자들은 왜 이렇게 추락하는 걸 좋아해?’

내 손목을 잡아챈 빼빼 마른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를 찾아왔으니 이 사람도 전생에서 나랑 인연을 맺었던 건가?

나는 카티에를 팔꿈치로 툭 치며 속삭였다.

“야, 이 사람은 또 나랑 무슨 관계냐?”

“모르겠어요.”

“뭐?”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예요.”

카티에는 완전기억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소녀조차 처음 본다면 초면이 확실하다.

헤르탄도 여자 쪽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회귀해 오며 그대를 보았던 적은 없군요.”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무기를 빼 들며 경계태세를 보였다.

내가 대표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퀸소히니베. 고귀한 용이다.”

***

퀸소히니베는 몹시 신경질이 났다.

부끄럽게도, 하찮은 인간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것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것이다.

‘이게 뭐라고 기쁜 거야? 내 마음이 이렇게나 빈곤했어?’

대화하는 것이 얼마 만인가.

어째선지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왠지 말도 더듬을 것 같고, 얘기할 거리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받았던 기억을 되새겼다.

‘아니. 이제 다시는 인간에게 괜한 기대를 품지 않을 거야.’

그녀도 세상의 실상을 얼추 알게 되었다.

인간들은 모두 120번이나 반복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

더 이상 그녀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노예가 되어주지도 않는다.

괜한 기대를 품었다간 배신감만 진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퀸소히니베?”

“회귀해 오면서 그런 용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용은 무슨. 정신 나간 회귀자거나 밴시한테 홀린 백치겠지.”

자살기도회 일원들이 그녀를 보면서 웅성거렸다.

‘이것 봐, 결국 내 말도 안 믿어주잖아.’

물론 자신의 정체를 입증하는 것은 그녀에겐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저들이 믿음을 주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회귀자가 아니다! 정신 나간 것은 너희들이겠지.”

퀸소히니베는 부르르 입술을 떨었다.

‘속삭임이 말하던 대로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은 찾았어. 그런데 이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얼마 전부터 매 순간마다 들려오던 속삭임이 있었다.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아라.

퀸소히니베는 그 속삭임에 이끌려 눈앞의 남자를 찾아오게 되었다.

남자의 왼쪽 손등에는 붉은 별표가 새겨져 있었다.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 남자의 손을 붙잡는 순간 속삭임이 멎었다.

분명 이자를 찾아가라고 속삭여 온 것이 분명했다.

퀸소히니베는 그를 노려보다가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윽…….”

벌써 열흘 넘게 식음을 전폐했다.

용이라 그나마 버텼지만 인간이라면 진작 아사餓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직도 무언가를 먹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이 없으니까.

심신이 한계였다.

‘지쳤어…….’

어머니나 다른 용을 뵐 용기조차 없다.

퀸소히니베는 힘없이 비틀비틀 쓰러져 버렸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

‘응……?’

남자의 따뜻한 손이 어깨를 잡고 그녀를 똑바로 일으켰다.

그가 갑자기 대뜸 말했다.

“방금 회귀자가 아니라고 했냐?”

“지금…… 바, 반말을 내뱉는 것이야? 감히 나에게?”

“너도 반말하잖아.”

남자가 자신을 한참 바라보더니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서서 말하긴 그렇고, 며칠 굶은 모양인데 식사나 하고 가라.”

***

“나는 대장한테 몹시 실망했어요. 이런 선행은 낭비예요.”

“회귀자가 싫다는 사람 처음 봤거든. 괜히 동질감이 들더라.”

“쌀이 아까워요.”

“홀쭉하고 앙상한 친구를 보니 밥 좀 먹이고 싶기도 하고.”

“어쩌면 아로즈처럼 또 거물이 보낸 암살자일지도 모르죠.”

“인마.”

나는 투정 부리는 카티에에게 꿀밤을 먹이려 했다.

그러나 소녀는 날쌔게 도망쳐 버렸다.

‘약삭빠른 녀석.’

암살기도회 크레스 시 지부는 낡은 건축물이었다.

나는 죽을 끓였고, 헤르탄은 고깃간에서 생닭을 훔쳐왔다.

삶아지는 닭고기의 향이 아주 기가 막혔다.

다만 아직도 그는 몬스터의 시체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범철, 리자드맨을 맛있게 조리할 자신감은 차고 넘쳤습니다.”

“이족 보행하는 가축은 닭으로 만족합시다.”

“진심으로 아쉽군요. 전생에서 못 해봤던 일인데.”

헤르탄은 전생에서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해보겠다는 성향이 강했다.

사람은 믿음직한데, 참 괴짜란 말이지.

나는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러다 인육까지 먹겠다고 하겠습니다.”

“참 질겼었지요.”

“…….”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송구스럽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암론이 다가와서 말했다.

“식사는 저희가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도시까지 지켜주셨는데 요리마저 해주시는 것은 너무…….”

“나는 내가 한 밥이 제일 맛있습니다.”

나는 점잖게 거부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은 회귀자들치곤 인성이 괜찮군.

일반 회귀자들이라면 허례허식이라도 저런 말은 안 할 텐데.

“자살기도회 일원은 매 삶을 첫 삶처럼 사는 것이 규율입니다.”

“그거, 단체 이름과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일 아닙니까?”

“대륙지배자를 죽이려는 것 자체가 자살기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논리라면 나도 자살예정자로군, 젠장.

하여간 요리는 완성되었다.

난 각자에게 닭 한 마리와 육수가 배인 죽 한 그릇을 담아줬다.

암론은 쌀죽을 맛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제가 회귀하면서 맛봤던 닭죽 중에서 최고인데요.”

다들 식사를 하느라 바쁜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며 퀸소히니베를 찾았다.

‘저기 있군.’

그녀는 뒷마당에서 쓸쓸하게 혼자 닭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찌나 뒷모습이 우울한지 외로운 기운이 여기까지 풍겼다.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실로 용맹스러운 행위 중 하나지.”

“……그게 무슨 의미인 것이야?”

“우리처럼 못난 겁쟁이들한테는 안 어울린다는 거야.”

나는 그녀 곁에 앉아서 닭다리를 뜯었다.

뒷마당은 넓고 저물어가는 하늘이 보기가 좋았다.

퀸소히니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누구도 고귀한 용을 겁쟁이라고 부를 수 없다.”

“먹기나 해라. 너 쓰러질까 봐 내가 다 겁난다.”

퀸소히니베는 안쓰러울 만큼 마른 체형의 여자였다.

볼은 움푹 들어갔고, 허리는 가늘어, 굉장히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죽 한 사발을 내려다봤다.

“배는 고프지만 식욕이 나지 않아.”

“졸린데 잠이 오지 않을 때처럼?”

“그래.”

“그럼 먹고 싶을 때 먹어라.”

“너는…… 노예로 부릴 만한 인간인 것이야.”

……어감이 참 묘하군.

퀸소히니베가 입술을 꼭 깨물며 하늘을 보았다.

눈물 참는 모양새가 노골적이네.

‘하여간.’

나는 손해를 보면서까지 베푸는 선행은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를 식사자리에 데려온 이유는 직감 때문이다.

‘뭔가 회귀자답지가 않아.’

회귀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오만하거나, 싸늘하거나, 무감정하거나, 돌았거나 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선 그런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수상해.’

나는 슬슬 본론을 물어봤다.

“그래서, 너는 왜 나를 찾아온 거냐?”

조금 경계심이 풀렸는지 그녀의 표정이 조금 진솔해졌다.

약간은 부드러워진 말투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으라고 했으니까.”

“뭐, 누가?”

“어느 날, 정체 모를 속삭임이 들렸어.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으라고. 굉장히 시끄러웠는데, 널 찾고 난 다음부터 멎었던 것이야.”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왼쪽 손등의 붉은 별을 바라보았다.

지옥의 시련을 클리어하고 획득한 보상, 악마의 펜타그램.

내가 이 펜타그램을 얻은 것은 이번 삶이 최초였다.

‘이것도 내 새로운 재능과 더불어 이전 삶에 없던 변수로군. 이상해.’

하지만 그것도 퀸소히니베가 제정신이 맞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가장 의심 가는 말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너, 정말로 용이냐?”

“너도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야?”

“어디 한번 증명해 봐라. 그래야 믿지.”

내가 팔짱을 끼자 퀸소히니베는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보여주면 되겠네.”

“뭐를?”

“하늘.”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퀸소히니베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다가.

별안간 나는 고개를 올렸다.

저물어가는 석양빛이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졌다.

“어어?”

나는 나도 모르게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건물 한 채, 두 채, 아니, 세 채?

도대체 얼마나 덩치가 큰 거야?

옛이야기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전설적인 종족.

황색대륙에 군림하는 중립의 힘.

절로 오금이 저리며 죽음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보는 커다란 용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카아아악-!”

선홍의 용이 포효하자 허공이 찢길 것만 같았다.

그릇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울음에 파묻혔다.

칼자루를 쥐었지만 휘두를 새조차 없었다.

나는 용의 발톱에 몸의 주도권을 뺏겼다.

회귀자들이 놀라서 뒷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뭐, 뭐야? 갑자기?”

“용이다!”

“범철을 잡아가려고 하고 있어요!”

“대장! 안 돼요!”

그러나 상황은 너무 늦고 말았다.

“으아아악!”

밥 먹던 도중에.

나는 용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

구름 위를 넘기며, 도시가 쌀알처럼 보였다.

붉은 노을이 용의 전신을 비추었다.

퀸소히니베는 어머니 외의 생물과 하늘을 오른 것이 처음이다.

“잘 봐. 몹시 아름답지 않니? 너희 인간들은 모르는 것이야.”

그러나 들려온 대답에 그녀는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발톱에 잡혀있는 인간이 혼신을 다해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빨리 내려가야겠네.’

퀸소히니베는 미소를 흘리며 대가리를 낮추었다.

***

나는 비틀거리며 뒷마당에 내려섰다.

그새 얼마나 많은 욕을 내뱉었는지 목이 다 쉬었다.

하늘에서의 10분이 열흘처럼 느껴졌다.

생사를 뒤흔든 하늘산책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곧바로 카티에가 울면서 뛰쳐나와 내 품에 안겼다.

“대자앙!”

소녀는 세상이 무너질 듯 대성통곡했고, 나도 혈색이 나빴다.

우리는 갓 상봉한 가족처럼 서로를 애타게 끌어안았다.

카티에는 울먹였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 투정부려서 죄송했어요.”

“나도 꿀밤 때리려 해 미안했다.”

“죽지 마요!”

“살아가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용이 땅에 발을 디뎠다.

퀸소히니베는 짓궂은 아가씨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오랜만에 너무 재밌었어. 좀 더 오래 산책하고 싶었는데.”

“입 닥쳐요, 비쩍 마른 도마뱀!”

카티에가 그녀를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장담컨대 산책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후손들은 용에게 납치된 남자를 구하러 간 용맹무쌍한 성녀의 신화를 전해 들었을 거다.

“다행히 돌아오셨군요. 기다리다 계속 소식이 없으면 용을 뒤쫓아 가려고 채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헤르탄은 눈물 콧물 범벅인 소녀에 비하면 굉장히 침착했다.

나는 그를 보면서 힘없이 말했다.

“헤르탄.”

“구토할 양동이가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었다.

소수 인원으로 거물을 이기기 위해선 인간을 초월한 화력이 필요하다

나는 땅에 떨어진 닭을 집어먹는 퀸소히니베를 가리켰다.

“거물을 압도할 화력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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