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24화
나는 말을 더듬는 청년을 보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나는 버, 버, 범철이 아니라 범철입니다만.”
“죄,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할 것까진 없고.”
살아 있는 시민들이 의아해하며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범철? 저게 범철이라고?”
“무슨 소리야? 범철은 검사지, 마법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저 사람이 범철이라고 그랬는데?”
이런, 괜히 남들한테까지 내 신분이 밝혀져선 좋을 게 없지.
나는 웃으며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내가 회차마다 범철을 닮았단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그제야 시민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입가에 검지를 올리고 속삭였다.
“내가 범철이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제, 제자로 받아주세요!”
“예?”
“아, 아니, 이게 아니고! 알겠습니다!”
어째 상당히 얼빵한 친구로군.
나는 청년을 일으켜 준 뒤 물었다.
“나는 자살기도회 지부장을 찾고 있습니다만.”
“예? 그, 그건 저인데요.”
“아, 잘됐군요.”
괜히 귀찮게 찾을 필요 없게 됐군.
청년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저, 저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볼 일로……?”
“우선 적들부터 전부 휩쓸어버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나는 몬스터가 군집된 장소로 걸어갔다.
기백의 리자드맨들이 동족을 원수처럼 간주하며 싸우고 있다.
펼친 책의 귀퉁이를 매만진다.
‘광란의 서가 불살라진 이유가 있군.’
과연 금서는 금서였다.
전쟁에 이보다 유용한 마법서가 없을 듯했다.
적들이 서로 죽고, 죽여주니 괜히 싸울 필요 없이 간편하다.
‘물론 그만큼 마나 소모량이 방대하지만.’
투명화랑은 비교도 안 될 수준의 마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법적 재능은 마탑주조차 질투하는 SSS급이다.
마나회복속도를 올리는 장비, 화염 봉헌 팔찌를 착용한 것도 묘수였다.
‘아직은 생각보다 버틸 만해.’
나는 광란의 서가 폭식하듯 빨아들이는 마나 소모를 견뎌냈다.
본래 저주받은 책에 손을 댄 사람은 최후가 나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뒷맛까지 깔끔했다.
‘원래 책은 읽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른 거지.’
내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리자드 맨들이 더욱 흉포해졌다.
나는 보유 마나가 바닥을 길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가장 위험한 순간, 곧바로 광란의 서를 덮어버렸다.
[광란의 서를 쓰고도 뒤탈이 없는 네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32개의 분대, 280마리의 리자드맨을 괴멸시켰습니다.]
[중규모 하급 몬스터 집단을 소멸시켜 마력, 체력이 1씩 오릅니다.]
[피를 쏟는 파멸의 망토 효과로 능력치 성장 효율이 증가합니다.]
[힘이 1 추가로 올랐습니다.]
‘제법 보상이 짭짤한 사냥이군.’
능력치가 효율적으로 오를수록 앞길이 수월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내 발치 아래, 몬스터의 시체가 그득했다.
몰살沒殺.
이것이 진정한 마법의 위력이었다.
‘조금만 늦게 덮었으면 타락해 버렸을지도 몰라.’
나는 아찔해져서 입술을 핥았다.
지금은 고작 리자드맨 처치가 전부지만.
좀 더 성장하고서 사용했다면 군대조차 괴멸시킬 수준이었다.
“쿠라락!”
“쿠라라락!”
숫자가 숫자이니만큼 아직도 생존해 있는 리자드맨들이 있었다.
20마리 남짓한 리자드맨들은 뒤늦게 제정신을 차리고 포효했다.
나는 책을 집어넣고 칼을 뽑아 들었다.
죽이려고 다가오는 리자드맨을 베기 위해 휘두르려는 찰나.
콰작!
내 등 뒤에서 날아든 곰발이 리자드맨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거무튀튀한 털이 돋아난 듬직한 발은, 분명 곰의 발이었다.
‘곰발?’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오른쪽 주먹이 곰발로 뒤바뀐 헤르탄이 나를 지나쳤다.
“헤르탄…… 드루이드였습니까?”
“실로 사악한 산적에게 어울리는 직업이지요.”
드루이드Druid는 산림의 주술사다.
자연과 친화되어 정령, 나무를 다루고 맹수로도 변신한다.
그러나 설마 근육질 헤르탄이 성스러운 드루이드였을 줄이야.
‘상상도 못 해본 조합인데, 화력은 끝내주네.’
나무지배와 부위맹수변신!
몬스터를 나무덩굴로 휘감고 곰발로 후려치면 대가리가 찌그러졌다.
호쾌한 괴력을 담은 맹수의 주먹에 적들은 사냥감에 불과했다.
나도 혀를 내두르며 다가오는 리자드맨들을 칼로 척살했다.
리자드맨들에게 얻어맞아도 불멸자의 갑의는 끄떡없었다.
“크라락!”
도리어 공격을 받을 때마다 초록색 불꽃이 갑옷을 휘감았다.
피격 시 10% 확률로 소환되는 명계의 잔불!
쉽사리 꺼지지 않는 불꽃 탓에 붙자 리자드맨들은 고통받았다.
‘거기다 쉽게 지치질 않는군.’
생명체를 죽일 때마다 기력을 재생시켜 주는 망토!
나는 마지막까지 생존한 리자드맨의 머리를 깨끗이 박살 내버렸다.
[방어전에 성공했습니다!]
[크레스 시를 안전하게 지켜내 도시의 공헌도를 200 획득했습니다.]
[방어전의 최고 기여자입니다.]
[도시회당의 종을 울리면 일반 등급 칭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헤르탄은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둘러보다 나를 바라봤다.
“범철, 그대는 지나온 삶보다 괴물이 되었군요.”
“나는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아요.”
카티에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방울떡처럼 말랑말랑한 소녀의 양쪽 뺨을 꼬집었다.
“인마, 넌 우리 싸울 땐 뭐하다가 지금 걸어 나왔냐?”
“나은 기저을 저부 쓰며 주어요.”
“뭐?”
나는 뺨을 놓고서 되물었다.
카티에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자기 뺨에 살살 문질렀다.
“나는 기적을 전부 쓰면 죽어요. 저것들한테 쓰긴 아깝잖아요.”
“뭐, 죽는다고?”
“성녀가 그래요. 강한 기적을 쓸수록 검은 머리칼이 늘어나고 아주 심하면 수명이 단축돼요. 나는 흰 머리칼이 전부 검어지면 죽게 되죠.”
그러고 보니 기적을 쓰더니 검어진 머리칼이 조금 늘어났다.
다행히 지금 카티에의 검은 머리칼은 고작 몇 올밖에 안 됐다.
나는 소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너, 탈모 조심해라.”
“……대머리여도 기적 많이 쓰면 죽는 조건은 똑같거든요.”
***
뎅-! 뎅-! 뎅-!
내가 도시회당 종을 울리자 크레스 시에 깨끗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야흐로 종전을 알리는 소리였다.
[도시회당의 종을 울렸습니다.]
[일반 등급 칭호 ‘크레스의 영웅’을 획득하였습니다.]
[지속효과: 체력이 3 오릅니다.]
회귀자는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소리 따윈 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런 것을 바라고 벌인 짓이 아니고.
그러니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 따윈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더, 덕분에 이번 회차를 살아남았어요.”
그러나 내 예상은 틀렸다.
내가 구해준 청년은 허리까지 굽히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저는 자살기도회 크레스 시 지부장 암론이라고 합니다.”
“범철입니다. 이쪽은 카티에, 헤르탄이고요.”
암론을 포함해 살아남은 자살기도회 일원은 6명에 불과했다.
자살기도회 일원들은 하나같이 나를 경탄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하긴 평생 칼만 쓰던 작자가 마법까지 써댔으니 그럴 만한가.
헤르탄이 암론에게 본론부터 말했다.
“실례지만, 본부 쪽에 연락이 닿았으면 합니다.”
“무슨 중요한 볼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자살기도회 본부장과 안면이 있습니다.”
“아……!”
암론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난처한 어투로 말했다.
“사실 그게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말입니까?”
“지금 본부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거물’ 중 한 명 때문에요.”
“거물이라면…….”
“예, 멸살군주 바르녹. 그가 자살기도회 본부를 점령하려 하고 있습니다.”
헤르탄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범철. 일이 까다롭게 됐습니다.”
“왜 그러는 겁니까?”
“거물은 일개 회귀자들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협상하거나 피해갈 순 없는 겁니까?”
“본부로 통하는 길목에 도주할 구간은 없습니다. 또한, 그는 협상의 여지를 줄 인물도 아닙니다.”
“그럼 만일 거물에게 대항한다면?”
“죽겠지요. 그대라도 분명히.”
단칼에 대답이 돌아왔다.
헤르탄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거물이 그만큼 막강하단 것이다.
그는 확정적으로 말했다.
“소수로 거물을 이기려면 인간을 초월한 화력이 필요할 겁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구겼다.
막막하군. 아크 리치를 죽이려면 자살기도회의 협력이 꼭 필요할 텐데.
복잡한 심경에 옆 사람을 돌아봤다.
카티에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장.”
“왜?”
“하늘에서 여자가 떨어져요.”
나는 스스로의 지독한 편견에 충격 받고 말았다.
“그래, 어느 남자인들 그런 낭만을 꿈꾸지 않겠냐만 소녀인 너조차 그런 환상을 바랄 줄은 몰랐구나. 역시 취향에는 폭넓은 이해를…….”
“헛것이 아니라 진짜라구요! 어서 물러나요!”
카티에가 나의 손을 다급히 붙잡고 잡아당겼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얼결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따라서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우리가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무엇인가 추락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회귀자들조차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걸어오는 형체는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갓 스물은 된 것 같은 앳된 외모.
눈높이가 거의 나랑 비슷할 만큼 키가 크다.
하지만 표정은 먹구름처럼 어둡고, 해골만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 여자가 대뜸 내 왼쪽 손목을 잡아채곤 말하는 것이었다.
“찾았다. 붉은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