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23화
내가 펼친 마법서는 백색이었다.
그러나 손에 마력을 담는 순간 다채로운 빛깔이 일렁였다.
마법의 시련을 깨고 획득한 보상.
『흉내쟁이 마법서』
수수께끼의 책. 밝혀진 바가 없다.
가장 처음에는 이렇게만 설명이 보였었다.
그러나 책을 펼치고 종잇장을 만졌을 때 옵션이 변화했다.
[A급 이상의 마법재능을 충족해 마법서 성능이 전부 밝혀집니다.]
『흉내쟁이 마법서』
아득히 살아온 마술사가 저술한 마법서. 내용이 너무 요상해 어지간한 재능이 없다면 읽을 수조차 없다.
+하루 1번, 주인의 역량 및 성향에 따라 다양한 책으로 바뀐다.
+첫 번째 변신은 주인이 원하는 책으로 결정할 수 있다.
‘모습을 바꾸는 마법서.’
어떠한 서적으로든 변화시킬 수가 있는 놀라운 책.
잊혀 버린 역사책, 누군가 숨긴 비밀스러운 일기장, 전설의 마법서.
가령 운석소환서나 시간정지 책은 어떨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곧바로 붉은 글귀가 떴다.
[9클래스 마법서로 바꾸기에 마법의 경지가 미숙합니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하기야 나는 아직 1서클 마법밖에는 익히지 못했으니까.’
앞으로 2번 투명화를 쓸 수 있긴 하지만 밴시 대모의 반지 덕분이다.
자력으로 익힌 마법들의 수준이 낮으니 책의 변신이 제한됐다.
나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야 가장 최적의 책을 손에 넣었다.
‘이거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내가 바꾼 책의 모습은 흉측했다.
피투성이 살가죽으로 된 표지에 빨간 이빨이 우둘투둘 달렸다.
이계에서 불살라진 금서禁書 중 한 권.
[금단서적 제1권, 광란의 서]
잿빛의 교주, 키아덴이 숨겨놓은 일곱 권의 금단서적 중 일 권. 광기 서린 찬양심이 스며들어 있다.
+적들에게 광란의 꼭두각시 저주를 선포한다.
+흑마법사가 사용할 경우, 광범위를 언데드의 대지로 일군다.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며, 모든 마나를 소진하면 타락된다.
이계의 금서들!
하나같이 강력한 힘을 지녔으나 불행을 일으킨다고 한다.
나는 10년을 이계에 살면서 금서에 관한 소문을 자주 들었다.
‘광란의 서는 금서목록에서 가장 연약한 하위권에 속한다.’
마법서클의 제한이 없지만, 마나 사용량이 무시무시하다.
거기다 타락의 위험성까지 지녔다.
‘괴담으로만 전해 듣던 금서를 설마 내가 손에 쥐게 될 줄이야.’
나는 책등을 꽉 잡았다.
카티에는 쓰러질 듯이 놀랐다.
“대장, 그 책은?”
두 사람은 회귀자답게 내가 쥔 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헤르탄이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만류했다.
“당장 그 책을 내려놓으십시오, 범철. 그대가 쓰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입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대마법사에 가까운 마나량을 겸비하지 않았다면, 광란의 서는 모든 마나를 빨아먹고 소유자를 타락시켜 버립니다.”
“그럼 괜찮겠군요.”
“예?”
나는 소도시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곳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고 보니 아직 헤르탄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었군.
“이번 삶에서 나에겐 칼에 버금가는 마법의 재능이 생겼습니다.”
일행은 존중하지만 나는 주체적인 인간이다.
회귀자들의 의견을 묵살해 버리고.
나는 광란의 서를 펼쳤다.
***
거지 같은 싸움이 종막에 치닫는다.
자살기도회 크레스 시 지부장 암론은 피가 섞인 땀을 닦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시민들은 대부분 죽어버린 데다가.
20마리를 넘게 죽였는데도 리자드 맨들은 줄어들 기세가 없었다.
“후.”
회귀자라서 죽음이 두렵진 않다.
그러나 이번 삶만큼은 죽기 싫었다.
‘제기랄, 이렇게 가버리기엔 이번 삶의 회차목표가 너무 아까운데.’
이 눈곱만한 소도시는 곧 리자드맨에게 괴멸당할 처지다.
윤회수뇌부조차 포기한 120회차.
방비는 진즉에 무너졌고 시민들은 싸울 의욕조차 없었다.
그러나 암론은 끝까지 칼을 놓지 않았다.
“쿠라락!”
뒤에서 들려온 울음소리.
암론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칼을 뒤로 내찔렀다.
그러자 등을 기습하려던 리자드맨의 배가 꿰뚫렸다.
그가 멋들어지게 담담히 칼을 뽑으려던 찰나.
“쿠라라락!”
“어?”
암론은 잊고 있었던 전생지식을 몸으로 되새겼다.
리자드맨은 배가 찔렸다고 즉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힘을 준 손톱이 그의 뒤통수를 사납게 후려갈겼다.
“아악!”
암론은 도시 한복판을 험하게 굴렀다.
칼은 놓치고, 뒤통수에서 피가 질질 흘렀다.
그는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회, 회차 초반은 이래서 짜증 나. 맷집이 너무 부족하잖아.’
전생에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회귀하면 비실한 몸 그대로다.
배가 꿰뚫렸던 리자드맨이 야멸치게 뛰어온다.
하지만 암론은 일어서지 못했다.
‘이렇게 또 이번 삶이 끝나는구나. 하긴 내가 그렇지, 뭘.’
역시나 회귀해도 안 될 놈은 안 된다.
먼지투성이 바닥에 엎드려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찰나. 이변이 벌어졌다.
“어?”
갑작스레 쾌청한 햇살이 먹구름에 가려졌다.
무너지는 도시에 어둠이 들어찬다.
그에게 다가오던 리자드맨은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리곤 새빨개진 눈으로 울부짖고 다른 리자드맨을 공격했다.
“크라락!”
“크라라락!”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은 그 리자드맨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리자드맨들은 서로 광기에 찬 울음을 쏟으며 아군을 공격했다.
눈앞에 있는 시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들끼리만 싸웠다.
‘우린 내버려 두고 몬스터들끼리만 싸우잖아?’
갑작스레 소도시에 드리워진 먹구름.
자연적인 현상은 아닐 테니, 분명 마법이다.
그러나 암론은 의문스러웠다.
‘이상하다. 회차 초반부터 이렇게 강력한 흑마법을 쓸 수 있는 회귀자는 이런 촌구석에 볼일 없을 텐데?’
어쨌거나 간신히 살아남았다.
암론은 한숨을 쉬며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악운은 끝나지 않았다.
“쿠라라락!”
“쿠락! 쿠락!”
양측에서 리자드맨 수십 마리가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암론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들끼리 이곳에서 싸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싸움이 붙으면 그는 묵사발이 될 것이다.
암론은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 이것들아, 다른 데 가서 싸우란 말이야!’
도망치려 해도 늦었다.
결국 이렇게 이번 회차를 놓치게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장대한 비명이 울렸다.
“쿠라라라락!”
암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리자드맨들 수십 마리가 각자 스스로의 목을 찌르며 자멸했다.
털썩 쓰러지는 몬스터들을 보며 암론도 털썩 쓰러졌다.
‘이,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야?’
바로 그때.
저벅저벅.
옆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흉측한 마법서를 든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왼쪽 손등에 붉은 별표가 새겨져 있었다.
암론은 눈동자를 좁혔다.
‘저 사람은…….’
저 남자가 흑마법을 써서 리자드맨들이 서로 죽이게 만든 건가?
그러나 암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당신만 제일 열심히 싸우던데.”
그 남자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줬다.
마른침을 삼키던 암론은 경외심에 사로잡혀서 몸을 떨었다.
지나온 삶, 먼발치에서나 봐왔던 뒷모습.
칼을 쓰는 회귀자라면 절대 모를 리가 없는 그 이름.
존경하던 영웅이 직접 말을 걸자, 암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버, 버, 범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