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21화
“전적으로 저의 잘못입니다.”
120번이나 살면 사죄의 스케일도 커지나보다.
헤르탄은 사과 한마디로 끝내려 들지 않았다.
그가 야멸치게 칼을 뽑았지만,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결해 봤자 회귀밖에 더합니까?”
“뒤통수에 꽂아서 식물인간이 되려 합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그 숙달된 자해능력은 인정하지만, 거두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헤르탄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칼을 집어넣었다.
“과연 지나온 삶처럼 제 헛짓을 말려주시는군요. 탄복했습니다.”
“…….”
헤르탄은 장대한 기골이지만 아로즈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석굴이 좁았고 알몸이라서 깃털세례를 처맞은 것이다.
기절한 그는 식량 보관고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깨어나자마자 문을 부수고 나와서 그대를 찾았습니다.”
“맨몸으로 문을 부쉈단 말입니까?”
“육체는 사물보다 위대합니다.”
기괴한 답변이로군.
한편 나는 옆에 있는 카티에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너 어째 검은 머리칼이 몇 가닥 늘어났다?”
“대장이 나한테 관심이 늘어난 것처럼 말이에요?”
저거 말하는 것 좀 보게.
나는 괜스레 입술을 핥으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하여간, 이게 네가 벌인 짓이라고?”
산채 주위.
30명은 될법한 남자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떼죽음이지만 핏자국은 한 방울도 없다.
“내가 기적을 행했어요.”
“아니, 성녀라면 사람을 구원하는 데 기적을 써야 하는 것 아니야?”
“흥. 쓸데없는 편견. 버림받은 세상에서는 죽음도 일종의 구원이에요.”
카티에는 토라진 눈초리로 날 봤다.
나는 인상을 쓰다가 문득 떠올라서 말했다.
“그런데 원래는 보름날이 지나야만 기적을 쓸 수 있다면서?”
“헤르탄이 은밀히 전해준 비약 덕분이에요.”
나는 시체를 들어서 산 아래에 무단 투기하는 거한을 바라봤다.
그도 자신의 동생이 배신했단 것을 알고 있었던 거군.
묵직한 외견과는 다르게 의외로 치밀한 일면이었다.
“무슨 비약을 마셨는데?”
“육체 나이가 몇 개월 늙었어요.”
“나이?”
엄청난 효과를 예상했지만 실상은 별로였다.
카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는 완전한 19살이 된 후에야 기적을 쓸 자격을 얻어요.”
아아, 그러면 7월의 보름날이 카티에의 생일이었던 거군.
이계에는 따로 양력이 없으니까.
나는 시체가 떨어뜨린 비수를 주워 들며 물었다.
“기적으로 이런 대량학살도 막 할 수 있냐?”
“이건 약과예요. 기적은 그저 생명을 없애는 것에서 끝나지 않아요.”
카티에는 호언장담했다.
“나는 대장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요.”
“왜, 쌀알 없이 밥이라도 지으려고? 예시를 들어봐.”
“음. 남성의 고개 숙인 그것을 일으키는 기적도 있구요.”
나는 성녀들을 존경키로 했다.
기적이 괜히 기적이 아니다.
나는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가까이 지내자꾸나.”
“꼬시지 마요. 대장은 늙어서도 팔팔하니까.”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습관처럼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카티에가 물었다.
“석산은 언제 떠날 건가요?”
“조금 쉬었다가. 나는 바람 좀 쐐고 올게.”
***
절벽을 오르고 고산지대를 걷는다.
땀이 흐르고 손바닥이 거칠해졌다.
그럼에도 쉬지 않았다.
“아.”
찾던 것을 발견하고 나는 멈춰 섰다.
아로즈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여름철이기에 부패가 빠르다.
나는 조금씩 변색되어 가는 시체를 업었다.
어제와 달리, 그녀의 살결에서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흙이 있는 지대로 가서 땅을 팠다.
자갈이 많고, 맨손으로 파자니 오래 걸렸다.
그래도 끈기 있게 깊숙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나는 구덩이에 아로즈를 내려놓았다.
가슴에 양손을 가지런히 올린 모습이 자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를 잠시간 보다가, 나는 흙을 묻었다.
흙더미 앞에 나는 비석을 세웠다.
산길을 걸어오면서 꺾어온 들꽃 한 송이를 올린다.
나는 전생의 아내의 무덤을 세웠다.
“그대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범철.”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슬프지 않습니까? 당신 여동생이 죽었는데.”
“회귀자에게 죽음이 슬펐던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이젠 슬퍼해야만 할 겁니다. 내가 사망회귀를 멈출 테니까.”
헤르탄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회차목표를 이룰 생각이십니까?”
“가장 먼저, 황색대륙의 아크 리치부터 죽여야 합니다.”
“지금껏 대륙의 지배자를 죽였던 회귀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최초로 이뤄내야겠습니다.”
나는 아로즈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녀처럼 반복되는 삶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개같은 회귀를 멈춰야만 한다.
뒤로 돌아서 헤르탄을 보았다.
“회귀자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낼 겁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과연.”
그는 잠시 고개를 높이 들었다.
하늘 저편에 깃털 같은 흰 구름이 떠다닌다.
“아로즈는 회귀를 원하지 않았지요. 나의 동생은 회귀를 멈추고 싶다고, 삶을 끝내고 싶다고, 한때 내게 슬픔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헤르탄이 날 복잡한 눈빛으로 보다가 무릎을 꿇었다.
전생의 신하가 과거의 왕에게 절했다.
“함께 모시겠습니다. 일평생 아크 리치를 쫓는 집단을 압니다.”
“좋습니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그를 흘깃 보며 엄숙히 말했다.
“당신의 치부를 감추십시오.”
***
마침내 바지를 차려입은 헤르탄은 두툼한 배낭을 메었다.
산채에서 온갖 짐을 담아온 모양이다.
“복슬아. 기뻐해라. 이제 네가 석산의 주인이다.”
“꾸에엑!”
왕멧돼지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코를 비볐다.
저런 맹수를 애완동물로 길들일 수 있다니, 조련이란 참 놀랍군.
한편 카티에는 생긋생긋 웃고 있었다.
“헤르탄과 동행하는 것은 대환영이에요.”
“예전이랑 태도가 왜 이렇게 다르냐?”
“그는 요리 솜씨가 좋고, 대장을 잠자리로 꼬드길 염려도 없거든요.”
어째 동행을 환영하는 기준이 심히 괴악하군.
헤르탄이 얼굴에 묻은 멧돼지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준비는 마쳤습니다. 이제 떠나시겠습니까?”
불현듯 석산을 돌아보았다.
머나먼 발치에 아로즈의 무덤이 있다.
나는 결코 그녀를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 내 자식을 그리워해 주던 한 여자를 기억할 것이다.
“갑시다.”
우리 셋은 석산을 내려갔다.
눈물 젖은 왕멧돼지의 포효가 메아리쳤다.
***
황색대륙에는 용들이 살아간다.
퀸소히니베는 아직 어리지만 가장 재능 넘치는 용이었다.
겨우 80살이란 나이에 제 둥지를 틀었으니 말이다.
새끼용이던 시절부터 그녀는 인간을 천대했다.
‘우둔하고 나약한 것들. 너희 따윈 내 발치에서만 살아가야 해.’
퀸소히니베는 인간노예 부리는 것을 즐거워했다.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조아리는 노예는 그녀의 품격을 드높였다.
물론 자애로운 어머니는 그런 딸의 품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퀸소. 용이란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만 한다.”
“어머니께서 그러시니까 다른 대륙의 용들이 우릴 얕보는 거예요.”
퀸소히니베는 사춘기 계집애가 그렇듯 부모의 둥지가 싫었다.
그래서 인간들을 납치해 본인만의 둥지를 건설했다.
가장 깊숙한 곳엔 어머니한테서 훔친 보물들까지 장식해 뒀다.
‘정말로 완벽해’
퀸소히니베는 금화에 몸을 파묻고 노예들을 지켜봤다.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인간노예들.
첫 독립생활에는 그녀가 꿈꾸었던 모든 것들이 있었다.
‘이게 삶이야. 너무 행복해.’
그녀는 매일 내일을 향한 기대에 부풀며 잠을 청했다.
퀸소히니베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신화로 남기를 바랐다.
언제나 추앙받길 원했고, 비정한 여왕이길 원했다.
그런데 사흘 전, 사달이 벌어졌다.
“아오, 진짜 아깝게 죽었네! 어떻게 거기서 폭탄이 터지냐!”
“아, 배고파. 회귀할 때마다 참 보기 싫고 답답한 곳일세.”
“자, 자!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다들 아시죠? 우선 고블린 감독관들부터 처리합시다!”
멀쩡히 일하던 노예들이 갑자기 눈빛이 변했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알 수 없는 말을 나누며 사역된 몬스터들을 일사불란하게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아닌 반란에 퀸소히니베는 불호령을 외쳤다.
“지금 너희 뭣들하고 있는 것이야!”
평소라면 노예들 전부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떠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인간노예들은 겁먹기는커녕 대놓고 비웃었다.
“저 용 놈이 또 뭐라는 거야.”
“아, 죽이든지, 먹든지, 말든지! 시끄러워 죽겠네.”
“아직 어려서 브레스도 내뿜지 못하는 주제에!”
특히 마지막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움찔 흔들렸다.
퀸소히니베는 기가 차서 말을 잇지도 못했다.
“너, 너희들!”
콰앙!
홧김에 발톱으로 내려쳐도 인간들은 겁먹지 않았다.
공격이 어디서 올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피해 버렸다.
오히려 그녀를 이용해 둥지가 부서지자 멋대로 탈출해 버렸다.
나중에야 그녀는 노예들이 일부러 도발했다는 것을 알았다.
퀸소히니베는 너무 화가 났지만 노예들을 쫓아가진 못했다.
보물 때문에 둥지를 함부로 비울 수 없었다.
거짓말처럼 노예가 탈출하자마자 바로 침입자들이 들이닥쳤다.
“이야! 여기가 용 둥지 중에서 제일 보물 훔치기 쉽다면서?”
“여기 사는 용이 그렇게 만만하대!”
“매번 경쟁이 치열했었는데…… 이번 삶에서는 우리가 일등이다!”
수백 명의 모험가가 주인조차 모르는 둥지 샛길로 침입했다.
그녀가 사역한 몬스터들은 추풍낙엽처럼 사망해 버렸다.
“꺼져라-! 인간 놈들!”
퀸소히니베는 강했지만, 아직 어렸다.
처음 둥지를 지켜보는 것이라서 방비조차 미숙했다.
고작 하룻밤 만에 그녀는 어머니의 보물까지 깨끗이 털리고 말았다.
‘미쳤어, 인간 놈들은 전부 미쳤어!’
퀸소히니베는 너무 분해서 이빨을 갈았다.
완벽하던 독립생활이 하루아침에 망쳐진 것이다.
‘아니야. 지금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결국 퀸소히니베는 우울증까지 생겼다.
용이 우울증에 걸려 봤다는 말은 태어나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자다가도 울었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어머니의 둥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보물까지 몰래 훔쳐갔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퀸소히니베는 노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밤새워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하소연을 들어주는 노예가 있다면, 이 지독한 우울증도 금세 가라앉으리라.
하지만 황색대륙에선 이제 정상적인 인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들은 죄다 어딘가 정신이 엇나갔거나 미쳐 버렸다.
억지로 노예를 삼으려고 해도 제멋대로 자살하거나 도망가 버린다.
퀸소히니베는 그런 인간들에게 완전히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외로움에 젖어서 밤새 울었다.
‘노예를 찾고 싶어. 힘겨울 때 내 곁에 있어줄 노예가 필요해.’
며칠 힘없이 식음을 전폐하던 때.
별안간 귓가에 수상한 속삭임이 스쳤다.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아라.」
“누구지? 지금 누가 감히 고귀한 용에게 명령한 것이야?”
퀸소히니베는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또다시 속삭임이 들려왔다.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아라.」
처음엔 헛것이 들리나 싶었다.
그러나 속삭임은 며칠째 계속 들려 왔다.
퀸소히니베는 대번에 느꼈다.
‘용에게까지 귓속말을 해대니 범상치 않은 존재가 틀림없어.’
붉은 별을 가진 인간을 찾으라고?
본래 그녀는 남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간을 찾아야만 이 시끄러운 속삭임도 멈출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우울함을 잊기 위해서 뭔가 해야만 했다.
‘혹시 그 인간이 내 노예가 되어줄지도 몰라.’
선홍의 용은 오래간만에 둥지 밖으로 날아올랐다.
***
나는 왼쪽 손등의 펜타그램을 긁적였다.
붉은 별표가 왠지 가려웠다.
괜스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좋은 일이라도 찾아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