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20화
그때 괴로워하던 아로즈가 발버둥을 멈췄다.
나는 숨이 끊겼다고 느낄 뻔했다.
갑자기 그녀의 등 뒤에서 검은 깃털의 날개가 솟아났다.
파바박!
까만 날개가 펄럭이자 내 오른손에 깃털이 우수수 꽂혔다.
건틀릿 틈새를 파고든 깃털 끝은 화살촉처럼 날카로웠다.
오른손에서 피가 흐르며 힘이 빠졌다.
‘역시 힘을 숨기고 있었군.’
헤르탄이 괜히 당한 것이 아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팽개쳤다.
아로즈는 보이지 않는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한순간.
펄럭!
까만 날개를 활짝 편 그녀가 절벽 위까지 날아올랐다.
아로즈는 눈썹을 찡그리며 내가 죄었던 목을 매만졌다.
“변함없이 손이 거치네. 회귀할 뻔했잖아.”
나는 칼자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올렸다.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으로 접근한 거냐?”
“전혀. 내가 당신을 죽일 이유는 없지.”
“그럼 왜.”
“전 남편에 대한 예의를 지켜서 말해줄게.”
아로즈는 목에서 손을 내렸다.
그녀의 목에는 내 손자국이 선명했다.
“당신을 납치해 달라고 부탁한 거물이 있었거든.”
“거물?”
“회귀할 때마다 힘이 더욱 강력해지는, 그래서 영향력을 지닌 윗분.”
순간 회귀 시점 초반, 제자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거물들이 나의 재능을 탐낼 거라고.
그게 이런 의미였던 걸까?
“그자가 내게 힘을 부여했어. 그래서 이런 일도 가능해진 거야.”
아로즈는 펄럭이는 검은 날개를 으쓱였다.
나는 웃음조차 짓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회귀자한테 돈은 쓸모없을 테고, 무슨 보상을 받기로 했기에?”
“아이.”
“뭐?”
아로즈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윽고 그녀가 내뱉은 말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나는 당신의 피를 이은 아이들을 낳고 싶어.”
***
나는 잠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와 아이를 만들고 싶어서 날 납치하려 한다고?
내 표정을 읽은 아로즈가 기가 찬 듯 비웃었다.
“웃기는 착각 마.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럼 무슨 의미지?”
“내가 왜 당신이랑 10번이나 함께 살았는지 알아?”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아로즈는 눈을 부르르 떨면서 날 보았다.
“나는 나의 ‘첫 자식들’을 다시 낳고 싶었어.”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곱씹다가 나는 불현듯 입술을 씹었다.
……잠깐, 설마?
“처음 결혼했던 삶에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나는 네 명의 자식을 낳았고,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지. 하지만 불행은 내가 사고로 죽고 회귀한 이후부터 시작됐어.”
아로즈는 허공을 응시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려는 것만 같았다.
“회귀 시점 이후 태어난 아이는 회귀할 수 없어. 내가 과거로 돌아오자 내가 낳은 자식들은 존재 자체가 없어져 버렸지.”
내 머리 한편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양쪽 귀를 틀어막을 수 없었다.
힘없이 늘어진 오른손이 원망스럽다.
“나는 오열하고, 슬퍼했어. 내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그래서 이후의 삶에서 당신과 결혼했어. 그리고 이전 삶과 똑같이 네 자식을 낳았지. 그런데 태어난 애들은 ‘그 아이들’이 아니었어. 당신과 처음 부부였던 삶에서 낳은 아이들이 아니었다고!”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아기가 결정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1시간, 1분, 1초.
환경이 아주 조금만 변해도 태어나는 아이는 달라지고 만다.
“회귀할지라도 똑같은 아이는 영원히 낳을 수 없어. 나는 10번을 살며 40명의 자식을 낳은 끝에 그 사실을 직시해야만 했지.”
아로즈의 눈동자가 벌게졌다.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었다.
“이사빈, 에이비나, 궤놀브, 로헤릭. 이들이 누구인지 알기나 해? 당신이야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모른다고만 답하겠지!”
나는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으니까.
회귀할 수 없으니까.
“그건…… 내가 처음 당신과 함께 낳았던 아이들의 이름이야.”
아로즈의 뺨에 눈물이 타고 흘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광적인 모성애로 젖어서 떨렸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어느덧 아로즈는 흐느끼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녀가 날 적대하는 회귀자로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울먹였다.
“당신은 모를 거야. 내가 당신과 처음 부부였을 때 낳은 네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당신은…… 절대로, 몰라.”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내 가슴이 지독히 미어졌다.
아로즈는 눈물을 닦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평범히 살아선 그 아이들을 다시 낳을 수 없어. 하지만 ‘그 자’는 당신을 납치해 오면, 내가 당신과 동침해 첫 아이들을 낳을 수 있게 해준다고 했어. 그 거물에겐 충분한 능력이 있으니까.”
나는 이제야 아로즈의 목적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가 가여웠지만, 내가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완전히 미쳤군.”
“나도 알아. 난 미쳤어! 하지만 미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야!”
아로즈는 원망과 울분을 담아서 나에게 소리쳤다.
“내가 전생에 당신 아이들을 낳았다고 했을 때, 나에 관해서 무슨 걱정이라도 해봤어? 별다른 생각조차 안 해봤겠지! 당신은 1회차니까!”
“아로즈.”
나는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며 냉담히 말했다.
“나는 당신의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가 아니야.”
“시끄러워, 닥쳐! 닥쳐! 닥치라고!”
완전히 자제력을 잃은 그녀가 날개를 펼쳤다.
검은 깃털 세례가 내게 쏟아졌다.
깃털마다 치명적인 마비독이 가득하다.
파바박!
바닥을 거칠게 굴렀지만 깃털세례가 따라붙었다.
나는 왼손으로 칼을 뽑아 깃털을 쳐냈다.
막지 못한 깃털은 갑옷을 꿰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런데도 뺨과 발등에 몇 방이 꽂혔다.
‘빌어먹을.’
플랑베르쥬는 본래 양손검이다.
나라도 왼손만으로 쓰자니 크게 느려서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더럽게 성가시군.’
깃털이 꽂힌 곳에 피가 줄줄 흐르고 힘이 쭉 빠진다.
이런 걸 온몸으로 맞았다간 금방 쓰러져 버리고 만다.
그때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불꽃?’
가슴에서 빛이 올라온다.
갑옷에 불길이 요동치고 있었다.
수많은 깃털을 튕겨낸 갑옷이 휘황찬란한 녹색 불길을 일궈내었다.
[불멸자의 갑의가 명계의 잔불을 소환했습니다.]
피격 시 10%의 확률로 명계의 잔불을 소환하는 불멸자의 갑의.
환히 타오르지만 명계의 잔불은 내게 전혀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잔불이 몸에 박힌 깃털을 태우고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나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명계의 잔불. 이거라면 한 손으로도 싸움이 된다.’
갑옷에 깃든 저세상의 불꽃.
한 손으로 양손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왔다.
마력에 집중하자 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밴시대모 반지의 효과!
나는 잠시간 투명화를 시전할 수 있었다.
‘마비독이 담긴 깃털은 무한정 쏠 수는 없다.’
회귀자 살해 재능에서 발현된 변수 창출은 이미 살덩이 문에 써버렸다.
그러나 나는 재능에 의지하지 않고서 아로즈를 제대로 관찰했다.
‘깃털을 쏠 때마다 날갯짓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어.’
나는 뒤로 돌아서 뛰었다.
그러자 아로즈는 영리하게 따라붙었다.
저물어가는 석양에 내 그림자가 노출된 것이다.
“나한테서 모습을 감춘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내 그림자를 노리고 깃털세례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화르륵!
갑옷에 깃든 잔불이 다가오는 깃털을 전부 집어삼켜 소멸시켜 버렸다.
하나씩 쳐내려 할 때보다 훨씬 효율적인 효과.
그러자 아로즈가 얼굴을 구기며 더욱 많은 깃털을 퍼부었다.
파바박!
잔불이 삼키는 깃털도 한계가 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칼을 마구 휘둘러 깃털을 쳐내었다.
왼손만으로 양손검을 휘둘러서 손목에 부담이 컸다.
그러나 아로즈의 깃털도 엄청나게 소모되었다.
‘장소를 바꿔야 한다.’
나는 칼을 휘저으며 응달진 고산지대로 뛰어갔다.
이제 아로즈는 내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소리에만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깃털의 소모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파바박!
아로즈의 날갯짓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고도가 낮아졌다.
그러나 정신이 망가진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나만 쫓고 있었다.
“어디 있어? 어디에 있는 거야!”
수 미터로 낮아졌을 때.
그녀는 등 뒤에서 바위를 타고 뛰어오른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온 힘을 짜내서 검을 내려쳐 왼쪽 날개를 찢어버렸다.
“꺄아악!”
새까만 깃털이 눈발처럼 주위에 흩날렸다.
아로즈는 바닥에 떨어졌고, 나의 투명화도 풀렸다.
나는 턱까지 흐르는 침을 닦았다.
‘제기랄. 입술이 말을 안 듣네.’
뺨에 꽂혔던 깃털 때문에 얼굴이 마비됐다.
표정을 지을 수 없고,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이래서야 ‘거물’의 배후를 캐물을 수도 없겠군.
나는 쓰러진 아로즈에게 다가갔다.
“당신, 당신만은 날 이해해 줘야만 했어!”
그녀는 구차하게 목숨 따윈 구걸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날 쓰러뜨리고 자식들을 다시 보기 위한 욕망만이 가득했다.
아로즈가 한쪽 날개를 비비적거리며 깃털을 쏘려 했다.
화르륵!
“꺄아악!”
나는 그녀의 남은 날개마저 화염구로 불태워 버리고 칼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회귀자 살해 재능에도 불구하고 가슴속 깊이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떨쳐내야만 했다.
‘지금 죽여야만 해.’
아로즈를 살려둬서는 안 된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그녀이다.
어떻게든 쫓아와서 나를 도구로 쓰려들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
무자비해져야만 한다.
이제껏 회귀자들을 죽였던 것처럼.
“당신…….”
아로즈가 날 보며 부르튼 입술을 떨었다.
나는 칼을 거두지 않았다.
마지막.
이번 삶 자체를 포기한 것처럼.
그녀는 눈꺼풀을 감고 쉰 목소리로 독백했다.
“……아이들을 안고 싶어.”
칼끝이 조금 떨린다.
나는 검을 내려쳤고.
피가 흩뿌려졌다.
밤이 내려앉고.
혼자가 되었다.
그 끔찍한 기분 속에서.
나는 고요하게 울부짖었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 쓰러졌던가.
어떻게 산채까지 왔던가.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깨어났군요. 아직 무릎이 저리지 않으니 좀 더 누워 있어도 돼요.”
카티에가 나를 무릎에 눕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헤르탄이 쓰러진 대장을 발견해서 산채까지 데려왔어요. 그도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안채에 쓰러져 쉬고 있구요.”
아, 헤르탄.
그가 다행히 살아 있었나 보군.
피곤해서인가 다쳐서인가.
몸이 바위처럼 무거워 죽겠다.
“마비독이 아직 가라앉질 않았어요.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해요.”
어쩐지 몸에 힘이 없더라니.
뺨에 감각만 좀 살아났을 뿐이다.
나는 숨을 편히 쉬었다.
카티에는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대장.”
왜 그러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카티에가 진솔하게 말했다.
“대장의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헛웃음을 날려주고 싶었다.
그게 갑자기 뭔 소리냐고.
그런데 내 얼굴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제기랄.
어라.
뺨에 뭔가 흐르는데.
설마 내가 지금 울고 있나?
그거 놀랄 일이군.
하품을 한 기억은 없는데.
카티에가 날 내려다봤다.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은 속삭임이 귓속에 들어왔다.
“세상이 괴로워도, 내가 함께 있어 줄게요.”
저 말, 회귀해 오며 나에게 몇 번이나 해줬을까.
소녀가 나의 눈물을 닦아준다.
온화하고 가녀린 손길.
그게 내게는 몹시 뜨거웠다.
쪽팔리게도, 나는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