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18화
가엾은 왕멧돼지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했던 옛 주인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꾸에엑.”
슬프지만 언제까지고 좌절할 순 없다.
그래서 왕멧돼지는 새 주인을 찾기로 했다.
매 끼니마다 산더미처럼 먹이를 마련해 줄 주인을!
“꾸에엑?”
산길을 쏘다니던 왕멧돼지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낯설고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긴 것이다.
돌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순간.
파박!
“꿰에엑!”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단도가 팍 꽂혔다.
왕멧돼지는 화들짝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단도를 던진 남자가 혀를 차자, 다른 남자가 말렸다.
“아서라. 갈 길이 바쁘다.”
“조장. 혈에 한 방 꽂아주면 금방 잡아.”
“제발 일 끝나고 처먹자.”
“멧돼지 고기가 참 육즙이 끝내주는데, 먹을 틈 없다니 슬프네.”
“됐다. 저 산장에 납치할 녀석이 있을 거다.”
왕멧돼지는 멀리서 낯선 불청객들을 바라봤다.
30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무장한 채 석산을 오르고 있었다.
주인으로 삼기엔 위험해 보인다.
“꾸에에.”
계속 신경 쓰자니 배만 고팠다.
왕멧돼지는 대수롭잖게 휙 지나가 버렸다.
***
“아직도 우리 대장을 사랑하나요?”
아로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티에는 곰 가죽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작은 몸집 때문에 소녀가 가구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살짝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랬다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털어놔요. 어째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죠?”
120회차 회귀자란 노련하다.
잠깐의 침묵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아로즈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곤 곧바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성녀님?”
“아로즈. 나도 당신처럼 영악한 회귀자예요.”
카티에는 낡아빠진 소파의 실을 뽑았다.
소녀의 백발 한 가닥처럼 얇고 새하얀 실이다.
“120번의 삶을 완벽히 기억하는 날 속이기란 쉽지 않아요.”
아로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두 사람을 데려온 적이 없어요. 범철이 선택한 거잖아요?”
“10번이나 같이 산 배우자의 선택을 종용하기란 쉬운 일이죠.”
카티에는 검어진 머리칼 한 가닥을 뽑았다.
하얀 실과 검은 머리칼을 매듭지어 본다.
“120회차 간 이 숨겨진 산채는 원수들에게 습격받은 적 없어요. 가장 안전하지만, 반대로 보면 가장 기습하기 좋은 곳이죠.”
“기습이요?”
“암살자들이 기척을 못 숨기네요. 앞문에 20명, 창밖엔 10명쯤 되나요? 하지만 대장을 잡으려면 좀 더 철저해야 했어요. 나조차 아는 것을 그가 눈치 못 챌 리 없으니까.”
아로즈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또한, 가면까지 벗어던졌다.
마침내 드러난 민얼굴에는 싸늘함만이 남았다.
“이제껏 연기하고 있었구나. 너도, 나처럼.”
“처음엔 정말 믿었었어요. 당신은 대장을 해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변심한 거죠?”
아로즈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 전에 말해봐. 어떻게 눈치챘지?”
“전 남편을 돕겠다고 제 발로 찾아 올 여자는 세상에 없으니까.”
조금의 침묵이 흐른 뒤.
“푸하하하!”
아로즈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몸은 비틀거리고 목은 뒤로 꺾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폭소했다.
“그래, 맞아.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지. 그런 여자를 찾는다면 평생을 동화책이나 읽어야 할 꺼야.”
카티에는 참을성 있게 되물었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어요. 왜 마음을 바꿨죠?”
“영웅들이 자결하고, 힘을 가진 악당들만 넘쳐나는 추악한 회차니까.”
아로즈는 웃음을 거두었다.
“윤회수뇌부가 포기한 회차는 이번이 두 번째야. 첫 번째는 어영부영 넘겼지만, ‘거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기회?”
“어차피 윤회수뇌부가 손 놓은 세상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돼.”
그녀는 담담히 고백했다.
“내게 범철을 납치해 달라고 의뢰한 거물이 있었어.”
카티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당신이 맨입으로 일하진 않을 텐데……. 설마.”
아로즈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보아온 웃음 중에서 가장 진실했지만 가장 비참했다.
“아직도 사랑하냐고 물었지?”
아로즈는 눈을 감고 낮게 말했다.
“나는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아. 다만 나의 자식만이 그리울 뿐.”
소녀는 그 말을 이해했고,
그래서 일갈했다.
“당신은 벌거벗고 다니는 당신 오빠보다 미쳤어요.”
아로즈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인정해. 하지만 미치지 않고선 나는 살아갈 수가 없었어.”
그녀는 정신병자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 소녀를 노려본다.
그런 아로즈에게 카티에가 대꾸했다.
“어쨌거나 고마워요. 나에게 친절히도 많은 정보를 알려줬군요.”
아로즈는 냉담한 얼굴로 눈매를 세웠다.
“허세 부리지 마. 너는 어차피 여기서 죽고 회귀할 뿐이야. 보름날이 지나지 않아 기적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
반면에 카티에는 픽 웃었다.
“내가 왜 위험한 당신과 함께 여길 왔는지 아시나요?”
“이제부터 들어볼까?”
“첫째는 대장을 시련방에 무사히 데려주기 위해서.”
카티에는 탁자 위의 빈 병을 가리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저 검은 비약을 마시기 위해서였어요.”
“저거? 능력치만 조금 올려줄 뿐인 비약이잖아.”
“당신이 마셨던 비약은 그랬죠. 두 비약의 빛깔을 탁하게 해서 서로 내용물이 다른 것을 숨겼던 거예요.”
순간 아로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너, 혹시……?”
카티에는 매듭진 실과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뚝.
매듭이 끊겼다.
“당신 오빠는 무섭도록 치밀한 사람이에요. 비약효과가 적절하군요. 보름날이 지나지 않아도 기적을 완벽히 쓸 수 있겠는데요.”
아로즈는 다급히 뒷걸음질 쳤다.
막 터지려는 폭발물을 본 것처럼 낯빛이 창백해진다.
그녀가 목청이 찢어질 것처럼 커다란 고함을 내질렀다.
“모두 덮쳐라! 성녀가 기적을 쓰려 한다!”
파각! 쾅!
암살자들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비수와 칼날이 가녀린 몸을 찢어버리기 직전.
카티에는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늦었어. 멍청이들아.”
석산에 끔찍한 빛이 솟구쳤다.
***
“수고하셨습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원래 산짐승이 많이 돌아다닙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칼의 시련을 끝마친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문밖에 나왔다.
헤르탄은 목석처럼 원래 서 있던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옷을 벗고서 등을 보이십시오.”
“제기랄. 정조에는 성별 없습니다.”
“연고를 발라야 합니다. 범철.”
그가 미리 챙겨온 연고를 발라주자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나는 그 효과에 놀라며 말했다.
“이 연고, 효과 좋은데요?”
“그게 마지막 하나였습니다.”
헤르탄은 구슬프게 대답하며 빵과 우유를 내주었다.
철저한 준비성, 과연 회귀자답군.
나는 우유로 목을 축이고 물었다.
“제가 안에 있는 동안, 밖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1시간 5분 17초입니다.”
“……무섭도록 정확하군요.”
족히 몇 시간은 있었는데 시련방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나 보다.
나는 칼의 시련 보상을 확인했다.
‘우선 능력치가 올랐다.’
체력이 무려 10이나 상승했다.
초심 수련관을 깼을 때의 보상이 힘 3 증가였던 것을 생각하면 족히 3배 이상 효율적인 성장인 셈이다.
‘그리고 아이템.’
『수련꽃 뿌리(미확인)』
씨앗이 아닌, 뿌리부터 성장해 가는 신비로운 수련. 어떠한 효능의 꽃이 피어날지는 미지수이다.
+구정물, 호수, 연못, 바다, 염산. 어느 물가에서든지 잘 자라난다.
+훌륭한 환경에 심을 경우, 능력치를 올려주는 수련꽃이 피어난다.
‘수련꽃의 뿌리라.’
왠지 괜스레 원예가로 살던 때가 떠오르는 미확인 아이템이었다.
‘쟁여두면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우선 나는 배낭 앞쪽 주머니에 수련 뿌리를 곱게 넣어두었다.
헤르탄이 몸을 돌렸다.
“시련도 끝냈으니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죠.”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헤르탄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물었다.
“시련방에 횟수제한은 없습니까?”
“예?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헤르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짐작대로군.
사실 내가 가장 처음 칼의 시련방을 도전한 이유가 있다.
왜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가.
남아 있는 시련 방은 둘이었다.
마법의 시련방.
그리고 120회차 동안 그 누구도 클리어하지 못한…….
“시련방 세 개를 전부 완수할 겁니다. 지옥의 시련방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