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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7화 (17/200)

나만 1회차 017화

끼익.

나는 문을 열고 시련방에 들어섰다.

사람 한 명 없는 한적한 방.

텅 빈 공간에 칼자루만이 산더미처럼 꽂혀 있었다.

[원하는 종류의 칼을 들어주십시오.]

[칼을 쥐는 순간, 시련이 시작됩니다.]

아밍 소드Arming Sword부터 시작해 삼척검, 시미터, 야만스러운 척추골 칼, 투척용 나이프까지 여러 대륙의 다양한 칼이 역수로 꽂혀 있었다.

시련에서는 주어진 칼만 사용할 수 있나 보군.

‘역시 그나마 익숙한 검이 낫겠지.’

나는 가장 기본적인 한손검인 아밍 소드를 들었다.

무슨 시련이 닥쳐올지 모르니 대처하기 쉬운 무난한 칼이 좋다.

칼을 뽑아서 쥐자마자 방의 광경이 빛나며 바뀌었다.

[칼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

나는 칼자루를 꽉 쥐고서 마음을 부여잡았다.

시련 따위, 아크 리치를 죽이기 위해 밟는 발판에 불과하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

눈 부신 빛에 눈을 감았다 뜨자 어지러운 수련 무늬의 벽들이 보였다.

그물처럼 얽힌 뿌리와 그림마다 놓인 수련 꽃송이 벽화가 아름답다.

방 안의 면적보다 훨씬 넓어졌고 천정도 사라져 햇빛이 내려온다.

‘장비가 사라졌어.’

내가 택한 칼과 기본적인 옷차림을 제외하고서 모든 장비가 지워졌다.

그뿐만 아니라 마나의 기운도 느낄 수 없어 마법도 쓸 수 없는 상태.

갑자기 바뀐 주변을 둘러보는데 누군가 벽에 칼을 그으며 다가왔다.

“&*%#$%&*!”

중갑을 입은 창백한 피부의 기사.

무거운 투구를 깊게 눌러써 인상착의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향하는 칼날의 끝이 놈의 적의를 말해주고 있었다.

“&*%#$%&*!”

기사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서 칼을 내찔렀다.

강력한 힘이 담겼지만 느린 동작.

쉽게 흘리듯 피하고 칼을 뽑아서 곧바로 반격을 하려던 찰나.

“어?”

안전한 거리에 머무르던 기사가 갑자기 나의 코앞으로 바로 다가왔다.

“웃!”

반사적으로 황급히 물러났지만 턱 옆이 엷게 베이고 말았다.

흐르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나는 날 선 눈초리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방금 그건 뭐지? 설마 블링크?’

블링크(Blink).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 짧은 거리를 순간이동을 하는 고위마법.

블링크의 무서운 점은 다른 이동계열마법과는 다르게 수인을 맺거나 주문을 외울 필요조차 없단 것이다.

하지만 블링크는 아무나 쉽게 배울 수 없는 마법으로 알고 있는데.

고위마법이 그렇듯 블링크는 상당한 지성을 겸비해야만 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저기 보이는 기사의 행동은 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email protected]%@%%@&!”

기사가 뭔지 모를 괴성을 쏟으며 수련무늬 벽에다가 칼을 그었다.

불가루가 튀며 칼의 이가 상한다.

‘왜 저래? 저놈, 정신이상자인가?’

놈의 태세를 살피며 자세를 고치는데,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시간을 멈추는 고대 평기사의 숨통을 끊어버리십시오.]

[죽으면 시련을 실패하게 됩니다.]

[시련제한시간: 하루]

[시련 난이도: 상上]

나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저놈이 시간을 멈춘다고?’

***

상태창의 내용에 경악한 감정을 돌이킬 새도 없이 기사가 뛰었다.

나는 눈매를 좁히고 칼을 세우며 반격태세를 갖추었으나 허사였다.

“윽!”

이번에도 고대 평기사의 동작이 부자연스럽게 끊겨 거리가 좁혀졌다.

그러나 나 역시 이번에는 순순히 당해주지만은 않았다.

챙!

긴박했다.

즉시 칼을 들어서 얼굴을 방어하지 않았다면 나는 왼눈을 잃었을 거다.

묵직한 일격을 흘려내고 나자 칼자루를 쥔 양손이 저릿저릿했다.

‘아니, 젠장. 시간을 멈추는 적이면 몸이라도 약해야 하는 것 아니야?’

고대 평기사는 완전무결해 보였다.

걸음과 칼부림이 꽤나 느리지만 검술동작이 깔끔하고 힘도 강력하다.

무엇보다 사기적인 시간정지까지.

‘제기랄. 엿 같네.’

시간을 멈추는 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지 쉽사리 감이 잡히질 않았다.

확실한 것은 놈에게 먼저 달려들었다간 나는 분명히 죽는다는 것이다.

“#%@$#%@$%@%!”

고대 평기사가 광인처럼 또 괴성을 지르며 벽에다 마구 칼질을 한다.

그사이 나는 침착함을 되새겼다.

‘우선, 놈의 싸움법을 파악한다.’

시련은 어디까지나 시련!

깨라고 만든 것이니 냉정히 판을 관찰하면 공략의 길이 보일 것이다.

나는 평기사가 달려들기만을 기다리며 철저히 방어에만 집중했다.

‘긴 시간을 멈추지는 못할 거야.’

놈이 원하는 만큼 시간을 정지한다면 나는 진작 죽고 말았을 거다.

고대 평기사가 달려들면 동작이 끊기며 칼이 예상치 못하게 날아왔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칼에 몸이 베여져 있었다.

“크윽!”

다행히도 급소를 다치진 않았다.

평기사는 공격을 하고서 바로 물러나고, 그 이후 덤벼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연속되는 시간정지에 나는 몇 번이고 사선을 넘겨야만 했다.

이십 차례나 고대 평기사의 습격을 받아내며, 나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패턴이 보인다.’

첫째로 놈이 멈추는 시간은 최소 1초 이하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부자연스럽게 끊어지는 동작으로 봐선 그 이상은 생각하기가 힘들다.

둘째는 시간정지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놈은 나에게 달려들 때마다 ‘한 번씩만’ 시간을 정지시켰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놈은 나에게서 물러난 뒤에, 반드시 벽에다가 칼질을 한다.’

고대 평기사는 지금도 괴성을 내지르며 수련무늬 벽에 난도질을 했다.

그저 광인의 무의미한 짓거리.

그러나 나는 회귀자들의 무수한 미친 짓을 몸소 직접 보아온 놈이다.

‘진짜로 미친놈들은 안 저래.’

평기사가 칼로 할퀸 벽을 관찰하자 일관된 규칙이 보였다.

그리고 그 규칙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나자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

고대 평기사가 이번에야말로 나를 끝장내기 위해서 칼을 내세웠다.

그러나 놈이 돌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칼을 휘둘렀다.

파각!

나의 칼이 향한 것은 놈이 아니다.

벽에 그려진 수련꽃에 칼을 세차게 긋자 동시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수련꽃 한 송이를 찢었습니다.]

[시간정지권한 0.5초 획득!]

나는 피를 흘리며 픽 웃었다.

‘시간을 멈추는 고대 평기사의 숨통을 끊어버려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련의 내용 자체에 함정이 숨겨져 있었다.

놈은 시간을 멈출 수 있지만, ‘놈만’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놈은 특정한 벽에만 칼질을 했지.’

평기사가 훼손한 벽면에는 공통적으로 수련꽃이 그려져 있던 것이다.

‘벽 전체에다 마구 칼질을 한 것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한 블러핑.’

서로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괴성까지 지르면 미친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놈은 그렇지 않다.

광기를 흉내 낼 뿐인 정상인이다.

“&@[email protected]#@$%%$&?!”

비록 고대어를 알아들을 순 없지만, 놈의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퉷.”

나는 찢겨진 입술에서 흐른 피를 뱉어내곤 희미한 눈빛을 태웠다.

“그래, 깨라고 만든 시련 맞네.”

고대 평기사가 절규하며 나를 쫓았고, 잡혀줄 만큼 난 가련하지 않다.

나는 놈과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며 모든 벽화의 수련꽃을 부숴 버렸다.

[수련꽃 한 송이를 찢었습니다.]

[시간정지권한 1초 획득!]

[수련꽃 한 송이를 찢었습니다.]

[시간정지권한 1.5초 획득!]

[수련꽃 한 송이를 찢었습니다.]

[시간정지권한 2초 획득!]

…….

평기사가 다급히 한 번 시간을 멈췄으나 나를 죽이기엔 너무 짧았다.

숨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고양시키자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12초의 시간을 정지합니다.]

거, 밥 한 공기 비우고도 남겠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터벅터벅

걸어가 평기사의 목을 따버렸다.

서걱!

[칼의 시련을 완수했습니다.]

[체력이 10 올랐습니다.]

[수련꽃 뿌리(미확인)를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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