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16화
지금까지 들었던 전생 이야기 중에서 가장 믿기가 힘들다.
내가 전생에 왕이었다고?
골목에서 더러운 화분이나 가꾸던 내가?
내 표정을 본 카티에가 부연설명을 해줬다.
“10~40회차까지 세상은 전란의 시대였어요. 목숨이 무한대란 것을 자각한 하층민들은 귀족들에게 반항했고, 왕국은 반란을 막으려 했죠.”
나는 생각을 곱씹다가 천천히 입 열었다.
“도저히 믿기가 힘들군요. 내가 만나본 회귀자들은 범철을 뛰어난 검사로만 인식하지, 왕으로 기억하진 않았습니다.”
“범철, 그대가 ‘감춰진 왕’이었습니다.”
헤르탄은 엎드려서 몸을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왕조차 죽으면 다음 회차로 넘어가지요. 그래서 우리는 대응책으로 왕의 얼굴을 목소리조차 변조하는 철가면으로 가렸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도 살해표적이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황당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어조가 튀어나갔다.
“왜 하필 제가 왕이었습니까? 당시 인재가 그렇게 없었습니까?”
“회귀자는 결코 왕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헤르탄은 침착한 어조로 나를 높였다.
“그대는 우리 중에서 가장 정신이 깨끗했고,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그대만이 왕이 될 자였습니다.”
내 낯이 괜히 뜨겁군.
나는 한참 입을 다물었다가 물었다.
“제가 몇 회차에서 왕으로 살았습니까?”
“45회차. 그대는 회귀자들을 통치했던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나는 카티에, 아로즈를 돌아봤다.
그녀들 모두 알고 있었겠지.
아로즈는 턱을 괴고 찻잔을 찻숟가락으로 휘적거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당신이 왕이었던 삶에선 딱히 나와 교류가 없었으니까. 우리가 부부였던 삶은 다른 회차야.”
그럼 아로즈가 전생에 왕비였던 것은 아니었군.
나는 곧바로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어떤 왕이었습니까?”
“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거대한 그릇만큼, 지엄하고 용맹한 왕이었습니다. 당시 최고로 유능한 건 국공신들이 그대 곁을 보좌했지요.”
헤르탄은 한 차례 쉬었다가 말했다.
“만일 건국공신들의 다툼으로 분리되지 않았더라면, 범철 그대는 120회차인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왕으로 군림했을 겁니다.”
“알겠으니 그만 일어나시죠. 난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헤르탄은 엎드린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떨림조차 없었다.
그제야 일어난 그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카티에는 찻잔을 비우며 내 궁금증 하나를 해결해 줬다.
“30회차나 이어진 전란의 시대는 현왕이 백치가 되며 막을 내렸어요.”
“황색대륙의 현왕이라면…… 게오르킨 2세?”
“네, 그 사람이요. 지금은 왕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죠.”
절대왕권이 무너지긴 했나 보군.
하기야 회귀자투성이인 세상에 왕정이 평안할 리가 없었다.
“하여간 수련을 하고 싶으시다니,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아로즈가 찻숟가락으로 찻잔을 때렸다.
“수련이라면 석산의 시련방 말하는 거야?”
“역시 거기로 가야겠지. 지난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럼 ‘그 방’에 도전하게 하지 마. 잘못하면 평생 고생하잖아.”
“내가 그렇게까지 미치진 않았다, 동생아.”
헤르탄은 산채 구석에서 흑색 물약 두 병을 가져왔다.
유리병에 담겼지만 구정물과 흡사 한 생김새였다.
그는 여자 둘에게 한 병씩 쥐여줬다.
“두 사람은 이걸 마셔요. 회귀 시점 이전에 훔쳐둔 밤의 비약입니다. 마시면, 전문화된 분야의 능력치가 오를 겁니다.”
“감사해요, 헤르탄.”
“이건 항상 먹기 싫더라.”
카티에와 아로즈는 주저 없이 물약을 마셨다.
구정물 같아 보이는데 바로 마시는 걸 보니 효과는 좋나 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없습니까?”
“그대는 마셔선 안 됩니다.”
“예? 어째서입니까?”
“편하게 강해지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 한계가 분명합니다. 특히 그대 같은 천재의 경우는 더하죠.”
헤르탄은 빈 병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두 병밖에 없었어요.”
“…….”
***
카티에와 아로즈는 산채를 지키기로 하고, 나와 헤르탄은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지금 떨어지면, 우린 죽게 되는 겁니까?”
“살진 않겠지요.”
워낙 절벽이 높아서 나조차 힘든데 헤르탄은 능숙히 올라갔다.
고생 끝에 절벽을 오르자 바위에 뚫린 굴이 보였다.
“바로 이곳입니다.”
우리는 석굴石窟로 입장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규모의 석굴엔 총 3개의 문이 있었다.
“왼쪽의 철문은 칼의 시련방, 중간의 나무문은 마법의 시련방, 그리고 오른쪽 문은…….”
“끼우에아악!”
그 순간 오른쪽 문이 내지른 끔찍한 비명에 나는 귀를 막았다.
일반 나무문과는 외견부터 차원이 달랐다.
피투성이로 물든 살덩이 문.
문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가장 오른쪽은 지옥의 시련방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나는 각 방의 문을 쳐다보았다.
“시련방이 정확히 어떤 겁니까?”
“각 방에 들어서면 해당 분야의 시련이 주어집니다. 시련방을 끝까지 완수하면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헤르탄은 나를 보며 전생을 회상하듯 설명해 줬다.
“시련방을 완수하기 전과 후의 그대는 실력 차가 엄청났습니다.”
과연 그래서 시련방인 것이군.
나는 역겹게 꿈틀거리는 살덩이 문을 흘깃 보았다.
“지옥의 시련방은 어떤 곳입니까?”
“보통 시련방은 도전에 실패하면 ‘30일 출입금지’라는 벌칙이 붙습니다. 하지만 지옥의 시련방은 난이도가 가장 어렵고 벌칙 또한 끔찍합니다.”
헤르탄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또한 전생에서 그대가 도전했다가 쓴맛만 본 장소이기도 하죠.”
나는 순간 귀가 혹했다. 전생의 나조차 실패한 시련방이라고?
“저 방의 시련을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공보상은 어느 회귀자도 모릅니다. 다만 실패할 경우 팔을 빼앗깁니다. 오른손잡이는 오른팔, 왼손잡이면 왼팔.”
헤르탄은 날 흘깃 보았다.
“그대는 양손잡이니까 양팔 다 빼앗깁니다.”
“…….”
기괴한 논리일세.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양팔이 잘린 적 있었다면, 그 삶은 단명했겠군요.”
“아뇨, 그대는 입으로 칼을 물고 썼습니다. 만만해 보여서 한 번 덤볐다가 죽을 뻔했었죠.”
“……그랬습니까.”
악재가 일어나도 사람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헤르탄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하여튼 저 지옥의 시련방만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120회차까지 누구도 시련을 무사 통과한 자가 없으니까요.”
120회차 동안 성공한 자가 없는 시련이라.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런데 헤르탄은 시련방에 도전 안 합니까?”
“과거엔 해봤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120회차에선 맨손을 쓸 겁니다.”
“맨손맨손으로 싸운단 말입니까?”
주먹 싸움이라면 하다못해 너클이라도 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헤르탄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해보지 않았으니까, 이번 삶에서 해봐야 합니다.”
거참, 자기 소신이 뚜렷한 회귀자로군.
헤르탄은 마지막까지 주의 깊게 설명을 해줬다.
“하여간 문을 통과하면 방에서 시련이 시작됩니다. 매 삶마다 시련내용은 무작위로 바뀌니 그 이상은 조언을 드릴 수 없군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나는 세 개의 문 앞에 섰다.
어찌 됐건 시련방은 총 세 개로군.
칼의 시련방, 마법의 시련방, 그리고 지옥의 시련방.
나는 주저하지 않고 도전할 시련방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