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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5화 (15/200)

나만 1회차 015화

석산의 정상.

칼바람이 불고 자갈이 나뒹군다.

절벽의 끝에서 거한은 경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꾸에엑!”

왕멧돼지가 킁킁대면서 다가왔다.

거한은 애완맹수의 어금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배고픈데, 너라도 처먹어볼까.”

왕멧돼지는 직감하고야 말았다.

지금껏 자신을 키워준 주인이 미쳐 버렸다는 것을.

“꾸에엑!”

애완맹수의 슬픔이 들어찬 울음이 정상을 메웠다.

거한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농담 같아? 난 정말로 너를 먹어 봤다.”

“꾸, 꾸에엑?”

“왜냐면 네 주인이 120번이나 살고 있기 때문이야.”

왕멧돼지는 주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한이 평소와 다르단 것은 알았다.

주인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본래 인간이란 털가죽 대신 옷으로 살갗을 감춘다.

그러나 주인은 스스럼없이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살면서 못 해본 것이 없다.”

“꾸에엑?”

“진짜야.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봤어. 국가를 건설했고, 미녀도 안아봤으며, 용이랑 싸웠고, 너까지 잡아먹어 봤다.”

“꾸에엑!”

“구이는 해먹어 봤고, 찜도 해먹어 봤지. 그중 네가 제일 맛있었던 건 육회였다. 육회라고 알아? 청색대륙 전통의 조리법인데…….”

바로 그때 산 아래에서 희미한 외침이 들렸다.

아주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벌거벗은 거한은 턱을 긁적였다.

“아로즈? 웬일로 회차 초반에 날 다 찾아왔지.”

거한은 절벽 끝으로 걸어갔다.

단순히 경관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몇 발자국 걸으면 떨어질 만큼 위험천만한 곳까지 다가선다.

“꾸에엑!”

왕멧돼지가 발굽을 동동 굴렀다.

거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몸을 숙였다.

“생각해 보니 120회차 동안 이 절벽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군.”

거한은 한참을 거기 서 있었다.

칼바람을 탄 자갈이 발등을 때린다.

독백한다.

살면서 해보았는가?

해보지 않았다.

“그럼 해봐야지.”

거한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꾸에엑!”

충성스러운 왕멧돼지가 구슬픈 울음을 쏟았다.

***

“그 사람, 사고방식이 조금 엇나갔어. 하지만 됨됨이는 착해.”

“절망적이군요. 성격 개차반이더라도 정신은 멀쩡한 사람이 좋은데.”

한숨짓는 나를 보더니 아로즈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면 애완동물을 키워.”

“동물이요?”

“응. 동물이나 몬스터는 회귀를 못 하거든. 회귀자들이 황폐한 정신을 가꾸는 방법 중 하나야.”

“나도 1회차입니다만.”

“그럼 당신 수준이 짐승이나 몬스터라는 것 아닐까?”

“…….”

저 교묘한 말솜씨 좀 보게.

나는 입맛을 다시며 구름까지 닿은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우린 이름 없는 석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돌로 이뤄진 산이라서 풀 한 포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는 아로즈와 잠시간 동행하기로 했다.

원수를 피해 수련하기 좋은 곳이 있다면 지금 나에겐 적격이다.

‘능력치창.’

마음속으로 외치자 눈앞에 밝은 글귀가 떠올랐다.

이름: 이범철

보유 재능- 검술(SSS), 마법(SSS), 회귀자 살해(SSS)

힘: 16 체력: 5 민첩: 5 마력: 5 행운: 5

현재 내가 보유한 능력치.

성장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상태창이다.

재능은 화려하지만 아직 나의 강함은 보잘것없는 상태였다.

‘더욱 성장해야만 해.’

회차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최우선적으로 황색대륙 지배자 아크 리치를 죽여야 한다.

칼이든, 마법이든 나는 경지를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날 도와줄 사람이 이 석산에 산다고 한다.

카티에는 땀을 흘리며 열심히 돌바닥을 걸었다.

“아로즈,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당신이 참 싫네요.”

“그래요? 저는 성녀님 괜찮은데.”

“그럼 일단 당신을 좋아하려고 노력은 해보겠어요. 기대하진 마요.”

“노력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죠. 물 드실래요?”

“사랑해요, 언니.”

카티에는 헐떡이면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의외로 아로즈는 처음 본 사이인데도 어째 엄청 친숙했다.

우리를 옛 지인처럼 편하게 대했고, 나는 금방 그녀에게 적응했다.

아로즈가 전생의 내 아내였단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합니까?”

“거의 다 왔어. 내가 소리치면 듣고 찾아올 거야.”

“그 사람, 귀가 엄청 밝나 보군요.”

“거의 산에 사는 짐승 수준이야. 1회차 땐 산적이었거든.”

돌산의 산적이라.

“이런 석산에 본진을 두려면 3급 수배범 정도는 돼야겠는데요.”

“그건 그 사람의 부하들이었어.”

“예?”

“지금 찾아가는 사람, 1회차 때는 1급 수배범이었거든.”

나는 갑자기 등골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1급 수배범? 지금 우리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까?”

“죽으면 어차피 회귀하는데 굳이 뭣 하러?”

“나는 아니잖습니까!”

아로즈는 태연히 돌부리를 걷어찼다.

“괜찮아. 1회차 때 얘기니까. 지금은 범죄자 관뒀어.”

어째 불안하군.

1급 수배범이면 왕국이 전범 수준으로 취급한다는 의미다.

아, 그러고 보니 모든 이가 회귀자가 됐다면 황색대륙의 왕정은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 그때 아로즈가 멈춰 섰다.

“여기쯤이면 다 왔네.”

“꺄아!”

카티에가 기절할 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로즈는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 양 손을 모아 목청껏 소리쳤다.

“오빠-!”

뭐, 오빠?

예상외의 단어 선택에 내가 눈썹을 올렸다.

석산에 아로즈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그런데 그때 돌바닥이 세차게 울렸다.

쿠웅! 쿠웅! 쿠웅!

나는 쓰러질 뻔했다가 균형을 잡으며 물었다.

“그 사람, 몸무게가 꽤 나가나 봅니다?”

“아니! 이건 사람 발소리가 아니잖아.”

아로즈가 입술을 씹으며 소매에서 단검을 꺼냈다.

나도 칼자루를 붙잡고 주위를 살폈다.

바닥의 진동이 거세졌고, 저편에서 다가오는 몬스터가 보였다.

5미터는 넘을 법한 거석의 형체.

“골렘(Golem)이에요!”

카티에가 소리쳤고, 나는 긴장했다.

본래 석산, 광산에 서식하는 골렘은 침입자를 적대시한다.

온몸이 돌로 이뤄진 골렘에게 칼이 잘 먹힐까?

“쿠오오오!”

골렘은 우리 코앞까지 다가오며 팔을 높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콰앙! 쩌저적!

추락하는 뭔가에 부딪혀 골렘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일어섰다.

“절벽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군. 의외야.”

그것은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로즈는 정색하며 말했다.

“오빠, 죽으려면 민폐 끼치지 말고 삽 들고 땅 파서 거기 묻혀 죽어.”

“그건 이미 해봤어.”

흙먼지가 가라앉자 몹시 독특한 인상의 남자가 한 명 보였다.

키가 2미터 될법한 풍채 좋은 거구이나 신기하게도 얼굴만은 귀족가의 도련님처럼 수려하고 곱상하다.

잘생긴 외모를 감싼 진지하고 낮은 분위기 또한 놀랄 만큼 어울린다.

‘하지만 무엇보다…….’

남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골렘을 박살 낸 탓에 온몸이 생채기투성이였다.

그러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아 보였고 본인은 아파하는 티도 없었다.

아로즈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오랜만에 보긴 했지만, 정말 웃기네. 옷은 또 왜 벗고 다녀?”

“옷 입는 건 질렸다.”

“그래서 알몸으로 다니겠다고?”

“지금껏 해보지 않았으니까. 이번 삶에서 해볼 거야.”

약간의 대화만 들었는데도 대강 저 성격이 짐작 간다.

카티에가 먼저 나섰다.

작은 키의 소녀는 키가 큰 거한의 그것과 동일한 눈높이였다.

그러나 카티에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태연히 인사했다.

“헤르탄, 여전히 크시네요.”

“오래간만입니다. 카티에.”

헤르탄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티에는 자신의 두 배는 될 법한 손을 잡고 악수했다.

손을 놓고서 헤르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범철이라고 합니다.”

“그대는 날 처음 보겠지만, 나는 그대가 처음이 아닙니다.”

그가 나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서 봐도 정말로 큰 남자로 헤르탄이 내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매제妹弟.”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니까, 매제는 누이동생의 남편을 이르는 말이다.

하기야 내가 전생에 아로즈의 남편이었다니, 틀린 말은 아니군.

얼결에 나는 악수하며 인사했다.

“예, 저는 초면이라서 더 반갑군요.”

“일단 서서는 다리 아프니, 산채로 가서 대화를 나눕시다.”

헤르탄이 내 손을 놓았다.

내가 물었다.

“산채는 어디 있습니까?”

“석산 정상에 있습니다.”

카티에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

카티에는 두어 번 쓰러질 뻔했고, 결국은 내가 소녀를 업었다.

자그마한 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녀는 새하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대장, 어지러워요.”

“토하면 버리고 간다.”

“예전 삶에서 등에 토했을 때 대장은 진짜 날 버리고 갔었어요.”

역시 난 참 솔직한 놈이야.

산채는 산간의 별장처럼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발견하기 쉽지 않은 장소에 있지만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다.

적이 쉽게 쳐들어올 수 없도록 방비도 견고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헤르탄은 거짓말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난잡하고 청소하지 않은 산채는 정말로 누추했다.

그러나 이 커다란 건물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사는 사람이 전혀 없군요?”

“나를 제외한 동료들은 윤회수뇌부의 명을 따라 다들 자살했습니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탁자에 우리가 앉자 헤르탄이 차를 내왔다.

“그래서 이번 회차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당신의 도움을 받아서 수련하고 싶습니다.”

나의 부탁에 헤르탄은 말없이 연고를 꺼내어 몸에 발랐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나는 1회차 때 1급 수배범이었습니다.”

“이미 들었습니다. 무슨 죄목이었죠?”

“역모를 꾸몄습니다.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고자 했죠.”

나는 아로즈를 슬쩍 곁눈질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귀족 출신 아니었던가?

어째서 오빠는 수배범에, 산적이 된 거지?

내 생각을 읽었는지 헤르탄이 말했다.

“동생과는 달리 나는 백작가의 사생아였습니다.”

헤르탄은 지난 삶을 회상하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여동생을 네 번쯤 죽였었죠.”

아로즈가 픽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고 그 두 배를 나한테 복수당했고.”

“솔직히 두 배까진 아니었어.”

“그래, 한 7번 오빠를 죽였었네.”

저 눈물겨운 대화를 보라.

누가 봐도 진정한 현실남매 아닌가.

아무튼 나는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이제 범죄자 노릇은 그만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우리는 반란에 성공해서 회귀자들의 국가를 건설했었으니까요.”

나는 차를 마시다가 순간 멈칫했다.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지금 우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요.”

헤르탄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그리움, 일말의 경외심까지 담겼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의 매제이자, 우리들의 왕이었습니다. 범철.”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할 때.

헤르탄은 맨몸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서 큰절을 올렸다.

“물심양면. 모든 것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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