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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4화 (14/200)

나만 1회차 014화

“……그게 뭔 소립니까?”

“자, 잠깐! 목 좀 축이고.”

여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개울에 머리째 박았다.

나는 수면에 기포가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며 기괴한 의구심이 들었다.

……미친 여자가 사람을 잘못 본 게 분명할 것이다.

“푸하! 이제야 좀 살겠네.”

여자는 젖은 단발을 넘기고 입가의 물기를 슥슥 닦았다.

귀족처럼 고풍스러운 외견과는 다르게 언행은 소탈하기 그지없다.

나는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당신 뭡니까?”

여자는 날 물끄러미 보다가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과거로 돌아가도 지금 남편과 함께 살겠습니까?”

“뭐요?”

“그 질문에 9번이나 ‘예’라고 대답한 여자.”

그녀의 말을 곱씹다가 나는 당황해 버렸다.

여자는 픽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여전히 귀엽게 잘 살아 있네, 우리 전 남편.”

***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자.

갑자기 나타난 이 미녀가 내 아이를 40명이나 낳아봤단다.

그 말인즉, 전생에서 내가 저 여자와 부부였다는 의미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애써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사람을 잘못 보신 것…….”

“범철. 무한회귀 속에서 홀로 1회차인 불세출의 검사.”

“9번이나 ‘예’라고 했다는 것은…….”

“우린 10번의 삶 동안 부부였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실감조차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여자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안 믿기지? 갑자기 웬 미녀가 나타나 전생에 우린 부부였다고 주장해대니. 그런 꿈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나라도 당황할 거야.”

“……잘 아시는군요.”

나는 한숨을 쉬고 그녀를 다시금 살펴보았다.

목가에 닿는 금발, 청아한 눈물점, 후광같이 빛나는 몸매.

숄(shawl)을 걸치고 하인들을 대동한 채 부채로 입을 가리면 어울릴 만큼 매혹적인 귀부인 상이다.

그러나 긴 치마를 찢어버리고 하인은커녕 혼자 숲길을 뛰어다닌 그녀는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머리칼에 잎사귀를 얹고 화장 한 줌 없이도 우월적인 미인이다.

그런데 내가 저런 멋들어진 여자랑 전생에서 부부 사이였다고?

도저히 믿기가 어려운데.

“그만 봐, 뚫어지겠어.”

“계속 쳐다보면 진짜 뚫릴까 궁금해서 말이죠.”

“하여간 농하고는.”

여자는 머리칼의 잎사귀를 하나 떼어서 튕기고 말했다.

“아로즈 호칼바니 드 그라프 앙팡송. 그게 내 이름이야.”

“지나치게 길군요.”

“그럼 옛날처럼 아로즈라고 부르던가.”

성씨에 ‘드(De)’가 들어가는 걸 보니 진짜 귀족 출신인가 보군.

나는 다시금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전생에 저와 결혼했다는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사실 범철은 다른 세상 출신이야. 그래서 혼자만 회귀할 수 없지. 이건 회귀자들도 모르지?”

나는 흠칫 눈썹을 떨었다.

내가 이계 출신이 아니란 것은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늘 비밀로 해왔다.

아로즈가 픽 웃었다.

“왜, 당신이 밤에 취약한 부위도 말해줘?”

“……아뇨. 그건 사양하죠.”

나는 어느새 마른 뺨을 긁적였다.

“그런데 왜 회귀하자마자 저를 찾아 나섰습니까?”

“이번 회차는 윤회수뇌부가 포기해서 완전 미쳐 버렸잖아. 당신이 걱정돼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걱정이요? 전 남편을?”

“맙소사. 내가 10번이나 생애를 함께했던 남자를 위험에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로즈가 짐짓 성난 표정을 지어 보여서 나는 의아했다.

원래 전 남편, 전 부인은 겉으로는 친구, 사실상 원수 아니던가?

상당히 대인배적인 성격이로군.

“아, 숲길 뛰다 보니 탄 흔적이랑 시체들이 있던데.”

“원수들이 습격했었습니다. 제가 다 죽였죠.”

“흐음. 역시 괜히 급하게 도우러 왔나 봐.”

나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원수들한테 쫓기는 마당에 한 명이라도 도와주면 고맙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일말의 의심은 거두지 않았다.

방금 만난 여자다.

무턱대고 믿었다가 등에 칼 꽂힐지 누가 알겠는가.

언제든 칼을 뽑을 준비를 해둬야겠지.

그런 생각을 할 때 그녀가 물었다.

“늘 같이 다니던 당신 동료들은?”

“한 명만 남고 전부 자살했습니다.”

“아아, 역시 그 성녀는 남았구나?”

아로즈는 카티에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서 그녀가 말했다.

“잠시간 동행해. 당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

“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요?”

“살짝 돌았지만 믿음직하지. 그도 분명 당신을 반길 거야.”

너무 호의적이고 달콤한 말이라 의심이 거둬지질 않았다.

회차 초반에 만났던 일행이 자꾸 떠오르는군.

함께한다고 해놓고선 나와 세상을 버리고 자살했던 양반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믿기가 어렵군요. 저를 왜 그렇게까지 도우려는 겁니까?”

“전 애인은 많아도, 전 남편은 당신밖에 없어.”

“예?”

“당신은 이번 삶뿐이잖아.”

나는 지그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로즈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나는 본래 모성애가 넘쳐서 불쌍한 옛 남자를 가만 못 둬. 나를 거쳐 간 남자 중에 당신이 제일 애달프지. 단지 그래서야.”

“…….”

거, 삶이 애달파서 죄송스럽군.

아로즈는 입을 가리며 하품한 뒤 목을 주물렀다.

“안 가고 뭐 해? 피곤해, 잘 곳으로 데려다줘.”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아직 완전히 신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도 이렇게까지 말을 지어낼 순 없다.

고민하다가 걷기 시작한다.

나는 혹시나 하며 그녀를 슬쩍 떠 보았다.

“그런데 이번 삶에서도 나랑 결혼할 겁니까?”

그러자 아로즈가 나를 기가 차다는 듯 째려봤다.

“내가 미쳤어? 당신이랑 또 살게?”

“…….”

아니, 분명 초면인데 왜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는 기분이 나는 건지.

***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나요.”

“네가 기절했을 때 날 찾아왔더라고.”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나요.”

“야, 인마.”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해가 밝은 아침.

막 깨어난 카티에는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죄송해요. 그런데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나요?”

“…….”

이게 아주 정신이 나갔네.

아로즈는 태연히 기지개를 켜며 긴 다리를 문질렀다.

“아침 식사는 언제 해? 오랜만에 당신이 지은 밥 먹고 싶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건 위험하니 아침은 간단히 먹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카티에를 먼 곳에 데려와 몰래 속삭였다.

“저 여자가 잠시 동행하자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나와 달리 카티에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전생을 완벽히 기억한다.

그러니 의견을 묻고 도움을 얻는 것이 지당했다.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장한테 도움이야 되겠죠. 하지만 난 마음에 안 들어요.”

“왜?”

“그야…… 대장 전 부인이잖아요! 대장이 저 여자한테 넘어가서 날 떠나 버리면 어떻게 해요?”

카티에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그래서 나는 충격 받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역시나 너는 나를 좋아하던 거였어.”

소녀의 뺨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나를 어떻게 느끼는 대장의 자유지만, 사랑과 집착은 다른 거예요.”

“그 말이 지나치게 난해하다고 하면 내가 너무 어린 걸까?”

카티에는 빈정대는 나를 째려보고는 고개를 휙 저었다.

“아무튼 나는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저 여자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대장 마음대로 해요.”

어째 ‘절대 같이 다니지 말자’라는 걸 완곡히 돌린 말 같은데.

그런데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성녀님 말씀이 옳아.”

고개를 급히 돌리자 어느새 아로즈가 뒤편 바위에 앉아 있었다.

처음 나타날 때도 그렇고 기척 숨기는 것이 보통이 아니군.

“난 당신을 데려다줄 생각이야. 원수들로부터 안전하고,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로. 전생의 당신이 여러 번 거쳐 갔던 곳이지.”

아로즈는 매끈한 맨다리를 꼬고서 고개를 도도하게 들었다.

“물론 선택은 당신 자유야.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나도 억지로 전 남편과 동행할 생각은 없으니까.”

수련하기 좋은 장소?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서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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