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12화
내 인생서 제일 뜨거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첫 경험’을 택할 것이다.
다만 구슬프게도 가장 싸늘했던 순간이 ‘첫 경험한 직후’ 이긴 하지만.
하여간 전자는 수정되어야 한다.
지금 내가 첫 경험보다 뜨거운 순간을 겪고 있음이 확실하니까.
“쿨럭!”
자욱한 증기에 숨쉬기가 힘들고 몸이 뜨거워 뒷걸음질 쳤다.
눈앞조차 분간하기 힘들만큼 증기를 내뿜는 존재는 회귀자였다.
“끄아아악!”
사방에 울리는 끔찍한 비명 소리.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벌어졌다.
회귀자의 몸은 불타고 있었다.
“뭐야?”
처음에는 웬 분신자살인가 싶었다.
불에 휩싸인 놈은 타죽기 직전처럼 괴로워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저 회귀자란 놈들은 죄다 돌았음을.
“크아아악! 죽어라, 범철……!”
불타는 회귀자는 꺼지기 직전에 발악하는 촛불처럼 완전한 빛을 하고 있었다.
[브레나딘 레솔트가 ‘미확인된 존재’에게 자신의 몸을 봉헌했습니다.
강력히 증폭된 마나의 불꽃이지만 항시 불타며 사흘 뒤 자멸합니다.]
‘무슨, 미친……! 나한테 복수하려고 제 몸까지 태워 버려?’
눈앞의 글귀를 읽자마자 나는 곧장 도망칠 태세를 갖추었다.
‘지금은 도망치는 게 이득이다.’
어지간하면 싸우려 했으나, 놈을 둘러싼 불꽃이 심상치 않다.
브레나딘은 수명을 태우면서 내게 느릿하게 걸어온다.
하지만 내가 구태여 싸울 이유는 없다.
사흘 뒤면 알아서 타죽는다는데 굳이 내가 죽여줄 필요가 있겠는가.
“거기 서라…… 범철……!”
하지만 브레나딘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화르르륵!
놈이 양팔을 펼치자 주변 일대가 불길에 휩싸여 퇴로가 차단되었다.
“고통스럽게…… 태워주마……!”
브레나딘이 팔을 휘젓자 불덩이가 굶주린 맹수처럼 내 머리를 노렸다.
“크윽!”
미리 간격을 재고 여유 있게 피했는데도 불꽃의 열기가 장난 아니다.
스쳐 간 머리칼 끝자락이 탄내를 풍기고 목덜미가 따가웠다.
“아, 제기랄.”
손가락에 침을 발라 목덜미에 묻힌다.
내가 아지랑이 일렁이는 놈의 형체를 노려보자 글귀가 떠올랐다.
[살의로 회귀자를 관측합니다.]
[지정된 회귀자가 기피하는 변수를 실시간으로 입수합니다.]
[변수는 질에 따라 최고급, 고급, 중급, 하급, 최하급으로 나뉩니다.]
[살해한 회귀자 숫자가 많고, 상대가 자신보다 강할수록 고급변수정보가 창출될 확률이 증가합니다.]
SSS급 회귀자 살해 재능!
근처의 회귀자를 지정하면 놈이 꺼려 하는 변수를 알아낼 수 있다.
‘우선 저놈이 기피하는 변수들부터 알아본다.’
내가 강력한 불길을 준비하는 브레나딘을 지정하자 문구가 나왔다.
《브레나딘 레솔트》
설명: 불타는 회귀자.
*현재 감정능력이 낮아서 대상의 완벽한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해당 회귀자가 기피하는 변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암묵적으로 동의하자 곧바로 무작위 변수가 촤르륵 정렬되었다.
[최하급 변수 4개 획득!]
『이범철이 벌거벗으면 브레나딘은 비웃느라 잠깐 방심하고 맙니다.』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면 그는 아주 잠시 당황해버릴 것입니다.』
『브레나딘은 차가운 것을 무척이나 혐오합니다! 꼬마 눈사람을 만들어 그에게 깜짝 선물해 보십시오.』
『타오르는 그는 예민하여 부모 욕을 들으면 부모 욕으로 맞섭니다.』
[하급 변수 1개 획득!]
『브레나딘은 심장을 노리면 전생이 떠올라 두려워할 것입니다.』
“망할, 이게 뭐야…….”
보자마자 욕 나오는 결과였다.
실망스러운 정보에 얼굴을 확 구기다가 번뜩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심장을 노리면 두려워할 거라고?’
갑자기 떠오른 계획이 있었다.
나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브레나딘, 네 심장을 터뜨려주겠다!”
공격 예고만큼 멍청한 짓도 없겠지만 지금 내 상황이 여유 있진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기가 조금 사그라지는 것 아닌가!
잠깐이지만 움찔하며 놈에게 스친 두려움을 난 놓치지 않았다.
차가운 플랑베르쥬를 비스듬히 들고 돌진해 브레나딘에게 뛰어든다.
“꺼져라……!”
화염이 창의 형상을 띄며 휘둘러졌다.
불꽃은 매섭지만 고통에 판단력이 흐려서인지 피하기 쉬웠다.
내 칼날이 불꽃에 맞서 올라간다.
놈은 본능적으로 심장을 보호했다.
그러나 내가 노린 것은 몸을 지탱하는 하단의 오른쪽 다리였다.
서걱!
“크어어억!”
장검이 베어버린 곳에는 불길 대신 얼어붙은 상처만이 있었다.
베어낸 적을 일정 확률로 빙결시키는 플랑베르쥬는 놈과 극상성이었다.
태워지는 판국에 다리까지 끊어지자 브레나딘은 중심을 잃었다.
난 연속해 칼을 그으려 했지만 떨어져 나간 다리가 폭발해 버렸다.
쾅!
“윽!”
거의 허리가 부러질 만큼 꺾고 물러서야 얼굴이 타버리는 걸 피했다.
이거 참, 코끝이 따갑군그래.
“크으윽…… 범철!”
브레나딘은 땅바닥에 쓰러져서도 온몸을 뒤틀면서 고열을 내뿜었다.
내가 놈을 살피며 칼자루를 매만질 때였다.
“어.”
별안간 주위가 습기로 가득 차더니.
“비?”
밤하늘에서 빗방울이 쏟아졌다.
그것도 보통 비가 아니라 폭우다.
때아닌 폭우는 정확히 불길에 휩싸인 반경에만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카티에 로넬야드가 성녀 권한으로 물의 정령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숲을 불태운 방화범에게 분노한 물의 정령들이 폭우를 내립니다.]
폭우가 내리자 수증기가 올라왔고 어느새 주변은 희뿌옇게 변했다.
희끄무레한 증기 너머로부터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물의 정령들의 영토란 것은 멍청하게도 기억하지 못했군요.”
카티에가 싸늘한 눈초리로 걸어왔다.
정령이 퍼붓는 거센 빗줄기에 마나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브레나딘은 욕설을 내질렀다.
“성녀…… 거슬리는 수작을……!”
“거슬리는 것은 대장한테나 화풀이 하는 네 쓸데없는 집념이겠죠.”
소녀의 얼굴에는 드물게 오만하고 가소롭다는 비정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자 브레나딘은 몸이 타는 고통 속에서도 신랄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범철…… 너는 또 저 성녀와 함께하는 것이냐……?”
“회귀자는 싫지만, 너보단 살갑다.”
“회귀자가 증오스럽다니…… 아니지, 그건 아니야…… 그러는 네가 우리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을까.”
브레나딘이 나를 보며 빈정대더니, 불꽃을 토해내며 고함을 쳤다.
“전생에서…… 너의 숱한 미래들을 보았다. 너도 결국은…… 네가 혐오하는 회귀자와 다름없어질 것이다!”
폭우는 여전하다.
더웠다, 추웠다, 제기랄, 감기 걸리기 딱 좋군.
“그래서 개소리는 끝났냐?”
“아둔하긴……!”
빗속에서도 브레나딘의 몸에 붙은 불꽃만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격렬히 분노할수록 놈의 불꽃과 팔찌가 매섭게 빛났다.
“최악의 방법으로 태워주마……!”
브레나딘이 불타는 손길로 대지에 화염을 뿜었다.
그러자 주변 일대가 흔들리며 열기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빗물조차 소멸시키는 대량의 화염!
[브레나딘이 10미터 반경의 날씨를 ‘가뭄’으로 바꾸었습니다.]
[마법의 불꽃이 최상으로 거세집니다!]
[‘미확인된 존재’가 수명을 거둬 목숨기한이 하루로 단축됐습니다.]
[정령들이 놀라 도망칩니다!]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끊기고 다시금 불길이 치솟는다.
정령들을 내쫓고 날씨까지 바꿔낸다고?
저 팔찌, 정말 보통 물건이 아니로군.
브레나딘의 변화에 카티에는 표정을 구기곤 다급하게 말했다.
“대장, 날씨까지 바뀌면 답 없어요.”
“도망치자고?”
“내가 뚫어보겠어요.”
브레나딘은 한쪽 다리가 잘려서 우릴 쫓아오려면 오래 걸린다.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카티에가 날 돌아보았다.
“대장?”
나는 화염에 휩싸인 브레나딘을 보았다.
정확히는 놈이 착용한 저 팔찌를.
“대장! 저건 토굴에서 봤던 잔챙이들이랑은 수준이 전혀 달라요. 아무리 대장이라도 죽고 말 거예요!”
카티에가 황급히 부를 때 나는 이미 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할수록 열기에 얼굴이 따가웠다.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았다.
내가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전혀.
속으로 나의 의문을 부정하였다.
놈을 계속 관찰한 결과 어떻게 죽여야 할지 감이 왔다.
“멍청하게 자기 발로 태워지려고 왔…….”
“야. 회귀자 놈아.”
나는 놈의 말을 끊었다.
칼자루 쥔 손이 간질거린다.
“널, 썰어서 처죽이고.”
나를 죽이려는 전생의 원수가 이놈 하나만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시라도 빠르게 더욱 많은 것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진귀한 아이템이든, 비기든, 비술이든, 그게 뭐든지 닥치는 대로.
“그 팔찌 좀 가져가야겠다.”
내가 말을 끝마치는 순간 브레나딘의 불덩이가 기습했다.
크기는 작지만 화살보다 훨씬 빠르고 매서운 불덩이.
그러나 나는 대수롭잖게 베어냈다.
화록!
내 칼날에 부딪힌 불덩이가 불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브레나딘은 멈칫하더니 당혹스러워 하며 말했다.
“어, 어떻게 방금 그 빠르기의 불꽃을 고작 칼질 한 방으로……?”
재능이란 것이 참 놀랍다.
아무리 노력하고, 시도해 봐도 도무지.
‘저놈이 밥으로밖에 안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