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08화
히이이잉!
반투명한 철갑옷 기사들이 유령마를 타고 나의 앞에 소환되었다.
그러자 밴시들도 겁을 집어먹었는지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유령기사가 유령마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크게 소리쳤다.
「명령을 내려라, 새 주인이여!」
유령기사단이 소환된 것은 카바인에게서 빼앗은 건틀릿 덕분이었다.
회귀자들도 구하기 어렵다는 게 헛소리는 아닌지 성능이 기가 막혔다.
『으스스한 고대기사의 건틀릿』
지하사원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건틀릿. 과거 강인한 고대기사단장이 오랜 시간 써온 장비라고 한다.
+하루에 한 번씩, 복종하는 5인의 유령기사단을 소환할 수 있다.
+착용자의 역량에 따라 기사단의 숫자(최대 20인)가 갈리며 성장할수록 새 유령기사단원이 편성된다.
+으스스한: 처음 보는 유령과의 친밀도가 조금 올라간다.
나는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
“저 밴시들을 베어서 소멸시켜라.”
유령기사가 당혹하며 말했다.
「아니, 주인이여. 고작해야 저딴 유령을 베는 데 칼을 쓰란 말이냐?」
“너희도 유령이잖아, 인마. 칼 쓰기 싫으면 맨손으로 싸우던가.”
유령기사들은 구슬프게 한탄했다.
「이번 주인은 싹수가 없군.」
「우리 용맹을 써줄 줄 모른다.」
「아쉽군, 아쉬워.」
「살아생전 기사단장이 그립다.」
투정은 부려도 유령기사들은 칼을 쥐고 돌격하며 내 명에 복종했다.
허공에 도망치는 밴시들이 유령기사들의 칼에 베여 처참히 소멸했다.
끼야아아……!
소름 끼치는 비명이 사방에 울린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손에서 불타는 화염구를 만들어서 날렸다.
화륵!
유령에게 마법은 잘 먹힌다.
화염구에 처맞은 밴시들은 속수무책으로 타들어 갔다.
으후우우우……!
밴시들이 울 때마다 기분 나쁜 귀곡성이 귓가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불쾌감을 떨쳐 버리고 화염구로 밴시들을 야멸치게 불태웠다.
최후의 밴시까지 처치하자 유령기사단의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명을 완수했으니 가겠다, 주인.」
계약관계 한번 철두철미한 놈들이군.
나는 입맛을 다시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옷깃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잘해줬어요.”
“넌 성녀가 유령 퇴치도 못 하냐?”
“회귀자한테 벤시를 상대하라는 건 촛불 보고 바다와 싸우란 거예요.”
카티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떼는 표정이었지만 눈가가 부어 있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허리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이봐요, 어르신. 울보라고 놀리지 말라는 것치곤 너무 잘 우시잖아?”
“닥쳐요, 꼬맹아.”
카티에가 내 종아리를 걷어찼다.
“아악!”
으억, 저 얇은 다리에 차였는데도 엄청 아프다.
아니, 어떻게 내가 제일 아파할 부위만 콕 집어서 걷어찼나?
반면 회귀자 4인방은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밴시를 사냥했어…….”
“하지만 백치가 된 것 같진 않아.”
“회귀자가 밴시와 싸웠는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지?”
저들끼리 멍하니 웅성거린다.
레네타가 내게 떨면서 다가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말했다.
“당신 뭐 하는 사람…… 아니, 사람이기는 해요?”
경악한 그녀가 더듬거렸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장벽 사라진 토굴 입구를 턱짓한다.
“안 들어갈 겁니까?”
“네?”
“나도 저기에 들어가고 싶어져서.”
나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이랑 함께.”
***
기가 찬다, 기가 차.
나는 칼자루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앞장선 중년의 칼놀림을 보았다.
“이게 지난 삶에서 무려 청색대륙까지 가서 배워온 검술인데 말이야.”
본인을 베덴스라고 소개한 나이 지긋한 남자가 칼을 크게 휘둘렀다.
“헛! 하앗! 흐엇!”
“캬로로록!”
과장된 기합이 섞인 검격 세 번에 달려든 코볼트의 몸통이 갈라졌다.
베덴스가 멋들어지게 칼날을 휘둘러서 묻은 피를 땅바닥에 흩뿌렸다.
“커흠, 용살도龍殺刀란 검술의 기본초식이지. 제법 괜찮지 않나?”
“과연 대단하십니다, 형님!”
디일과 랑크란 이름을 가진 두 청년은 입을 딱 벌리며 감탄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게 어딜 봐서 대단하단 거냐.
‘회귀자가 칼을 뭐 저렇게 못 써?’
인생사 120번을 회귀해도 될 놈만 되고 안 될 놈은 안 되는 모양이다.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토굴의 입구가 막혔지만 이들은 아주 태연했다.
“토굴 몬스터 다 죽이면 열려요.”
레네타, 베덴스, 디일, 랑크, 카티에, 그리고 나까지 일행은 여섯 명.
어두운 토굴의 천정에는 우둘투둘 한 종유석이 상당수 많이 있었다.
그런데 토굴을 1층 내려가자 코볼트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회귀자들답게 전혀 당황하지 않고 간단히 몬스터를 격파했다.
나는 난생처음 들어온 몬스터 소굴이 낯설었지만, 금세 적응하였다.
[못난이 코볼트를 죽였습니다!]
[대사범의 허리띠(하양)가 검술수련 성장도를 조금 증가시킵니다.]
[검술의 숙련도가 늘어납니다.]
‘초심 수련관에서 얻은 허리띠의 성능도 꽤 괜찮군.’
1층엔 일반 코볼트 50마리, 2층엔 코볼트 용병 40마리, 3층엔 엘리트 코볼트 30마리가 나왔지만 쉬웠다.
그래서 지하 3층까지 내려오면서 여유 있게 잡담까지 나누는 것이다.
“입구 장벽에서 희생된 3명에 따라 토굴의 몬스터가 많이 변해요. 당신들과 함께 가는 이유는 혹시나 밴시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밴시는 확실히 처치해 드리죠. 하지만 보상은 정확히 나눠야 해요.”
레네타와 카티에는 뒤쪽에서 보상 분배를 협상하기에 여념 없었다.
그에 반해 나를 포함한 네 남자는 적을 베고 걸으며 잡담을 나눴다.
베덴스가 턱을 만지며 말했다.
“세계에는 불세출의 검사가 딱 세 놈이 있다고. 황색대륙의 블라이넨, 청색대륙의 범철, 적색대륙의 롬.”
오호라, 나는 회귀자들에게 청색대륙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군.
하기야 딴 세상에서 왔다곤 못 해서 청색대륙 출신이라 둘러대긴 했었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중 최강은 바로 범철이야. 다른 두 놈에 비해 과장된 소문을 감안해도 정점이지.”
윽, 괜스레 낯 뜨겁군.
베덴스는 돌격대장 코볼트를 해치우곤 비밀처럼 은밀하게 속삭였다.
“사실 이 용살도, 그저 그런 잡기술이 아니다. 그 범철이 매 삶마다 써온 검술을 그대로 베껴온 거지.”
황동램프의 양초 심지를 교체하던 랑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형님. 그렇게 대단한 비기를 어떻게 습득하신 겁니까?”
“사실은 청색대륙 산속에서 1회차 때 범철을 주워서 키웠다는 신선을 만났다. 그 신선한테 검술을 배우느라 약초를 얼마나 갖다 바쳤는지.”
그 신선이 누군지는 몰라도 사기를 아주 제대로 당하셨습니다, 그려.
베덴스의 검술은 화려하지만 내가 저렇게 싸웠다곤 생각할 수 없다.
모양새는 훌륭해도 실속은 전혀 없어서 이곳저곳이 허점투성이니까.
그때 화살의 파공음이 울렸다.
쐐액!
1초 남짓한 짧은 새.
베덴스의 안면으로 날아든 화살을 내가 칼을 뽑아서 후려갈겼다.
파각!
내가 쳐낸 화살은 두 조각으로 부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세 남자가 귀신 보듯 날 쳐다봤고 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화살은 늘 조심해야지요. 앞에서 매복한 코볼트가 쏜 것 같습니다.”
“……허허. 형씨, 보통이 아니군?”
디일이 서둘러 달려가 어둠 뒤편의 코볼트 궁수를 단칼에 죽였다.
베덴스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형씨는 어떻게 밴시를 잡고도 멀쩡한가? 보통 회귀자라면 밴시만 봐도 얼어붙는 게 보통인데.”
“뭐, 제가 담력이 좀 셉니다.”
설명하긴 귀찮으니 대충 둘러대자.
카티에가 문득 말했다.
“벌써 마지막 층이네요.”
토굴은 4층이 마지막 층이라 했고 이곳엔 보스 몬스터가 서식한단다.
“지난 삶에선 배불뚝이 고블린이었지? 보상은 순간이동 장화였고.”
“이번 삶은 뭔 몬스터가 나올까?”
마지막 층에 발을 디디자 멀찍이서 크고 불균형한 형체가 걸어 다녔다.
“……저게 보스 몬스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