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7화 (7/200)

나만 1회차 007화

“재능을 하나 더 발견했어.”

나는 초보 아빠처럼 행여나 소녀가 울진 않을까 주의하며 말을 걸었다.

물론 카티에가 내 딸은 아니고, 다소 불안정한 정신병자이긴 했지만.

그런데 톡 쏘며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어쩌라구요.”

카티에는 내가 회귀자와 싸우는 동안 주위에서 망을 봐주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싸우고 있는데 다른 원수들에게서 발견되면 안 되니까.

실제로도 굉음을 듣고 찾아온 원수들이 있었지만 카티에가 현혹마법을 써서 다른 길목에 돌려보냈다 한다.

“난 이제 대장을 싫어할 거예요.”

“하, 그럼 지금까진 좋아해 줬고?”

카티에가 날 확 노려봤다.

“시끄러워요. 난 잠깐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 대장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대장은 내 생각은 안 하고 혼자 싸우기만 해댔어.”

난 그녀가 흥분하면 반말이 튀어나오는 버릇이 있단 걸 알고 있다.

뭐, 만날 삭막한 것보다야 낫지.

나는 배낭에 손 넣고 뒤적거렸다.

“혹시나 발작하진 마라. 손수건 빨아놓은 거 아직 다 안 말랐다.”

카티에는 눈썹을 찡그리며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놀리지 마요. 대장이 날 울보 취급하는 건 견딜 수가 없어.”

“열등감에 정신 나갈까 봐 그러지.”

“이젠 익숙해요! 대장이 재능 찾았다고 불안해하는 일은 없…… 읍!”

불평 막는 덴 음식이 최고라서 나는 소녀의 입에 쌀알을 들이밀었다.

카티에는 나를 불만스럽게 째려보면서도 쌀을 오독오독 씹었다.

나도 입에 쌀 반 줌을 털어 넣고 우득우득 씹으면서 말했다.

“난 회귀자 살해에 재능이 있었어. 그래선지 죽여도, 저항감이 없더라.”

“뭐라구요?”

카티에가 씹어서 뭉그러진 쌀을 몽땅 내뱉으며 소리쳤다.

이 녀석, 방금은 제대로 안 들었네.

난 소녀의 머릴 한 대 쥐어박았다.

“귀한 쌀 다 튄다, 인마.”

“아얏! 우후훗…….”

카티에는 내게 맞은 정수리를 만지면서 놀랍게도 처음으로 웃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죄스러워졌다.

정녕 내 꿀밤이 한 소녀를 백치로 만들어버릴 만큼 힘이 넘쳤단 말인가?

“왜 바보처럼 맞고서 웃냐?”

“대장이 꿀밤 먹이는 건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거니까요. 아니, 하여튼.”

카티에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것마저 새로운 재능이에요. 이전 삶까지의 대장한텐 없었다구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자꾸 이전 삶에 없었다는 재능이 지금 나한테서 발견되는 거야?

“대장한테 잠재된 재능이 검, 마법만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다른 재능이 더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요?”

그 말은 신빙성이 있었고 너무나 매혹적인 말이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재능들을 죽어라고 수련하면 셋이나 되는 대륙의 지배자를 전부 죽일 수 있지 않을까?”

“120번 살면서 처음 변화가 생겨 정말 신선해요. 매일 묵은 빵만 먹다가 처음 수프를 마신 것 같아요.”

서로 이유야 달랐지만 어찌 됐건 분위기가 달아올라서 내가 물었다.

“그런데 대륙의 지배자들이란 게 정확히 어떤 놈들이냐?”

이계에는 3개의 대륙이 존재한다.

황색, 청색, 그리고 적색 대륙.

각 대륙마다 명칭 색깔이 다르고 환경, 문화, 풍습도 각기 고유하다.

가령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황색대륙으로 풍족한 자원을 보유한 중세 서양과 엇비슷한 땅이다.

그러나 나는 대륙의 지배자에 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각 대륙에는 한 마리씩 ‘지배자’라고 불리는 몬스터가 있어요. 그 명칭에 걸맞을 만큼 강한 존재죠.”

나는 카티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지금껏 지배자를 사냥하려 한 회귀자는 많았지만 전부 실패했다 한다.

신神에 가장 근접한 세 몬스터!

가히 이계에서 가장 막강한 생명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했다.

나는 그러한 대륙 지배자들의 정체에 관심이 생겼다.

카티에는 확정적으로 말했다.

“황색대륙 지배자가 가장 약해요.”

“어떤 녀석인데?”

“아크 리치(Arch Lich)요.”

“…….”

갑자기 기분이 확 우울해지는데.

대마법사가 타락해 불사가 된 몬스터, 최강최악의 언데드 리치.

그 리치가 몹시 드물게 성장해 각성한 존재가 전설적인 아크 리치다.

평범한 리치만 해도 왕국을 허물고 대규모 학살의 흑마법을 다루는데, 하물며 아크 리치는 어떻겠는가.

근데 그놈이 제일 약한 편이라고?

‘괜히 회귀자들이 이번 회차목표를 포기하고 자살한 것이 아니군.’

내 서클 한계치가 12서클이긴 하지만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9서클을 달성할 수 있을까 말까다.

하지만 그건 너무 늦잖아.

“아.”

그때 나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야, 그런데 내가 만약 회차목표를 이루면 너는 먼저 자살한 네 동료 네 명을 못 보잖아? 괜찮겠어?”

회차 초반에 나를 찾아온 세베켈, 거한, 안경 쓴 여성, 그리고 소년까지 해서 네 명.

그 넷의 기억은 없지만 나와 100번의 삶을 함께한 일행이라 했다.

비록 나는 모르지만 카티에에게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일 것이다.

사망회귀를 멈추면 자살한 그 네 명은 절대 다시 만나볼 수 없다.

그러나 카티에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일행 중에서 누가 죽더라도 회차목표를 이루는 데 망설이지 않겠다고 각자 맹세했어요. 설령 나 혼자 남았어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겠군.

소녀가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뭐 할래요?”

나는 넌더리를 내며 한숨 쉬었다.

“일단 도시부터 나가자. 골목마다 시체 썩은 내 때문에 진저리가 나.”

***

검문소는 텅 비어 있었다.

도시 밖 땅으로 발을 내디디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설렘을 느꼈다.

사실 이계에 정착한 후 도시 밖으로 나간 일이 전혀 없었으니까.

‘내가 정말 재미없게 살긴 했구나.’

여행은 흥미가 없었고 돈 생기면 술집 가서 진탕 퍼마시기만 했다.

솔직히 최근 며칠 벌어진 일이 지금껏 살아온 나날보다 더 짜릿했다.

하지만 내 끝나가는 20대를 후회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으련다.

‘지금부터 잘 살아가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미쳐 버린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지는 확신 못 하겠다만.

“이쪽 길로 가면 수목이 많아서도 시보단 공기가 맑을 거예요.”

나는 카티에를 물끄러미 보았다.

소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좋아지려고 하시나요?”

“아니, 생각해 보니 너 몇 살이냐?”

난 슬슬 소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신체 나이가 어려 보이는 데다 회차 초반인데도 마법을 굉장히 잘 쓴다.

또한, 몇몇 회귀자에게 소녀가 ‘성녀’라 불리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지금 내 육체 나이는 19살이에요.”

어라, 카티에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너덧 살은 더 나이가 많았다.

키가 아주 작은 데다 피부가 아기처럼 우윳빛이라 더 어려 보인다.

“그럼 진짜 살아온 나이는?”

“4,000살 이후부터 안 셌어요.”

“어르신, 힘드시면 업어드릴까요?”

“……자꾸 그러면 울 거야.”

윽, 끔찍하고 잔인한 협박이로다.

나는 나무뿌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가 다시 중심을 잡고 말했다.

“그런데 마탑주는 왜 널 성녀라고 부르면서 고분고분 대했었냐?”

“성녀는 언제나 내 호칭이었어요. 내 몸에 진귀한 피가 흐르니까요.”

“진귀한 피?”

카티에는 보지도 않고 나무뿌리를 폴짝 뛰어넘으며 말했다.

“어머니, 할머니도 성녀셨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1회차 땐 혼자 수도원을 맡고 있었죠.”

성녀聖女.

태초부터 축복받은 일가의 극소수 여성만이 물려받을 수 있는 직종.

소문에 의하면 성녀는 광활한 치유력을 가졌으며 일가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기적까지 쓴다고 한다.

“현재 세상에 살아 있는 성녀는 저뿐이에요. 나머지는 맥이 끊겼죠.”

그래서 나는 놀라움과 동시에 의문점이 생겼다.

“넌 성녀라면서 어떻게 치유마법 말고도 다른 마법까지 할 줄 알아?”

카티에가 멀티 클래스이긴 하지만 익혀둔 마법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머니 따라서 4살 때부터 여러 지역을 떠돌며 배웠어요. 공격보단 보조에 치중한 축복을 잘 알아요.”

“수저 하난 잘 물고 태어났구나.”

“흥. 대장이 할 말은 아니라고 봐요.”

하여간 카티에가 천재적인 마법재능을 타고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그녀마저 질투하는 내 재능으론 세상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가보자, 저세상 끝까지!”

아씨, 깜짝이야.

누가 내 마음 읽고 대답이라도 해 준 줄 알았네.

우리는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려온 곳을 향해서 가보았다.

“이야, 또 죽었네!”

다섯 명 남짓한 사람들이 새까매진 시체를 둘러싸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세상은 무슨! 과거나 갔겠지.”

“우핫핫! 방금 저놈 표정 봤나?”

“다음은 바로 나다!”

듬직한 거한이 토굴 입구로 추정되는 힘차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반투명한 장벽이 생성되더니 거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히 태워졌다.

파지직!

네 명의 사람은 일행이 죽었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고 서로 얘기했다.

“좋아, 이걸로 세 명 다 채웠다!”

“레네타, 문지기들 언제 나올까?”

“지난 삶에선 고블린 10마리였잖아. 이번에도 보잘것없겠지, 뭐.”

저 상황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당신들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토굴 입장할 건가요? 우리가 먼저 왔으니 순서 지켜요.”

레네타라고 불린 키가 큰 금발 여자가 우리를 불청객처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건 아닌데 당신들 자살하는 꼴이 유독 별난 것 같아서.”

“자살? 다 이유가 있어서예요. 120번이나 살아놓고 그것도 몰라요?”

레네타는 날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입구 장벽에서 세 명쯤 죽어줘야 무작위로 문지기들이 튀어나와요. 그 문지기를 모두 죽여야 장벽이 사라져 입장 권한을 획득할 수 있죠.”

“그렇게까지 해서 저 토굴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뭡니까?”

“당연히 토굴 끝에 있는 보상 때문이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거참 무례한 사람이로군.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레네타는 혀를 쯧쯧 차며 끝까지 설명해 줬다.

“입구 앞에서 희생된 세 명에 따라 토굴의 난이도, 보상이 달라져요. 보통 다들 변수를 싫어하지만, 매번 변화가 독특하니 세상이 질린 우리들은 즐거워할 수밖에 없네요.”

세 남자가 그녀 쪽으로 몰려왔다.

“레네타, 어서 싸울 준비 해야지?”

“그래. 이번 조합은 꽤 신선하지?”

“응. 우리 일행에서 제일 강한 검투사를 셋이나 갈아 넣었잖아. 토굴 끝 보상도 틀림없이 엄청날 거야!”

레네타를 포함한 네 사람은 꽤나 흥분했고 나는 멀찍이서 구경했다.

“대장, 뭐 해요?”

“기다려 보자. 회귀자들이 집단으로 싸우는 걸 한번 보고 싶거든.”

회귀자들은 각자 장비를 고쳐 입고 완연한 태세로 대기했다.

조금 기다리자 토굴 입구 장벽을 뚫고서 문지기 몬스터가 나타났다.

흐우우우……!

“뭐야, 저게?”

난 실망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지기 몬스터의 정체는 쪼그만 여자애 유령이었다.

어린 밴시(Banshee).

밴시는 높게 쳐줘 봐야 하급에 불과한 유령으로, 대형 언데드가 지나가는 길에 따라붙는 잡졸 몬스터였다.

특히 어린 밴시는 별다른 전투력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우는 거랑 착란을 일으키는 게 전부이다.

칼로는 못 베겠지만 1서클 마법 한 방에도 그냥 소멸될 몬스터였다.

흐우우우……!

흐우우우……!

흐우우우……!

눈가가 시뻘겋게 부은 쪼끄만 여자애 유령들이 연달아서 튀어나왔다.

100마리쯤은 되어 보이지만 네 명쯤 되면 딱히 걱정할 것은 없다.

그런데 회귀자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배, 배, 배, 밴시다!”

“꺄아아아악! 다들 도, 도망쳐!”

“사, 사, 살려줘! 제, 제, 제발!”

새파랗게 질린 회귀자 4인방은 겁을 먹고 눈물까지 흘리며 도망쳤다.

심지어 레네타는 새하얘져 뛰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 밴시들은 최하급 유령이다.

혼자 상대하면 미칠 수도 있겠지만 여럿이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황당해 카티에를 돌아보았다.

“저놈들 회귀자 맞긴 하냐?”

그런데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카티에마저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가 주저앉고 만 것이다.

소녀는 밴시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으아아앙!”

아니, 이 녀석도 왜 이렇게 겁내?

성녀가 하급 유령을 무서워할 이유는 전혀 없을 텐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토굴에서 튀어나오는 밴시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하.”

나는 미소 지으며 도망치는 회귀자들과 반대로 밴시들에게 걸어갔다.

레네타를 포함한 회귀자 4인방은 내 뒷모습을 보며 경악하고 말았다.

“뭐, 뭐야! 저 사람!”

“빨리 돌아와! 안 그러면 다음 삶까지도 영영 백치로 살게 된다고!”

역시나 그래서였군.

나는 픽 웃으며 계속 나아갔다.

언뜻 듣기로 100세를 넘긴 노인은 밴시를 무서워한다는 격언이 있다.

밴시는 오래 살아온 자일수록 착란을 일으켜 백치로 만들어낸다 한다.

즉, 나 같은 1회차에겐 최하급 유령이지만 저들같이 120회차나 살아 온 회귀자에겐 최악의 천적이다.

흐우우우……!

흐우우우……!

흐우우우……!

100마리의 밴시가 폭풍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둘러쌌다.

아무리 밴시라도 혼자서 100마리를 상대하다간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

그러면 이걸 쓸 수밖에 없군.

‘유령은 유령으로 상대해야겠지?’

나는 회귀자를 살해하고 빼앗아 착용한 아이템을 드높게 들어 올렸다.

건틀릿이 희푸르게 발광했다.

파아앗!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