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1회차 005화
서클(Circle).
총체적인 마법의 수준을 뜻하며 서클이 높을수록 익히기가 몹시 어렵다.
5서클만 되더라도 마법사들이 목에 힘을 줄 만큼 다음 서클로 오르기가 까다롭다.
내가 알기로 마법은 9서클뿐이다.
8서클 마법만 해도 광범위 파괴, 용암폭발, 고속회복처럼 초월적이다.
그런데 12서클의 마법이라고?
“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먼저 대답을 한 것은 카티에였다.
그녀는 기겁한 나보다도 놀라서 두 눈을 파르르 떨 만큼 기절초풍했다.
에오실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의 몸에 잠재된 마나는 일반 마법사의 몇십 배 이상입니다. 게다가 멀티 클래스(Multi Class)로군요. 온 마법을 전부 배울 수 있지요.”
마법사는 체질마다 익힐 수 있는 마법의 종류가 현저히 달라졌다.
가령 리커버리 클래스(Recovery Class)라면 회복 계열에 특화된다.
그러나 멀티 클래스는 마법을 익히는 데 전혀 제한이 없고, 수련 속도가 훨씬 빠르다.
마법사들이 꿈꾸는 최상의 자질.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카티에는 그 설명만으론 전혀 납득이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멀티 클래스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것만으로는 12서클에 오를 수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잖아요.”
“예. 저도 쉽사리 믿긴 힘들군요.”
에오실은 눈썹을 떨다가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잿더미를 가리켰다.
“생명체에겐 각마다 서클 완성의 한계치가 있습니다. 가령 내가 방금 태워 버린 자는 0서클이었지요. 아무리 수련해도 1서클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에오실은 나를 정면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그대의 서클 완성 한계치는 12이오. 현재까지 밝혀진 마법의 정점은 9서클. 그대의 자질은 그보다 3단계는 더 올라간단 거요.”
“…….”
나에겐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서 허무맹랑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카티에도 할 말 잃은 표정이었다.
에오실이 소녀를 보면서 말했다.
“물론 인간의 수명으로 12서클을 달성하는 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수련만 하더라도 9서클이 마지막일 겁니다. 그건 개인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한계입니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거의 외면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어디까지나 서클의 한계치입니다. 지금 남들보다 강하단 의미는 아니지요. 그러나 수명이 무한해 영겁의 세월을 수련한다면, 그는 이론상 9서클의 벽조차 허물 수 있습니다.”
카티에는 입술을 꼭 씹었다.
“대장 같은 사람이 또 있었나요?”
“전혀요. 저 역시 살면서 처음 본 경우입니다. 내로라하는 대마법사들조차 서클 한계치는 9였습니다.”
전설 속의 대마법사조차 뛰어넘는 비범한 재능이 내 속에 품어져 있다.
그러나 전혀 실감 나지가 않는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하위직 인간이었던 나에겐 이러한 모든 상황이 거짓말처럼만 느껴졌다.
“범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오실이 다시금 나를 바라봤다.
“마법사는 천재에게 매혹되오. 일반인은 가질 수 없는 절대적 재능.”
나를 향한 늙은 마탑주의 눈빛에는 일말의 두려움마저 섞여 있었다.
“다만 범철. 그대는 천재라는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축복을 받았소.”
에오실의 눈동자에 120회차 회귀자다운 허무한 감정이 스쳐 갔다.
“이제는 질투조차 나지 않소. 그대에겐 극한의 검이 있소. 그런데 이젠 마법까지 쟁취하는군. 얼마나 더 많이 독차지해야만 만족할 테요?”
나는 지금 에오실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마법에 처음 입문하는 인물이 120번 삶을 매진한 자신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비상한 재능을 품고 있다.
그 누구라도 증오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조금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저는 회귀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에오실의 눈을 똑바로 봤다.
“120회차 세상은 미쳐 버렸죠. 죽고 과거로 돌아가면 그만인 당신들과 달리 나에겐 이곳만이 전부입니다.”
화가 나는군.
천재보다 더한 축복을 받았다고.
회귀조차 하지 못하는 내가?
여러 분야를 독차지하려고 한다고.
평안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내가?
“회귀자인 당신에게 죽음은 기회지만, 나에겐 끝입니다. 당신은 전생까지 기억하지만, 난 더 이상 내가 온전히 알고 있는 친구가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난 아무것도 독차지할 생각 없습니다. 오직 회차목표만을 달성해낼 겁니다. 사망회귀를 멈출 겁니다!”
에오실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내 목소리는 최고조로 격앙됐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세상을 버리고 자살한 회귀자 놈들이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정적.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에오실은 분을 삭이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미안하오. 내가 그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뱉었군.”
“저도 사과드립니다. 욱했군요.”
나는 급하게 카티에를 곁눈질했다.
그녀에게는 다음 삶을 위해서 자잘한 동료들이 셋이나 있다.
그러나 소녀는 불안정한 눈으로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뿐이었다.
곧 마탑주는 손가락을 움직여 선반의 붉은 배낭을 떠오르게 했다.
“샐러맨더 가죽으로 만든 마법배낭이요. 부피보다 10배는 들어가고 중량도 가벼우니 가져가도록 하시오.”
나는 천천히 배낭을 어깨에 멨다.
이어서 에오실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참나무 탑 서가에 공용마법서가 있소. 사람도 없으니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겠지. 그걸로 1서클 기본마법 대부분은 바로 익힐 수 있을 거요.”
“감사합니다.”
“볼 장 다 봤으면 어서 가시오.”
에오실이 골 아프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보이며 손을 휘저었다.
나도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다.
나가며 방문을 닫으려는데.
“문은 열어 놓으시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바람 좀 쐐야 할 것 같으니까.”
꽤나 예민해졌군.
우리가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마탑주의 고통스러운 혼잣말이 내 귓가에 희미하게 스쳤다.
“10서클…… 그 이상의 마법이 현실에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만약 그러한 마법을 얻게 된다면…… 저 사람은 더 이상…… 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어째서 인생을 바치며 마법을…….”
그 뒤는 듣지 못했다.
묵직한 굉음이 들려왔다.
우드득!
나는 내려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등골이 오싹하다.
설마?
나는 황급히 뒤돌아 마탑주의 방으로 다시 뛰어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만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탑 아래에 누군가 떨어져 있었다.
마탑주.
에오실은 그곳에 떨어져 있었다.
팔다리가 모두 조각나 떨어지고 내장은 튀어나왔으니 죽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살이었다.
내가 회차목표를 이뤄 사망회귀를 멈출 것이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에오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그보다 재능이 뛰어났기에.
“젠장…….”
나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옆에는 너무나 태연하게 시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에 관해 깊게 토론 중인 마법사들이 있었다.
***
참나무 탑의 서가 대부분의 서적에는 도난방지봉인이 걸려 있었다.
나는 개중에서 공용초급마법서 4권을 찾아내 활짝 펼쳐서 읽었다.
그러자 빛이 나며 책이 사라졌다.
[화염구(1서클)를 익혔습니다.]
[별빛회복(1서클)을 익혔습니다.]
[기름바닥(1서클)을 익혔습니다.]
[마법적 재능으로 인해 1서클 마법은 곁눈질만으로 습득할 수 있습니다.]
각 계열의 기본적인 1서클 마법들.
비록 1서클이라곤 하나 계열마다 마법의 습득 난이도가 천지 차이다.
가령 내가 수련관에서 했던 구울 부활은 1서클 흑마법이지만 일반적으로 익히려면 부두사제 밑에서 최소 1년 넘게 수련해야 한다고 했다.
“…….”
난생처음 마법을 배워서 설레어야 할 테지만, 기분이 영 껄끄럽다.
자꾸만 마탑주의 조각난 시체가 떠오른다.
“후.”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냉정해져야 한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괜히 정신력 잃어봤자 나만 손해다.
“아.”
그러고 보니 카티에.
그녀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여태껏 따라온 소녀가 있었고 난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야!”
카티에는 아직까지 피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서 있었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씹었는지 카티에의 조그만 입가에 피가 흘렀다.
심지어 핏물이 목에까지 타고 내려 핏방울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나는 경악해서 순간 멍해졌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냐?”
“대장…….”
카티에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나는…… 쓸모없지 않아요.”
뭐?
나는 눈썹을 확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대장이 마법을 배웠잖아요! 게다가 나보다 재능도 뛰어나구요!”
카티에가 분해서 숨을 거칠게 쉬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엉엉 울었다.
“나는 마법 말고 전생 지식도 알고 있고, 보름날이 지나면 쓸모도 많아져요! 날 제발 버리지 마세요.”
맙소사.
나는 경험대로 서둘러 소녀를 안고 손수건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였다.
“너, 도대체 왜 이래?”
“나 두고 가지 마…….”
또다시 불안증이 도진 것 같다.
그래도 그나마 따스하게 포옹하니 소녀의 떨림이 진정되어간다.
카티에는 불안증세와 더불어 내게 집착하는 성향까지 몹시 심각한 상태였다.
전생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을 겪었기에?
“하하하…….”
아주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하여간 이놈의 회귀자 판인 세상.
자살자들도 그렇고, 에오실도 그렇고, 카티에도 그렇고 죄다 돌았군.
이런 피폐한 세상에 나 혼자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
주먹을 움켜쥔다.
그렇다고는 해도 절대 포기할 수는 없지.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어.
이곳만이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세상인데.
나는 소녀가 안심하도록 부드럽게 미소 짓곤 등을 쓰다듬었다.
“입술 그만 씹어, 다친다.”
“대장이 날 버리고 가면 내 입술 다 씹어 먹어버릴 거야.”
“난 너를 버리지 않아. 그러니까 진정해라.”
나는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아줬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녀의 입술에 묻은 핏기가 염료보다 진해 지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카티에가 내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나에게서 멀어지지 마요. 대장.”
그 말을 달싹이는 입술에는 나의 손수건으로 아무리 지워도 닦아낼 수 없는 광기가 있었다.
***
“원하신다면 발바닥이라도 핥을게요. 아니, 어디라도 다 핥을게요.”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호색한으로 보이냐?”
“그럼 쌀밥이라도 해줄까요?”
“난 내가 짓는 밥이 제일 맛나다.”
제정신(?)으로 돌아와 삭막해진 카티에는 자결이라도 할 태세였다.
아랫입술 상처는 마법으로 치유했지만 흉터가 사라지려면 꽤 걸린단다.
우린 마탑을 나와서 도회지 근처를 걷고 있었다.
“됐고. 그렇게 미안하면 내가 하려는 일 좀 도와줘 봐라.”
“뭐든지요. 뭐 할래요?”
내가 오늘 기분이 좀 더럽다.
그러니까 좀 시원하게 풀어야지?
나는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회귀자를 사냥할 생각이다.”
***
새벽녘 도시 외곽에는 안개가 낀다.
아직 미세하게 남은 신호탄 잔해 탓에 안개 색깔은 기묘하게 붉었다.
그런 붉은 안개 속에서 나는 우두커니 혼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흐아암.”
졸리군.
어젯밤엔 하수구 근처에서 노숙했더니 피로만 된통 쌓이는 것 같다.
내가 카티에에게 부탁한 정보는 ‘전생의 원수가 다니는 길’이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정신이 불안정해서 그렇지, 기억력이 엄청 비상했다.
전생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소녀는 내가 원하는 루트를 쓱쓱 그려줬다.
-새벽 4시, 89회차~119회차 초반 기억에 의하면 도시 외곽에서 원수 하나가 여길 반드시 지날 거예요. 다만 누구일진 나도 짐작 못 해요.
그리하여 난 회귀자를 쳐 죽이기 위해 여기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살인에 관하여 괴팍하고 가학적인 성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멍하니 있다간 살해당할 뿐이다.’
전생의 원수들은 항상 날 노리고 있고, 카티에의 도움도 한계가 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실전경험.
게다가 날 죽이려는 놈들이라면, 내게도 그놈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
앞으로 버림받은 120회차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회귀자와의 싸움법을 익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무소식.
‘이거, 카티에가 실수한 것 아냐?’
그런 의심이 막 들었을 찰나.
붉은 안개에 사람 그림자가 졌다.
웃음기가 스며든 목소리가 들린다.
“네놈은 새벽 산책을 할 때면 언제나 이쪽 길목으로만 다니지, 범철.”
누가 회귀자 아니랄까 봐.
대놓고 스포일러를 하며 건방지게 걸어 나오는 놈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