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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4화 (4/200)

나만 1회차 004화

마탑魔塔.

그곳은 마법사들의 전유물이며 마나 수련과 명상을 하는 수양 장소이

‘거기서 마법을 익힐 수 있다고?’

이계에 막 넘어왔을 때, 마법을 쓰는 광경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텅 빈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몬스터를 새까맣게 태운다.

크지 않은 외상을 순식간에 치유하고 짧은 거리는 금세 순간이동한다.

‘과거의 나는 배우지 않았지.’

내가 원한 것은 평안한 일상에 불과했기에 마법에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내게 재능이 있다면, 회차목표를 위해서 강해져야만 한다.’

120회차 세상의 목표, 세 대륙의 각 지배자 말살.

목표을 달성하면 사망회귀는 멈추고 숙원을 한 가지 이뤄낼 수 있다.

마법을 수련해 검술과 접목하면 회차목표를 달성하기 수월할 것이다.

“하암.”

새벽에 깨어나니 몸이 좀 쑤셨다.

어제 격하게 움직였던 탓이다.

그나마 평소 화분을 나르며 단련된 육체 덕에 근육통이 가벼웠다.

“새벽 6시 6분에 안개가 생겨요.”

카티에와 난 도회지 골목에 있다.

구석진 뒷골목은 사람은커녕 비좁아서 드높은 건축물 따윈 없었다.

“마탑으로 간다면서?”

“안개가 출입문이에요.”

6시 6분이 되자 안개가 피어났다.

내가 뿌연 안개 속을 더듬거리는데 카티에가 내 손목을 꼭 잡았다.

“조심히 잘 따라와요, 대장.”

“야, 그냥 나 혼자서 가면 돼.”

“대장 잃어버리면 나는 눈물 나요.”

“…….”

누나 손 잡고 가는 남동생 꼴이군.

우린 안개 속을 한참 걸었지만 신기하게도 벽에 부딪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화악!

갑자기 안개가 깨끗하게 걷혔다.

“와…….”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눈앞의 광경은 시체가 곳곳에 쌓인 도시가 아니라 울창한 숲이었다.

맑은 공기와 싱그러운 잎사귀에 둘러싸인 곧은 건축물이 하나 보였다.

“저기가 참나무 탑이에요.”

으아, 아찔하게 높군.

참나무 탑은 내가 지금껏 보아온 여느 탑들보다 훨씬 크고 높았다.

그런데 참나무 탑 주위엔 우리 말고도 마법사가 꽤나 모여 있었다.

“고목비약 제조서 구하실 분 찾습니다. 25회차째 도전 중이에요.”

“화염일색 수인동작 암기 도와주실 분 없나요? 죽어서 다음 삶으로 넘어가면 또 까먹을 것 같아요.”

120회차의 회귀한 마법사들.

저들은 따로 정보를 얻거나 뭔가에 재도전하기 위해서 모인 모양이다.

하지만 회차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심쩍게 카티에를 바라봤다.

“숨겨진 마탑이라면서? 그런데 우리 말고도 꽤 있는데?”

“알 만한 회귀자만 아는 곳이죠.”

여럿 회귀하니 이런 단점이 있군.

하기야 회귀도 혼자서만 한 게 아니라면 이득 볼 게 없겠다.

어지간한 미발견 요소들도 모두 밝혀져서 독식이 거의 불가할 테니까.

그래도 나는 참나무 탑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나마 마법사들은 다른 회귀자에 비해 생기 있어 보였고 탑 주위에는 시체들이 한 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나를 가리켜 말했다.

“어? 예전에 저 사람 본 기억 있는데……? 와, 진짜로 범철이잖아!”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법사들 이목이 나한테 집중됐다.

놀라기도 하고, 겁먹기도 하고, 혹자는 숨 멎을 듯 감격한 표정이다.

“저 검술의 귀재가 마탑에는 어째서?”

“뭘 사냥하러 오신 것 아닐까?”

“세상에. 120회차에서도 회차목표를 포기하지 않으셨나 봐.”

내가 전생에 그렇게 유명했나?

회귀자들이 날 알아보고 수군거리는데 기억에 뭐가 있어야 말이지.

그때 늘씬한 체형의 여성 마법사가 내 쪽으로 뛰어와 내 손을 잡았다.

“꺄아악! 범철 님. 오랜만이에요!”

나는 당황해서 여자를 바라봤다.

“저, 누구십니까?”

“제 기억은 없으시겠죠, 당연히?”

여성 마법사는 유명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다.

“지난 삶에서 범철 님이 제 아버지를 트롤한테서 구해주셨어요! 몽둥이는 부수고 트롤은 단칼에 죽여 버렸죠.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범철 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아빠는 식물인간 되어서 죽지도 못하고 황야에 나뒹굴 뻔했다니까요!”

“아아…… 그랬습니까?”

난 그저 떨떠름한 표정만 지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사람들은 무슨 날 영웅처럼 우러러보는데 정작 난 기억이 없으니.

“범철? 포크로 소드 마스터도 농락했다는 그 전설이 여기에 왔다고?”

“좀 비켜! 나도 구경 좀 해보세!”

입소문은 사람을 불러모았고 어느새 나는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과장됐는지 모를 괴담을 떠들었다.

내가 호승심에 코끼리도 잡아먹는 괴조怪鳥의 둥지로 침입했다거나.

인간을 해치는 램프를 내가 굴복시켜 마인魔人을 종으로 삼았다거나.

외딴 대륙에서 신이 된 내가 그곳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는 신화까지.

내가 듣기에는 태반이 허풍이었다.

나중엔 나는 뒷전이고 저들끼리 설전을 벌이느라 멱살까지 쥐어댄다.

“아, 글쎄 내 말이 맞다니까!”

“네가 범철에 대해 뭘 알기나 해!”

곤경에 빠진 날 카티에가 구했다.

소녀의 손에 이끌려서 몰래 인파를 빠져나온 나는 기가 차서 말했다.

“원래 마법사는 다 저러냐?”

“마법사들은 천재를 좋아해요.”

“내가 그 정도로 뛰어난가?”

카티에는 흠칫 멈춰 섰다.

소녀의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졌다.

“대장은 진짜 재수가 없어요.”

얘는 정신 나갈까 봐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카티에가 열등감을 추스른 뒤에야 우리는 참나무 탑에 들어설 수 있었다.

***

참나무 탑은 목재 향기가 향긋했다.

층마다 서가, 실험실, 강의실이 빼곡하고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다.

‘평범한 마탑이랑은 수준이 다르군.’

규모가 크고 설비가 완벽했다.

탑 천장에 자그마한 태양이 떠 있어 적당한 햇볕이 내리쬐어졌다.

그 주위로 마법사들이 한가로이 책을 들고서 걷거나 계단을 내려갔다.

멀리 강의실의 마법사들도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전생경험을 토론하는 중이었다.

“지난 삶에서는 코달타 해역을 가 봤소. 악천후를 뚫고 밑바닥까지 잠수했더니, 그곳에 고대 창 조각이 있더군. 일곱 조각을 모두 모으면 폭풍을 다루는 창이 완성될 거요.”

“저는 다른 대륙 극저온 지방을 탐사했습니다. 놀랍게도 서북쪽 빙산에 거대한 괴생물이 갇혀 있더군요. 만일 빙산이 녹아버리면, 그 괴생물이 다시 날뛰게 될지도 모릅니다.”

과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마법사들답게 윤회수뇌부의 포기 선언에도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다.

나는 정면의 계단으로 걸어가는 카티에를 붙잡고 강의실을 가리켰다.

“마법은 저기서 배우는 것 아냐?”

“아뇨. 최고 실력자에게 갈 거예요.”

“누구?”

“참나무 탑의 마탑주요.”

마탑주란 말에 나는 혹해졌다.

모름지기 현실의 건물주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이계의 마탑주이다.

당연히 자그마한 마탑이라도 주인이 되려면 엄청난 마력이 필요하다.

대마법사보단 아래지만, 마탑주는 가공할 만한 실력의 마법사다.

내가 듣기로 마탑주의 힘은 군단을 단숨에 쓸어버릴 수준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회귀자이기까지 하니 그 강대함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마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가장 꼭대기 층.

마탑주의 방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지난 삶에서 말했지 않나? 당신은 마법을 배울 자질이 조금도 없소.”

낮은 목소리가 문밖으로 울렸다.

카티에는 노크도 없이 문 열었다.

한 청년이 뭔가를 쓰고 있는 노인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마탑주면 그만이야? 마법 하나 가르쳐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나도 회귀자야! 120번이나 살고 있다고!”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시오? 바로 ‘재능’이오.”

마탑주는 항변을 간단히 일축했다.

“당신에겐 마법의 재능이 없소.”

“하지만 회귀해 노력한다면…….”

“회귀하면 뭐하오? 당신은 만 번을 살아도 기초도 못 배울 거요.”

청년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화가 치밀어 시커먼 대검을 뽑아 겨눴다.

“젠장, 웃기지 마! 회귀했는데 왜 못 강해지냐고! 이 칼이 뭔지 알아? 흑철동굴에서 뽑아온 명검……!”

그때 노인은 느긋하게 청년이 겨눈 육중한 칼날에 손을 얹었다.

단지 그런 간단한 동작만 펼쳤을 뿐인데 칼끝이 무뎌지듯 타버렸다.

“어, 어?”

청년은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다.

대검이 재가 되고 그다음 청년의 손끝, 어느새 팔뚝까지 재가 된다.

“아아악!”

청년의 상체가 빠르게 타들어 간다.

불꽃조차 없이 말이다.

노인은 죽어가는 청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다음 삶에서도 찾아오면 뇌수를 뒤엉키게 해 전신불수로 만들겠소.”

청년은 전부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그걸 보고서 난 마른침을 삼켰다.

같은 회귀자라도 격이 다르구나.

“누구요?”

이제야 마탑주는 고개를 들어서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에오실 마탑주님.”

“아니, 카티에 성녀님 아니십니까.”

에오실이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의외로 카티에는 마탑주와 지나온 삶에서 면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를 성녀라 부를까?

“이런 회차에서도 용케 남아 계시는군요. 마탑에 무슨 볼일입니까?”

카티에는 내 옷깃을 끌어당겼다.

“우리 대장이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해요.”

순간 에오실의 미소가 싹 사라지더니 날 차갑게 훑어보았다.

“범철? 그대는 검사가 아닌가? 이제 와서 마법을 배우겠다고?”

왠지 찔리지만 두려워할 건 없다.

마법 배우려는 게 큰 잘못이냐?

“죄송합니다. 기억이 없어서요. 혹시 전생에 저와 만난 적 있습니까?”

“아아.”

군단 하나쯤은 간단히 파괴할 수 있는 마탑주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대가 예전에 날 한 번 죽였소.”

썩을, 오늘 일진 사납다.

***

무의식적으로 칼자루를 쥘 뻔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탑주가 나에게 마법을 쓸 것 같아 포기했다.

그러나 나와는 별개로 에오실은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듯 말했다.

“40번째 삶쯤 한 번 타락해 봤소. 욕구를 분출하는 행동은 유쾌했지만 단지 그뿐이더군. 신기루와 같았소.”

이 마탑주, 타락을 무슨 젊은 시절의 일탈처럼 얘기하는군.

나는 긴장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마탑에 앉아서 많은 것을 죽이고 태우고 찢고…… 그러던 중에 그대가 찾아오더군.”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에오실이 나를 바라본다.

정확히는 40번째 삶쯤의 범철을.

“그대와 나눴던 논제는 흥미로웠소. 나는 마법과 칼 중 어느 것이 더 강할지 물어보았지. 그랬더니 그대가 그랬소. 싸워보면 알 거라고.”

듣자니 그 결과가 궁금하긴 했다.

검과 마법, 누가 이겼을까?

“다만 결투는 없었소. 그대가 내 찻잔에 몰래 독을 타 날 죽였지. 회귀를 거듭한 나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대의 뒷공작은 치밀했소.”

“…….”

나답게 허무한 승리였군.

하긴 그러니까 나한테 죽었겠지.

설마 복수하려는 작정일까?

“허무했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해 봐도 나쁠 것 없는 경험이었소.”

휴, 말은 좀 이상하지만 어찌 됐든 다행히 내게 복수심은 없나 보다.

“어쨌든 난 검이 마법보다 뛰어나다는 의견만큼은 찬성할 수 없소. 검은 적만을 죽이지만, 마법은 세상조차 휩쓸어버릴 잠재력을 지녔지.”

에오실은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설마 자살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창을 열고 바람만 들게 했다.

“난 120번의 삶 동안 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소. 내가 세운 탑을 지키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책임이니까.”

에오실은 밖에서 나에 관해 얘기하고 싸우는 마법사들을 내려다봤다.

“마법사란 본래 끝없이 마나를 탐구하는 직종이지. 그래서 회귀를 거쳐 안정적인 실력을 기를 수 있소.”

본인의 말이 우스웠는지 에오실은 엷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쳐 버린 마법사도 많기야 많지. 하여간 마법사야말로 가장 회귀자에게 걸맞은 직업이란 거요.”

그가 나를 바라봤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니 거기에 뭐라 하진 않겠소. 다만 마법은 검술보다 힘겨운 길이란 것을 알아야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오실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먼저, 마법에 관한 자질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겠소. 소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절대 내게서 마법을 배울 수 없소.”

희끄무레한 빛이 내 전신에 깃들고 간질이듯 몸 전체를 훑는다.

“…….”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에오실은 눈살을 깊게 찌푸리곤 내 몸의 빛을 이리저리 과격히 굴렸다.

하품이 나올 만큼의 시간이 지나서야 한참을 감돌던 빛이 사라졌다.

에오실은 한동안 침묵하다 말했다.

“그대는 나한테 배울 수 없소.”

나는 입술을 씹었다.

지금처럼 마탑주에게 가르침을 얻을 순간이 또 언제 있겠는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저한테 뭔가가 부족한 겁니까?”

에오실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누가 누굴 가르친다는 거요? 내겐 그대를 가르칠 만한 자질이 없소.”

뭐?

에오실은 짜증을 담아서 충고했다.

“독학하시오. 그대에게 걸맞은 스승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씀은……?”

그는 나를 무슨 괴물이라도 되듯이 탐탁스럽지 않게 보며 중얼거렸다.

“싸워보면 안다고 하더니. 결국 혼자서 검, 마법까지 독차지해 버렸군.”

어리둥절해하는 내 눈앞에 환한 글귀가 떠올랐다.

[마탑주에게 인정받았습니다!]

[마법재능을 개척했습니다.]

[당신의 마법재능은 SSS급입니다.]

[‘1,000년 만에 차원전이한 대마법사’를 뛰어넘을 재목!]

에오실이 본인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대는 12서클에 오를 수 있는 미친 재능을 지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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