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1회차-2화 (2/200)

나만 1회차 002화

거한이 혀를 찼다.

“그놈, 하여간 성질 급하긴.”

“원래 세베켈이 판단은 칼이잖아.”

“그래도 이번엔 너무 성급했어. 혼자 남는 대장도 생각을 해줘야지.”

나는 혼란스러워서 손아귀로 얼굴을 쥐듯이 감싸고 주저앉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조용하던 도시가 일순간 외딴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자살하고,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 미친 세계.

“…….”

보고도 믿기지 않아 실감할 수 없었다.

뭐, 다들 저렇게 자살을 쉽게 해?

아무리 죽으면 과거로 돌아간다지만 자기 목숨이 그렇게 헤픈 거야?

혼란에 빠진 나를 뒤로한 채 거한은 팔짱을 끼고 의견을 제시했다.

“확실히 하자. 윤회수뇌부가 포기했으니 120회차는 가망조차 없어. 세상을 구원하려던 영웅들은 모두 죽고, 방관하는 소시민과 이기적인 악한들만 남은 세상이 되겠지.”

그는 한 차례 쉬고서 말했다.

“하지만 대장을 위해서 한 명쯤 여기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았든지 다음 삶에선 오늘 시점으로 만날 수 있으니까.”

남은 네 사람은 서로를 돌아봤다.

바로 그때.

유일하게 이번 삶을 포기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던 자가 손을 올렸다.

백발 소녀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내가 남겠어요. 여러분보다는 내가 그를 맡는 편이 좋을 테니까.”

“좋습니다, 성녀님. 기회가 된다면 다음 삶에서 후기 좀 들려주세요.”

“하긴 우리 중에서 제일 대장과 각별하실 테니까…… 어째 어려운 일은 늘 성녀님 몫이네요.”

“부탁드립니다. 대장 좀 잘 보살펴 주십쇼. 혼자선 꽤 힘겨울 테니.”

세 명은 각자 백발 소녀를 안거나 악수하며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창틀 밖으로 몸을 돌렸다.

내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젠장, 설마 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손을 뻗었다.

“안 돼!”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우드득! 우드득! 우드득!

살과 뼈가 으깨지는 소음이 연달아서 세 번이나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창밖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빌어먹을…….”

처음에 이계를 떠돌면서 사람이 죽는 광경은 서너 번 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사인死因은 몬스터나 범죄자에 의해서였지 본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신 나간 저것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대고 있다!

“대장.”

힘들 때 누군가 내 머리를 만졌다.

백발의 소녀였다.

“……너만 남아줬구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서로 말을 나누지 않기를 10분여.

그제야 머릿속이 좀 차가워진다.

왠지 뻘쭘해 이름을 물으려는데 백발 소녀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뭐 하고 싶어요?”

내가 뭘 하고 싶냐고?

백발 소녀가 갑자기 던진 질문에 나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검을 배우고 싶어.”

혼란스럽지만 적응해야만 한다.

지금껏 나는 경쟁과 싸움이 없는 삶을 원해서 평범하게만 살아왔다.

하지만 보다시피 세계가 미쳤다.

이계 인류 전체가 회귀자고 전생의 원수들이 나를 죽이려는 세상이다.

최소한 내 육신 하나는 혼자서 제대로 간수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120회차 세상의 목표. 세 대륙의 지배자를 말살하는 것.’

각 회차목표를 달성하면 자신이 원하는 숙원을 하나 이루고 인류의 사망회귀를 멈출 수 있다고 한다.

의지를 다지며, 천천히 일어선다.

나는 멀찍이서 스스로 가볍게 목숨을 끊는 회귀자들을 지켜보았다.

‘너희야 자살해 회귀하면 그만이겠지.’

나는 이계 출신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회귀할 수가 없다.

하지만 도리어 이를 악물게 된다.

내가 살아갈 세상을 버리고 떠나가는 회귀자들에게 반항심이 솟았다.

‘너희가 버린 세상이 나에게는 전부고, 현실이다. 그러니 해내 주마.’

***

우리 둘은 종탑에서 나왔다.

거리를 걷는데 자살하려는 회귀자들의 대화가 언뜻 귓가를 스쳤다.

“약속이다. 죽으면 여기서 만나!”

“에이 씨, 붉은 신호탄이네. 이렇게 되면 빨리 죽고 리셋이다!”

“편하게 죽으려는데 혹시 안락사용 자결약 가지신 분 안 계십니까?”

개소리들 같겠지만 전부 진실이다.

거리에는 시체가 어렵잖게 보였다.

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인상을 구겼다.

‘기가 찰 노릇이군. 빌어먹을.’

그렇지만 온 세상 회귀자가 자결만을 일삼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명령에 모든 시민이 순응하는 사회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예절들 좀 지켜요! 대로 한복판에서 자결하면 외관은 누가 책임져?”

“자살할 거면 구석진 골목으로 가요!”

“누가 멋대로 강물에 빠져 죽은 거야? 얼른 건져! 물에서 썩기 전에!”

거리에는 시체들의 수보다 살아 있는 회귀자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참으로 역겨워진 세상이 된 것만은 변함이 없다.

“어?”

거리에서 스쳐 가는 회귀자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이 하나 보였다.

“나버드! 여기!”

나는 곧장 크게 소리치곤 그를 향해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과수농부 나버드.

도시 공판장에서 산호수를 싸게 대 주는 녀석인데 나와 친분이 깊다.

평소에 술친구로 지내는 놈을 만나니 괜스레 안도감이 다 들었다.

그런데 나버드의 얼굴은 내가 평소 알던 넉살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히히이익!”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안색이 새하얘지더니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

저 녀석이 왜 저래?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앞장서 가던 소녀가 짤막히 설명했다.

“그는 대장한테만 14번 죽었어요. 뒤통수를 자주 쳐서 배신했거든요.”

“뭐라고? 저 녀석은 개미 새끼 한 마리 함부로 밟지 못하는 놈이야.”

“그건 1회차 세상 시절의 얘기죠.”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세상 인간 모두 회귀자라면, 내가 알던 지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나와 친하게 지내던 그 사람들’이 아닐 게 분명했다.

‘이제 세상에는 내가 온전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겠구나.’

소름 끼치는 생각에 가슴 속이 싸해졌을 때.

조그만 꼬마가 아장아장 걸어와 백발 소녀 옷깃을 꼭 쥐고 속삭였다.

“초면에 실례지만 저 좀 죽여주세요. 잠재우는 마법 알고 계시지요?”

“…….”

옹알이가 뒤섞인 발음이지만 그 내용은 기괴해서 이해하기 싫어진다.

백발 소녀는 조용히 끄덕였고 수인手印을 맺어 여자애를 잠재웠다.

나는 기겁해서 그녀를 뜯어말렸다.

“야, 인마!”

백발 소녀는 날 건조하게 돌아봤다.

“죽이지 말까요?”

나는 얼굴을 심각하게 찌푸렸다.

“그걸…… 말해줘야만 아냐?”

“네, 그럼 죽이지 않을게요.”

그녀는 순순히 재워둔 꼬마 아이를 구석진 곳에 눕혀두고 다시 걸었다.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나는 한숨을 쉬며 내 뺨을 때렸다.

‘그런데…….’

나는 백발 소녀의 뒤통수를 봤다.

그나마 자살하지 않아서 다행인데 도저히 저 애의 속내를 모르겠다.

워낙 말이 없고 표정도 없다 보니 수려한 유리 인형처럼 느껴진다.

‘뭐, 확실히 회귀자는 회귀자네.’

백발 소녀는 구불구불하게 걸었다.

그냥 대충 길을 가는 것 같은데도 날 죽이려는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 전생의 원수들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루트를 밟고 있는 거겠지.

‘여긴…….’

소녀가 찾은 건물은 익숙했다.

초심初心 수련관.

검술, 창술, 권법처럼 무술과 기예를 대련해 수련할 수 있는 장소.

평소라면 수련생이 연무하고 있을 테지만 시체와 병장기들밖에 없다.

‘설마 이놈들 전부가 다음 삶을 노리고 자결한 건가.’

윤회수뇌부의 명령에 충성하는 정파만이 모여 있던 장소였나 보다.

백발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사범의 시체에서 칼집을 훔쳐 들었다.

“받아요.”

“아, 고맙다.”

피가 좀 묻었지만 생초보에겐 과분할 정도로 칼날이 번뜩한 명검이다.

나는 뒤늦게야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알고 싶나요?”

“어. 그렇지, 뭐.”

“카티에 로넬야드.”

외견이 어려서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갔는데 나보단 훨씬 연상이겠지.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너도 편하게 반말해라. 실제론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텐데.”

“아뇨. 대장한테는 존대가 편해요.”

어째 인형이랑 대화하는 것 같다.

120번 살면 다 저렇게 삭막해지나.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카티에는 손아귀에 마력을 품었다.

“처음이니까 간단히 시작할까요.”

건조한 목소리와 동시에 수련관에 있는 시체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머리칼이 빠지고 살점은 썩어가며 더러운 이빨이 투두둑 튀어나온다.

구울(Goul).

“저, 저게 다 뭐냐?”

카티에는 지겨운 어투로 말했다.

“총 100마리의 수련생 구울. 전부 다 죽여요.”

“누가?”

“대장이 죽여야죠.”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구울이 내게 달려들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아악!”

나는 칼을 뽑을 새도 없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황급히 물러났다.

“쿠뤄어억!”

식인귀食人鬼.

사람을 잡아먹고 산다는 하급 구울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련생 구울이 이빨로 물어뜯자 내 소매 끝자락이 뜯겨 나가버렸다.

희미한 이빨 자국이 남은 손목을 보자 내 등골이 싸해졌다.

‘진짜 실전이다.’

나는 이제야 막 칼을 쥔 참이다.

검술의 기본자세는커녕 칼자루를 쥐는 법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 나보고 저것들이랑 싸우라고?

나는 카티에를 노려봤지만 소녀는 흐리멍덩하게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쿠뤄어억!”

사방에서 되살아난 100마리의 구울이 날 보고 더러운 침을 흘렸다.

“으악!”

난 허겁지겁 연무장을 뛰어다녔다.

구울 이빨에 물렸다간 파상풍은 기본이고, 잘못하면 산 채로 뜯어먹혀 바로 죽는 거잖아!

칼을 뽑지도 못하고 도망만 치다가 볼품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아, 안 돼!”

결국 나는 수세에 몰려 버린다.

내가 도망칠 경로가 전부 막혔다.

울부짖는 구울들에게 둘러싸인다.

그리고 3시간 뒤 나는 생각했다.

‘……완전 쉬운데?’

***

극한의 위기상황 속에서 칼을 뽑자 구울이 밥으로 보였다.

“쿠롸아악!”

서걱!

구울의 썩은 목덜미가 갈라졌다.

머리가 떨어진 구울은 재가 됐다.

밥이란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언제든, 아주 간단히 해치울 만하다.

열 마리 구울이 달려들자 나는 집중하며 칼의 궤도를 가늠해 보았다.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본 건 방금이 처음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칼날의 결이 보였다.

서걱! 서걱 서걱!

구울들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이건 정말로 전혀 어렵지 않았다.

갓난애도 밥알은 씹을 줄 안다.

칼로 구울의 목을 베는 것은 밥 한 공기 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간단해.’

진검을 제대로 쓴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오늘 처음 쥐어보는 칼은 내 신체 일부분처럼 손에 착 달라붙었다.

칼을 쥐자, 빈손일 때와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

스스로 칼날을 내젓고 구울들의 목을 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칼자루를 쥐는 법조차 배우지 않았고, 검술의 기본자세도 전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벌써 내게 맞는 자세들을 대충 창작해낼 수 있었다.

‘내게 정말 재능이 있었던 건가?’

전생 40대의 나는 포크 하나로 소드 마스터를 갖고 놀았다고 한다.

처음엔 무슨 헛소린가 싶었지만 지금 와선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쿠뤄어어억!”

그렇게 3시간이 흐르자.

100마리의 구울은 연무장의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날려서 사라졌다.

‘……완전 쉬운데?’

나는 개운히 상의를 벗어 던져 땀을 닦고 칼을 역수로 바닥에 박았다.

그 순간 신비한 글귀가 떠올랐다.

[검으로 100마리 구울을 척살!]

[검술재능을 개척했습니다.]

[당신의 검술재능은 SSS급입니다.]

[‘1,000년 만에 탄생한 소드 마스터’를 뛰어넘을 재목!]

나는 글귀를 읽고서 입을 벌렸다.

내가 그만한 재능이 있단 것도 놀랍지만 허공의 글귀들도 신기했다.

회귀 시점 이후부터 다들 앞에 계속 이런 상태창이 떠오르게 되는 건가?

“예. 그 글귀를 계속 보게 돼요.”

어째선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답변하며 카티에가 다가왔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럼 이전 삶에서도 나는 방금처럼 검술을 익혔겠네?”

“예. 대장은 늘 칼만 쥐면 사람이 바뀌곤 했죠.”

나는 입술을 핥았다.

기분이 묘하네.

나는 모든 일이 처음이지만 카티에는 100번 넘게 반복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건조한 것도 그다지 감흥 없는 것도 얼추 이해가 갔다.

“이젠 부사범 구울을 되살릴게요.”

나는 곧바로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카티에가 민첩히 수인을 맺자 10구의 부사범 시체들이 꿈틀댄다.

“시체 되살리는 그건 뭐냐?”

“부두사제의 시체마법이죠.”

부두사제들은 내가 사는 이곳, 황색대륙에는 거의 없는 걸로 안다.

하여간 언데드로 되살린다니, 시체뿐인 세상에선 엄청난 도움이겠군.

“끼그르륵……! 끼그르륵……!”

시체들이 바닥을 기며 신음한다.

나는 왠지 김새서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언제 다 되냐?”

“좀 기다려요.”

부사범은 수련생보다 강해서인지 시체를 일으키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카티에는 이마에 땀까지 흘리면서 집중하고 있었다.

‘저 마법이 쉽진 않나 보네.’

나도 심심해서 손에 힘주고 그녀가 맺는 수인을 한 번 따라 해보았다.

카티에는 지겹게 한숨을 쉬었다.

“칼이나 잡고 계세요. 시체를 되살리려면 최소한 1년은 넘게 부두사제 밑에서 피눈물 나게 수련을 해야…….”

그런데 소녀가 말을 끝마치기 전.

카티에의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 하던 내 손에서 불길한 빛이 어렸다.

“……어?”

파아앗!

내 손에서 튀어나간 보랏빛 마력이 부사범 시체 더미에 흡수됐다.

그러더니 부사범 시체들이 썩어나면서 일제히 구울이 되어 일어섰다.

“쿠뤄어억!”

나는 당황해서 소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지금 내가 뭘……?”

나는 조금 굳어서 말을 멈췄다.

날 올려다보는 카티에가 처음으로 확연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녀는 질투와 눈물이 뒤섞인 굉장히 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법에까지 재능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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