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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1회차-1화 (1/200)

나만 1회차 001화

“사실 저는 죽으면 지금 이 시점으로 회귀합니다. 쳇, 아깝게 불도깨비한테 타죽었어! 이제 120회차네요.”

나는 술병으로 이놈 뒤통수를 후려쳐볼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망할 것아, 취했냐.”

그러나 지난달에 내 밑으로 입문한 제자 놈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스승님, 제 말이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분명 사실이에요. 저는 지난 삶에서 마검사로 살았습니다.”

난 구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 죄가 컸다. 열네 살밖에 안 된 녀석한테 술을 먹였으니.”

“역시 이번에도 안 믿으시네. 쯧.”

이놈이 말투도 갑자기 괴상해졌네.

어린것한테 술을 먹이면 뇌가 급속 성장해서 치매가 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제자 놈은 갑자기 일어나 내 앞섶에서 주화를 꺼내서 튕겼다.

“여기, 맥주 두 잔 더!”

어라, 이놈이 내가 현금을 앞섶에 넣어둔 걸 어떻게 알았지?

돈주머니 놓고 왔다고 하고 이놈 급료에서 등쳐먹으려고 했는데.

젊은 여급이 미지근한 맥주 두 잔을 가져오자 제자 놈이 킥 웃었다.

“누님, 또 여기서 만나네. 이번 삶에서도 여급으로 살아갈 작정이야?”

이놈이 이제 남한테까지 개소리를.

그런데 뜻밖에도 여급은 제자의 머리를 치며 오랜 친구처럼 킥킥댔다.

“당연하지! 난 천직이라서 항상 만족스럽다니까? 저번 삶은 어땠니?”

“24살. 불도깨비한테 죽었어. 그놈이 차가운 화염도 쓸 줄 알더라고.”

“저런, 그러게 나처럼 그냥 늙어 뒈질 때까지 무난하게 살라니까.”

“됐어. 그런 인생은 너무 지루해.”

여급이 돌아가고 제자 놈은 곧바로 맥주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역시 막 죽고 나서 먹는 맥주 최고. 어린 몸은 빨리 취해 좋아.”

“그래서 개소리는 언제 끝나냐?”

“아, 진짜라니까. 스승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무조건 잘 들으세요.”

제자 놈은 약간 붉어진 얼굴이지만 내 눈을 진지하게 보면서 말했다.

“세상 모든 인간은 이제 죽으면 오늘 시점으로 회귀해요. 7월 3일.”

“…….”

나의 의혹은 점차 확증으로 변해가 결국 굳건한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

제자 놈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행여나 저 수도원에 가둬 버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안 미쳤으니까.”

이놈이 언제 독심술까지 익혔냐.

제자 놈은 양팔을 활짝 펼쳤다.

“지금 여긴 120회차 세상이에요.”

“120회차?”

“죽으면 세상의 분기가 갈려요. 여긴 119번 죽은 자들의 세상이지요.”

궤변도 진지하면 신빙성 있다던가.

나는 제자의 헛소리를 곱씹어봤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온 세상 인간이 119번이나 다른 인생을 살아본 경험이 있다고?”

“예. 우리는 ‘전생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오는 것’을 회귀라 정의해요. 누구는 저처럼 싸우다 일찍 죽고, 누구는 평범히 늙어 죽었죠.”

“기막힌 소리 작작해라. 그럼 나는 왜 전생에 살았던 기억이 없냐?”

“그게 지금부터 중요한 부분이죠.”

제자는 다 마신 맥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다른 한 잔을 쥐었다.

“오직 스승님만 사망회귀를 못 해요. 이유는 나도 전혀 모르겠어요.”

“술 먹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여럿 들어봤지만 오늘이 최고구나.”

나라도 술이 깨야겠다 싶어서 누에 콩을 거른 수프를 후르륵 마셨다.

그러나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제자 놈은 자기 할 말만 해댔다.

“스승님은 여러 번 거듭된 세상 속에서도 최정상급 인재로 손꼽혀요. 분명 이번 회차에서도 ‘거물’들이 스승님의 가치를 탐낼 거예요.”

나는 시큰둥하게 쩝쩝거렸다.

“내 원예가로서의 가치?”

“아니요! 지금 가지신 직업 말고요.”

제자 놈은 어둠이 그늘진 창밖을 흘깃 보곤 조금 빠르게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여기에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누가 말이야?”

“지나온 삶에서 스승님과 연을 맺었던 작자들이요! 그들이 스승님을 존경하거나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반대로 원수로 여기는 자들은…….”

쨍그랑!

유리 파편이 사방에 튄다.

창밖에서 날아든 화살은 제자 놈의 이마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어?”

제자도 이것만은 예상치 못했는지 픽 쓰러져 꿈틀대다 숨이 끊겼다.

나는 순식간에 죽어버린 어린 제자를 멍하니 내려 보면서 중얼거렸다.

“뭐야.”

그 순간 창밖에서 무시무시한 고함이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범철! 범철 이 자식 어디 있어?”

“놈을 죽이는 건 내가 먼저다!”

“내가 저놈한테 몇 번을 죽었었는데! 너는 이 다음 삶에서나 죽여!”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쐐액!

그 짧은 새 화살 너덧 대가 내가 앉아 있던 의자에 따다닥 꽂혔다.

“썩을.”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딱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도망쳐야 한다.

나는 부리나케 주점 뒷문으로 뛰쳐 나갔다.

계산도 안 하고 가는데 주인장은 익숙한 광경 보듯 내 뒤에서 혀를 찼다.

***

이범철.

범처럼 용맹하고 철처럼 강고한 삶을 살아가라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물론 그 해석을 떠올린 건 할 일 없는 작명가 양반이겠지만.

하여튼 나는 내 그런 이름과는 전혀 다르게 무난한 인생을 살아갔다.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문방구 할머니 눈을 피해서 맥주맛 사탕 여덟 개 훔치던 것이 전부였다.

19살이 되어 나 혼자 이계로 소환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이계는 정말 낯설고 신비로웠다.

중세풍 서양과 동양, 그리고 중동처럼 여러 문화권이 뒤섞인 세계.

거기다 칼, 마법, 요술처럼 현실과는 아예 동떨어진 환상들도 넘쳤다.

영문도 모르고 이계로 온 나는 이리저리 떠돌다, 한 도시에 정착했다.

누구나 꿈꾸는 이계에 와서 내가 택한 직업은 바로 원예가였다.

채소, 과수, 정원나무, 화훼花卉 등을 심고 가꾸는 평범한 하위직.

원예가를 택한 이유는 원래부터 그래왔듯 평안한 일상이 좋아서였다.

그렇게 10년이 흘러갔다.

칼을 쥐어본 건 손에 꼽았고 도시 밖으로 나가본 적도 전혀 없었다.

나는 현재 29살이었고 나름 반듯하게 자리를 잡은 중견 원예가다.

그러니 제자 놈 붙들고 사람 없는 주점에서 몇 잔을 나누던 오늘도 다른 날처럼 무난해야만 정상이었다.

그런데…… 후, 망할.

“…….”

다행히도 주점의 어둡고 더러운 뒷골목에는 누구도 없었다.

숨을 죽이고 뛰는데 건물 위편에서 여러 사람이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타다다닥!

젠장, 지금 저것들 집 천장을 뛰어다니면서 날 찾고 있는 거냐?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뭔지 모를 것들한테 도망치는 와중에도 제자의 헛소리가 귀에 밟혔다.

‘온 세상 인간이 사망 회귀했고 지금이 무려 120회차 세상이라고?’

몇 번을 곱씹어도 전혀 믿기지 않는 말이지만 그럼 날 지금 뒤쫓고 있는 저놈들은 대체 뭐란 말이냐?

그 순간 뒷골목의 어둠에서 큰 손이 튀어나와 내 목을 감싸 쥐었다.

“커헉……!”

나는 저항했지만 이놈은 내가 힘쓸 수 없도록 자세를 고쳤다.

소름 끼치는 웃음이 귓가에 들린다.

“이렇게 다시 보는군. 범철……!”

이건 또 뭔 소리야.

내가 전혀 모르는 목소리인데?

어둠 속에 휩싸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곤 나를 깊숙이 끌고 갔다.

“조용히 말해. 나를 기억하겠나?”

“누구……?”

쾅!

“아악!”

놈은 내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

“당연히 기억 못 하겠지, 제기랄!”

이 개자식이!

내 옆 통수에서 피가 줄줄 샌다.

이계에 와서, 아니, 내 한평생 통틀어 이렇게 다친 것은 처음이다!

“자, 이제 나를 기억하겠나?”

“모르겠……!”

쾅!

나는 다시 한번 벽에 처박혔다.

놈은 밉살스럽게 웃음 지었다.

“네가 그 천하의 범철이라도 회차 초반엔 약골에 불과하지. 내가 누구인지 떠올려 봐!”

아오, 네가 대체 누군데, 망할!

이 복수심에 찬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내게 원하는 대답이 있나 보다.

그러나 나는 벽에 서너 번 처박힐 때까지 그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후우.”

놈은 자기 가슴을 탁탁 때렸다.

“아직 모르겠나? 이전 삶에서 네놈과 결투해서 패배한 테로딘이다!”

나는 머리를 다쳐서 멍한 정신 속에서도 놈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전 삶에서 저 테로딘이란 놈을 죽여 버린 것 같다.

그래서 테로딘은 120회차 삶 초반에 나한테 복수를 하러 온 것이다.

“됐다. 떠올리지도 못하는군.”

놈은 야멸친 표정을 짓고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높이 들어 올렸다.

제기랄…… 이렇게 죽는 건가?

서슬 퍼런 칼날이 내 목덜미를 시원하게 갈라내려던 찰나…….

화르륵!

“아아악!”

어둠 속을 뚫고 나온 화려한 불덩이가 테로딘의 얼굴에 직격했다.

바닥을 나뒹군 나는 목을 감싸 쥐고 캑캑대며 놀란 눈을 해 보였다.

“마, 마법?”

불덩이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쉼없이 테로딘을 맞췄다.

“아아악!”

놈은 얼굴이 불타면서도 괴성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지만 단 하나의 불덩이도 제대로 쳐내지를 못했다.

“으어억……!”

숯덩이가 된 테로딘은 녹아내린 칼자루를 놓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불탄 시체를 바라보며 바닥에 쪼그려 있는데 갑자기 저편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핫! 대장! 역시 여기 있었구만!”

을씨년스러운 어둠을 걷어내며 다섯 명이 걸어오고 있다.

개중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먼저 다가와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

나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러자 거한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아, 내가 누구인지도 완전히 까먹었지? 하지만 걱정 마. 우리는 대장을 돕기 위해서 찾아온 거야.”

곁에서 깡마른 소년이 끄덕였다.

“지금 그 손을 잡지 않으면 당신은 죽어. 믿기 힘들겠지만 믿으라고.”

“시간 없어요.”

흰 백의를 차려입은 백등색 머리칼 소녀가 나의 상처를 치유해 줬다.

치유 마법을 쓰는 것으로 봐선 방금 불덩이는 저 애가 쏜 모양이다.

백발의 소녀는 무성의하게 말했다.

“다른 녀석들 눈에 띄기 전에 어서 피해요. 안 그러면 113회차 때처럼 그를 빼앗겨 버릴지도 몰라요.”

너희들은 또 누구냐…….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이 있었지만 나는 거한의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

우리는 종탑에 올라왔다.

비좁고 외딴 데다 나선형 계단도 길어서 누가 오진 않을 것 같다.

꼭대기 방에서 깡마른 소년이 벽에 등을 기대고 무심히 팔짱을 꼈다.

“그래서, 이번 삶은 어떤 식으로 시작할 계획인데?”

동글동글한 안경을 쓴 푸근한 인상의 여자가 턱에 손을 짚었다.

“일단 대장은 수련부터 시작하고, 우리는 대장에게 도움이 되는 진귀한 아이템들부터 찾아 지원해야지.”

“그거야 당연한 거고. 저번 삶처럼 백룡한테 전멸당하면 어쩔 건데?”

“그건 일단 이번 회차목표가 나오면 그때부터 계획 짜볼 거야.”

자기들끼리 다투며 얘기하는데 뭔 소리인지 당최 못 알아먹겠다.

거한, 백발 소녀, 깡마른 소년, 안경 쓴 여성, 그리고 키가 큰 미청년.

저들 다섯 명은 도대체 누굴까?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들은 도대체 뭡니까?”

그러자 거한이 미안해하며 웃었다.

“아, 미안, 대장. 이봐, 다들 조용히 해! 지금부터 제대로 설명하지.”

거한은 미청년의 어깨를 툭 쳤다.

“뭐야. 나보고 설명을 하라고?”

“저번 삶 기억 안 나냐? 내가 말했다 대장이 이해 못 해 헤맸던 거?”

“하긴 돌대가리는 말주변이 없지.”

“뭐, 인마?”

나는 눈살을 찌푸렸고, 미청년은 곧장 머리까지 굽히며 사과했다.

“아, 미안해. 빠르고 간략히 말해줄게. 대장은 간결한 걸 좋아하니까.”

나보다 최소한 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데 반말을 잘도 내뱉는다, 저놈.

미청년은 자신을 가리켰다.

“우선, 내 이름은 세베켈이야.”

네 이름 알아서 뭐하라고, 인마.

난 줄곧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왜 자꾸 날 대장이라 부릅니까?”

“우리 다섯 명은 전부 21회차부터 줄곧 당신과 함께해 온 일행이야.”

“…….”

나는 어리둥절했고 저들은 저마다 킥킥 웃거나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가장 처음 만난 21회차 때 우린 당신의 용병대였는데 그게 버릇이 돼 계속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어.”

나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어, 음. 지금이 정말 120회차 세상이고, 모두 사망 회귀한 겁니까?”

“응. 대장 제자가 설명해 줬었지?”

맙소사.

이쯤이 되면 제자 놈이 했던 헛소리를 믿을 수밖에 없다.

세상 인간들은 모두 사망 회귀해 오늘로 되돌아온 것이다.

무려 119번의 인생 경험을 갖고서.

“그런데 우리가 회귀할 때마다 대장은 항상 이전 삶들의 기억이 없어. 다른 세상 출신이라서 그런가?”

“……제가 그것도 말했었습니까?”

“물론. 우린 완전 가족이었다니까.”

세베켈은 찡긋 윙크했지만 나는 저들에게 전혀 친분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나의 출신지까지 알고 있다면 저 말은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어지간해선 남에게 내 출신을 절대 드러내지 않아 왔으니까.

“우리는 앞으로 대장과 함께할 거야. 하류층을 벗어나게 해주고 강력한 무구들도 찾아 지원해 줄 거고. 최고 수준의 수련도 시켜줄 거야. 아, 지난 삶에서 원수진 놈들도 걱정 마. 우리가 안전히 지켜줄 테니까.”

거참, 듣기만 해도 달콤해 죽겠군.

의구심을 가진 내가 묻기도 전에 세베켈은 선수를 쳐서 말했다.

“왜냐면 대장은 다른 사람도 좌절할 만큼 엄청난 재능을 가졌거든.”

나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한테 무슨 재능이 있단 말입니까?”

“그야 당연히 칼싸움이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저는 최근 10년 동안 칼자루를 쥐어본 경험도 몇 번이 없습니다.”

세베켈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바로 그래서 몰랐던 거지. 그놈의 평안하게 살자는 마음가짐 때문에.”

거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장은 칼을 쥔 지 겨우 사흘 만에 20년 경력 칼잡이를 이긴 적 있어. 내로라하는 천재들조차 대장 앞에서 처음 장벽을 느끼고 검을 놓았지.”

안경 쓴 여성도 킥킥대며 웃었다.

“나도 한마디 얹어볼까? 대장은 고작 포크 한 자루 쥐고 타락한 소드 마스터를 혼자서 갖고 놀았어. 물론 수없이 성장을 한 뒤의 일이지만.”

깡마른 소년도 미소 지었다.

“그래 놓고서 대수롭잖게 한다는 말이 ‘소화도 안 되는군’이었지.”

말도 안 돼.

조금 전만 해도 테로딘이란 놈한테 자칫 허무하게 죽을 뻔했던 나였다.

저들이 만났던 지난 삶들의 내가 정말 나이기는 한지 의심이 든다.

그런데 문득 방금 들었던 대화 중에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아까 분명 이번 회차목표가 나오면 삶의 계획을 세워나갈 거라고 했었는데 그건 무슨 말입니까?”

“아, 그거 말이야?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 지금쯤 나올 때가 됐…….”

바로 그때 눈앞에 희미하게 빛나는 글귀가 떠올랐다.

[120회차에 직면한 인류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120회차 세상 목표는 ‘세 대륙의 지배자 전원 몰살’ 입니다.]

[목표를 달성한 자는 숙원을 이루고 인류의 사망회귀를 멈출 수 있습니다.]

[숙원은 누구에게나 오직 하나이며, 그 개수는 늘릴 수 없습니다.]

나는 꽤나 놀랐다.

게임 상태창처럼 보이는 글귀는 이계에 와서 처음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망할…….”

“세상에, 맙소사. 뭐, 이렇게…….”

저들은 이런 상태창을 처음 접하는 것이 아닌지 꽤나 익숙해 보였다.

세베켈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삶은 뭐, 망했네.”

안경 쓴 여성이 내 눈치를 보면서 살며시 입 열었다.

“포기하고 다음 삶을 노리는 편이 훨씬 더 효율이 좋겠어. 그렇지?”

깡마른 소년이 끄덕였다.

“맞아. 아무리 우리가 회귀했어도 대륙 지배자들을 어떻게 다 죽여?”

거한도 머리를 긁적였다.

“하기야 이번 삶에서 수련해 강해져도 목표를 달성 못 하면 허사고. 다음 삶에선 다 리셋되니까…….”

일행 전원이 고개를 돌리며 나를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타앙! 타아앙! 타아아앙!

갑작스러운 굉음에 밖을 바라본다.

종탑 밖의 하늘에서 붉은색 신호탄 여러 개가 연달아서 쏘아 올려졌다.

깡마른 소년이 쓰게 웃었다.

“적색 신호탄. 오랜만에 보는군.”

“윤회수뇌부 놈들 결단 빠르네. 회귀하자마자 신호탄만 찾아다녔나.”

세베켈이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미안해, 대장. 아무리 봐도 이번 회차목표는 말이 안 돼. 다음 삶에서는 꼭 제대로 도울게.”

뭐?

“무슨 말입니까? 다음이라니요?”

“회차마다 정해지는 목표가 달라. 하지만 이번 회차는 특히 어려워. 아니,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아.”

아니, 이봐.

내가 잘살게끔 도와줄 거라면서?

세베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차목표를 이뤄서 사망 회귀를 멈추는 게 인류의 목적이야. 하지만 이번 삶에선 누구도 해낼 수 없어.”

내 두 눈이 마구 흔들린다.

그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120번의 삶을 반복하며 인류는 ‘윤회수뇌부’를 건립했어. 회차목표를 달성하려는 최고단체야. 수뇌부의 힘은 어느 삶이든 절대적이야. 그들 없인 절대 목표달성이 가능할 수 없어.”

피처럼 새빨간 하늘을 가리킨다.

“윤회수뇌부는 41회차부터 삶의 척도를 재는 제도를 정립했어. 그리고 적색 신호탄은 이런 뜻이지.”

다음 말이 너무 또렷이 들려왔다.

“이번 회차 세상은 포기하겠다.”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세베켈은 일행을 모두 돌아보았다.

“그럼 이번 삶은 건너뛰고 다음 회차에서 재시작하는 거다. 알겠지?”

백발 소녀를 뺀 세 사람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이 끝이었다.

세베켈은 종탑에서 뛰어내렸다.

당당히 뛰어내리기에 난 그가 멋들어지게 착지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우드득!

끔찍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다급히 창틀에 손을 대고 종탑 밖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부러지고 내장을 쏟아낸 세베켈의 시체가 바닥에 부서져 있었다.

“뭐, 이런 미친……!”

역겨움을 참고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변화한 세상을 목격했다.

시가의 행진처럼 자결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건물에서 낙엽처럼 떨어지고 칼로 자기 목구멍을 들쑤신다.

독약을 삼키고 게거품 물거나 강에 뛰어들어 시체가 수면에 떠오른다.

노인도, 아이도, 어른도 자살한다.

숨이 죽은 시체가 불처럼 번진다.

붉어진 하늘과 회귀자들의 땅.

나는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 광경을 보자 확실히 인식됐다.

이곳, 120회차 세상은 버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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