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54)화 (454/456)

454. 너에게 닿기를(4)

다음 주 개봉할 영화 홍보를 위해 대학교 대강당에서 쇼케이스를 진행했다.

솜뭉치들뿐만 아니라 출연한 배우님들의 팬들까지 많이 몰려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죽고 죽이는 영화다 보니 무거운 분위기를 다 털어낼 수는 없지만, 당첨자들을 위해 꾸며진 공간은 꽤 귀여웠다.

질문을 받는 보드도 있었고, 포스터를 프린팅한 엽서도 있고.

다만, 실제 키와 비슷하게 프린팅된 입간판은 아무리 보아도 적응되지 않았다.

너무 부끄러워….

그걸 보고 포잉은 또 어찌나 신나게 웃던지.

그래도 저게 너보다 더 큰 거 같으니 감사하라던 포잉.

그게 왜 감사할 일이야!

은주 누나가 미묘한 눈으로 그것과 나를 번갈아 보며 씩 웃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

진우 형뿐만 아니라 양부역을 맡았던 배우님까지 합세해서 그 입간판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그러게 아빠 말을 잘 들어야지, 진우한테 홀려가지고 아빠를 버려서 그렇잖아.”

“아부지, 너무해요!”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이코패스 청부암살자인 양부 역을 맡았던 주영훈 배우님.

하지만 실제로는 무척 다정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분이다.

덕분에 촬영하는 내내 아빠라고 부르라고 어찌나 시달렸던지.

처음에는 어색해서 도망 다녔지만, 나중에는 배우님은 내게 ‘잘생긴 우리 아들’하고 불러주셨고, 나는 ‘아부지’하고 불러드렸다.

그렇게 현장을 먼저 둘러보고 단장을 하는 사이, 진우 형이 다가왔다.

“투어는 어땠어?”

“신났죠. 진짜 재밌었어요.”

“아팠다며.”

늘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별거 아니었어요. 다른 나라라고 너무 신났던 게 문제죠, 뭐.”

“으이그. 언제쯤 튼튼해지는 거야.”

형은 내 볼을 쭉 잡아 늘이다 메이크업을 봐주던 희주 누나의 시선에 뜨끔해서는 얼른 놔주었다.

하도 우리랑 붙어서 놀다 보니 진우 형은 서포트 팀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이렇게 가벼운 장난도 칠 수 있는 편한 사이가 됐고.

“전 지금도 나름대로 튼튼해요.”

“그래,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시아 투어는 정말로 행복했다.

새로운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공기도, 느껴지는 분위기도 다르다는 게 늘 나를 설레게 했다.

스타디움처럼 큰 공연장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콘서트를 할 수 있을 만큼 팬들이 있다는 것도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만나는 각 나라의 솜뭉치들은 한국 솜뭉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열광해줬고, 서투르게 한글로 쓴 종이를 흔들어주었다.

서울 콘서트인 ‘The Revolution’과 비슷한 구성으로 각 나라에서의 콘서트가 진행됐다.

다만, 혁명에 민감한 일부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용을 바꿔야 했다.

공연하기도 전에 쫓겨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우리끼리야 작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우리는 손님이니 주인인 나라의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무척 행복한 공연이었다.

생김새도, 옷차림도 조금씩은 다르지만, 우리를 부르는 이름은 하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Unavel’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솜뭉치(fluffy)’다.

해외 팬들은 자신들을 솜뭉치라고 하기도 했고, 간혹 ‘fluffy’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한국어로 말할 때는 솜뭉치로, 영어로 부를 때는 ‘fluffy’라고 했더니 무척 좋아했다.

플러피라니 귀엽기도 하지.

솜털 보송보송한 병아리나 고양이 같은 폭신한 느낌은 세빈이가 말했던 솜뭉치의 뜻과도 잘 맞았다.

눈이 부신 빛보다 더 찬란한 함성과 애틋함이 담긴 별빛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매번 모든 것을 떠나 각자가 정한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며 눈물짓기도 하고 함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촉박한 일정 속에서 움직여야 했지만, 피로보다 새로운 솜뭉치를 만난다는 설렘이 더 컸던 시간.

처음 하는 해외 투어라 컨디션 관리는 쉽지 않았고, 결국 태국 공연 직후 우리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열이 꽤 높이 올랐었지만, 살뜰하게 챙겨주는 서포트 팀 덕분에 큰 탈 없이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다만, 체력이 제일 약했던 내가 싱가포르 공연 때 무대에서 내려오다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일이 있었다.

가벼운 어지럼증 때문이었고, 금방 괜찮아졌기에 다른 공연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놀란 솜뭉치들을 달래느라 조금 애먹었지만,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에 열심히 다독였다.

그 기사를 본 건지 진우 형은 우리가 귀국하자마자 한약을 들고 숙소로 쫓아왔다.

이번에는 자신이 제일 빨랐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이 참….

어쩌다 내 주변 형들이 전부 이렇게 됐을까 한탄했지만, 포잉은 혀를 찰 뿐 내 말은 흘려들었고.

그래도 고마운 마음은 늘 가득했다.

언제나 부족한 동생들인 우리를 아껴주고 보호해주려 애쓰는 형들이니까.

그만큼 더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우리끼리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었는데….

“이거 꼭 써야 해요?”

“팬들 요청인데 안 할 거야?”

‘DEAR’의 쇼케이스, 그리고 시사회 일정에 함께 하기로 했던 나.

당연히 함께 할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했지만, 진우 형의 짓궂은 얼굴을 마주하자 그 마음은 파사삭 부서져 내렸다.

아주, 형이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못 놀려먹어서 안달이지?

서글픈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온몸을 콕콕 찌르는 시선에 간신히 방긋 웃었다.

쇼케이스는 무사히 진행됐다.

다른 배우분들과 질문에 답하기도 하고, 촬영장에서의 에피소드를 짧게나마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사진 촬영이 끝나고 잠깐 대화를 나누던 사이, 스태프가 들고 온 복슬복슬한 모자를 보기 전까지는 화기애애했다.

그 모자를 보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받아서 나에게 진우 형이 넘기기 전까지는.

“이거 저만 쓰는 거 아니죠? 다른 분들도 귀여운 사진 찍어야죠.”

모자를 받아든 내가 환하게 웃으며 MC에게 말을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스태프분이 인원수에 맞춰 모자를 들고나오셨다.

그럼 그렇지.

한 사람만 쓰라고 할 리가 없지.

결국 우리는 모두 토끼 모자를 쓰고 귀를 쫑긋거리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내가 이런 거 쓴다고 우리 아들만큼 귀엽지 않을 텐데.”

라고 주영훈 배우님이 웃으며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 상황을 즐기고 계신 것 같았다.

여주인공인 은주 누나는 미친 듯이 토끼 귀를 팔랑거리며 재밌어하셨고.

은주 누나는 극 중에서는 무척 가녀리고 온화한, 그러나 꺾이지 않는 꿋꿋한 역할이었다.

외형도 굉장히 가냘픈 미인이시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상 이상의 장난꾸러기인데다 굉장히 엉뚱한 성격이다.

촬영장에서 누나 연기에 깜박 속아 뛰어다닌 걸 생각하면, 어휴.

그렇게 배우로서의 첫 쇼케이스를 끝내고 난 후에는 무대 인사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배우라는 이름으로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생소했지만, 진우 형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많이 누를 수 있었다.

이렇게 무사히 영화 개봉 일정을 끝내나 했는데….

“영화 보러 가자고?”

“응. 우리랑 안 갈 생각이었어?”

“너 집에 안 가?”

“영화 보고 내일 갈 거야.”

아이돌 모아놓고 신나게 굴리는 프로그램을 올해는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리 솜뭉치들 고생한다고 도시락 역조공하고 눈치껏 틈날 때마다 가서 이쁨받으면서 겨우 버텼다.

같은 처지인 DCL과는 길고 긴 대기시간 동안 신나게 게임하다 플라이하이가 와서 삼파전이 되기도 했고.

이전에 플라이하이 마크가 찬이에게 한 발언 때문에 준이 형의 시선이 마냥 다정하진 않았지만, 그건 작은 문제였다.

에너지 넘치는 막내 라인은 그렇다 쳐도, 맏형들은 내가 입에 넣어주는 홍삼으로 버티는 듯했다.

오죽하면 차라리 내가 가짜로라도 쓰러질까 하는 생각을 했을까.

경기 중 픽 쓰러지면 적어도 우리는 집에 보내주지 않을까 해서.

넌지시 우진 형에게 물었더니 네가 쓰러지면 넌 병원 보내고 다른 멤버들은 잡아둘 거라 하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어제 새벽까지 촬영하다 진이 빠져서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기다렸다는 듯 영화 보러 가자는 찬이.

그 뒤에서 세빈이가 양손을 맞잡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었고, 경환 형도 같은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형은 또 왜 그러고 있는데….

난감해하던 내가 맏형들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형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된 건지 날 모른 척했다.

‘너 일어나기 전에 이미 다 얘기 끝났음.’

‘진짜? 우리 애들이 이렇게 날 버린다고?’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포잉은 내가 잠든 사이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이상하게 믿었던 사람들에게 자꾸 농락당하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기분 탓일까?

“아니, 일단 이 시간에 우리가 다 같이 우르르 갈 수 있는 영화관이 어딨어요.”

“지금 말고 새벽에.”

“표 예매해놨어.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은 좀 있더라.”

“우리 공지환 배우님 영화 잘되려나 보다~.”

히죽거리는 찬이 엉덩이를 걷어차 줄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더니, 어떻게 그런 기색을 눈치챈 건지 찬이가 재빨리 세빈이 뒤로 도망갔다.

“아니, 도망가도 왜 세빈이 뒤야?”

“넌 세빈이만 예뻐하니까!”

“지환이는 나도 예뻐해.”

“형이 돼서 예쁨받는다고 말하면 어떡해요.”

어처구니없어하는 날 두고 준이 형과 영빈 형은 웃느라 바빴다.

하다 하다 이제는 막내 등 뒤로 숨는 동갑내기 친구 꼬락서니나, 동생한테 예쁨받는다고 자랑하는 경환 형이나.

“내가 늙는다, 늙어….”

서글픈 내 중얼거림은 멤버들 웃음소리에 묻혀버렸다.

에라이!

* * *

나름대로 중무장한 우리는 영화관에서 익숙한 뒤통수들을 마주했다.

“형들도 오는 거였어요?”

“같이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내가 힘이 있어야지.”

혹시 모를 시선을 피하고자 우리 옆에 붙지는 않았지만, 새벽 형들과 진우 형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우리를 보고 웃고 있었다.

팝콘은 포기 못 한다는 경환 형의 주장에 간단히 먹을 것들을 사고.

“이렇게 다 같이 영화 보러 온 거 그때 이후로 처음이죠?”

“응. 다음에는 애들 떼어내고 둘이 보러 오자.”

그때 내 뒤통수를 때렸던 막내 라인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느라 바빴다.

내 옆에 서서 그런 막내 라인을 구경하던 영빈 형은 나중엔 조용히 보러 오자고 속삭였다.

“그럴까요?”

“어딜 나 빼고 둘이서만 놀려고.”

“그럼 형까지만요.”

슬그머니 옆에 온 준이 형의 핀잔에도 그냥 좋았다.

모처럼의 휴일이라 쉬고 싶을 텐데도 내가 출연한 영화라 다 같이 보러 오자고 해준 멤버들 마음을 모를까.

서로의 스케줄은 항상 이렇게 모두가 마음을 쓰고 어떻게든 도우려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멤버들이 그랬고, 우리는 서로의 모니터링을 한 번도 빼놓지 않았다.

온갖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 일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를 당연히 여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기분 좋은 울림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정신없이 스케줄에 치여 살다 보니 처음 영화 보러 왔던 날이 까마득한 옛날 같아졌다.

전에 공포 영화를 예매한 것을 알고 나서 찬이를 응징했던 일, 팝콘을 사다 마주했던 솜뭉치, 내 눈을 가려주던 두 맏형의 손.

내게 주어지는 애정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은 건 하나.

내게 언래블이, 우리 애들이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해?”

“그때 공포 영화요.”

“아, 그거….”

준이 형의 시선이 자기들끼리 장난치던 막내 라인에게 닿았다.

“솔직히 영화 내용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나도.”

“기억해봤자 좋을 게 있어?”

우리끼리 키득거리다 보니 상영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끔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했다.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저 이 소중한 시간을 즐기고 싶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우리와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새벽 형들, 진우 형.

영화가 끝나면 진우 형네 가서 맛있는 거 먹고 놀자고 했다.

진우 형이 먹을 거 잔뜩 사다 놨다고.

우리 스케줄은 이미 다 꿰고 있다는 듯 씩 웃는 가영 형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내 곁에 사람이 늘어간다는 것이. 그리고 그들과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전생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지금.

‘계약자야, 무슨 생각함?’

머리 위에 올라가 느긋하게 꼬리를 살랑거리는 포잉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냥, 행복하다는 생각.’

행복해지는 게 두려웠던 날도 있었다.

행복해지면 그대로 지금 삶이 끝날까 봐 오지도 않은 미래를 겁내던 날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끝은 누구도 알 수 없고, 그저 나는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가며 행복하면 된다는 것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포잉의 목소리가 한결 다정해졌다.

‘그래, 앞으로도 행복하면 됨.’

‘응. 같이 행복하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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