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 어디서 뭐해(4)
강제로 휴식기가 생겼지만, 주말에 가족을 만나러 다녀오는 것 외에는 다 같이 숙소를 벗어나지 않았다.
회사로 달려온 찬영 상담사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걱정하신 것보다 우리 상태가 괜찮은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셨다.
그 과정에 포잉의 도움이 있다는 걸 알기에 나만 남몰래 웃었다.
내 요정님은 어찌나 유능한지.
무리하면 안 된다는 팀장님의 만류에 우리는 감을 잃지 않는 선까지만 연습하고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휴식 기간은 열흘.
그 후에는 바로 일본 앨범 발매와 콘서트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한국으로 돌아와 새벽 형들과의 콜라보 앨범 활동도 하고.
형들은 다른 프로그램 출연보다는 그저 무대를 더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원래는 공연 일정에 맞춰 입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는 그런 상황을 예상했었다.
앨범 발매 후 일본에서 어느 정도 머물면서 활동하다 투어를 시작하는 흐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난번 이유 모를 외압이 있었고, 그 때문에 회사에서는 지상파 출연을 포기했다.
일본 방송국에서 요구하는 프로그램이나 우리 포지션이 기존 한국 신인에 비해도 너무하다 싶은 수준이었다.
처음 일본 방문했을 때랑은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이미 이야기를 다 해놓은 상황에서 이런 처사는 부당하다고 소현 팀장님이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아마도 그 여자가 수작을 부렸던 것 같았다.
다만, 그 일을 회사 분들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 꾹 닫고 일이 배로 늘어난 회사 분들에게 간식을 선물하는 것뿐이었다.
겨우 가닥이 잡히고 계획이 다시 세워지면서 정윤 실장님이 급히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렇게 결정된 일본 앨범 배송 일자와 첫 공연 일정.
도쿄 신주쿠에서의 게릴라 공연이 일본 앨범의 첫 공개가 될 줄은 몰랐지만 상관없다.
노래할 수 있고 공연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싶기도 했으니까.
“환아?”
“네, 형.”
앞으로 일정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휴식 시간이 끝났는지 영빈 형이 찾으러 왔다.
“오늘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라고 하시네.”
“에? 벌써요?”
“오늘 첫방이라고 모니터링하라고 하셨어.”
“아, 벌써 오늘이구나.”
진성 형이 경우 선배님의 요청을 전달하면서 연이 닿은 프로그램.
‘잘난척하기 좋은 온갖 이야기.’
출연진들은 ‘잘난 이야기’라고 불렀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책 제목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굳이 그걸 PD님이나 작가님 앞에서 언급하진 않았다.
세상에서는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이니까.
그럼, 목숨은 하난 걸.
선생님과 학생의 여행이 첫 촬영의 컨셉이었다.
경주를 돌아다니며 관광 스탬프를 찍으면서 각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주는 그런 내용이었다.
여행기로 유명한 작가분과 중심을 잡아줄 MC, 현직 교수님과 우리.
촬영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야사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비하인드를 듣는다는 게.
그저 관광지로만 생각했던 천년 고도 경주.
그곳은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경주에 여행 갈 일이 있으면 그때 확실히 상대방에게 잘난 척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때도 우리 애들이랑 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잠깐 주어진 자유 시간에는 경주월드라는 놀이 공원에 달려가기도 했다.
키덜트 뮤지엄이라는 곳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고.
실제 방송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다사다난했지만, 그래도 기어코 촬영을 야무지게 마무리했으니까.
“재밌었는데. 저희 또 불러주실까요?”
“회사랑 제작진이랑 일정 조율한다고 하더라.”
“진짜요?”
“응. 시청률이 잘 나와야 할 텐데.”
방송국에서는 시청률 때문에 아이돌을 넣었다는 걸 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사람들이 봐주지 않으면 그대로 사라지게 되니까.
우리도 이제는 제법 큰 팬덤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몸값이 천장 수준으로 높은 건 아니다.
그러니 여러모로 써먹기 좋은 사냥감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된 거지, 뭐.
“우리 솜뭉치들한테도 공부가 되지 않을까요?”
“어느 쪽이든 공부는 싫잖아.”
“그건 맞죠.”
팬들이 많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영빈 형을 봤지만, 형은 피식 웃고 말았다.
공부는 나도 싫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안 그래도 공부를 완전히 놓으면 안 된다는 누나의 엄명 때문에 틈틈이 학교 수업 따라가느라 죽을 지경이다.
내가 이 나이 먹고 그때도 안 했던 공부를 다시 하게 되다니….
시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급격하게 울적해진 내 얼굴에 영빈 형이 왜 그러냐며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진심을 가득 담아 ‘공부하기 싫어서요’라고 했다가 영빈 형이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다며 등짝을 때렸다.
난 진지한데?
* * *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멤버들과 합류한 우리는 우진 형의 보호 아래 숙소로 돌아왔다.
흉기 난동범에 방화범까지 만난 우리 때문에 우진 형은 부쩍 늙는 것 같았다.
형한테 보약이라도 선물하는 게 좋을까….
창문을 보는 척 우진 형의 뒤통수를 힐끔거리다 누나에게 한의원을 추천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앞에서는 늘 푸근하게 웃어주는 우진 형.
아무리 힘들어도 티 내지 않는 형이지만 최근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얼마 전 찬이가 우진 형의 머리에서 새치를 발견한 것이다.
봐도 못 본 척해야 하는 걸 구분하는 눈치는 어머님께 두고 온 건지, 우리 찬이는 우진 형에게 말했다.
형 머리에 새치가 늘었다고, 형이 갑자기 더 큰 형님이 된 것 같다고….
운전 중에는 늘 운전대를 양손으로 잡는 우진 형.
그날따라 유달리 손에 힘이 들어갔다며, 보조석에 앉았던 종범 형이 부르르 떨면서 증언했다.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새치 진짜 많냐고, 자기 나이 들어 보이냐고 다섯 번이나 물었다고.
그러니 제발 새치나 나이 얘기는 우진 형 앞에서 꺼내지 말아 달라고 종범 형이 우는소리를 했다.
크게 표정 변화가 없는 종범 형이 이러는 걸 보면, 우진 형이 어지간히 무서운 얼굴이었나 싶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바로 멤버들을 호출했다.
우진 형과 관련된 이야기는 우리 사이에서도 중요한 문제니까.
이 소식을 빠짐없이 전했고, 그날 바로 찬이는 교육에 들어갔다.
준이 형이 평소처럼 ‘경환아’라고 부르자, 경환 형은 재빨리 찬이를 단단히 속박했다.
그 후 왜 사람에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지 설교하는 건 나와 준이 형의 몫이었다.
그사이 세빈이는 귀마개를 가져와 경환 형에게 씌워주고 자기는 방으로 도망가버렸다.
영빈 형도 어느 순간 슬금슬금 사라졌고.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니 찬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잘못했다고 빌었다.
힘들게 찬이에게 세상 사는 방법을 한 가지 더 깨우쳐준 준이 형과 나는 뿌듯했지만, 멤버들은 조금 질린 눈을 했다.
그런 사소한 사건 후 찬이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새치나 나이 관련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우리 애가 이렇게 한번 배우면 또 잘 기억하지.
모니터링 전 밥을 먹자는 의견에 메뉴를 고르는 막내 라인을 보며 당시를 회상했다.
“너 그렇게 좀 웃지 마.”
“어떻게 웃었는데.”
“뒷공작 꾸미는 흑막 같았어.”
“난 우리 찐빵이 기특해한 것뿐인데?”
“늘 까먹는 것 같은데 우리 동갑이다, 친구야.”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준이 형의 핸드폰이 울렸다.
“응? 가영 형인데.”
잠시 우리를 바라본 준이 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형. 네? 어디라고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건지 준이 형은 자꾸만 ‘네?’하고 되묻고 있었다.
그 사이 무심결에 바라본 내 핸드폰에는 하겸 형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하겸 선배님 [우리 병아리 뭐 좋아해]
30분 전에 온 메시지인데 못 보고 있었다.
병원 사건 당시, 하겸 형이 회사로 달려오긴 했었다.
골든 아워 형들이 다 오고 싶어 했지만, 우리가 쉬는 데 방해할까 봐 형만 왔다고 하면서.
그걸 떠올리니 어딘가 불길했지만, 연락을 읽고 씹을 수 없었기에 톡톡 메시지를 입력했다.
[갑자기요?]
[왜요?]
그렇게 메시지에서 숫자 표시가 사라지는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병아리들! 형님들 오셨다!”
“창피하니까 제발 조용히 해.”
“한가영은 왜 와가지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형들이 여기서 갑자기 왜 튀어나와요….
가영 형, 세비 형, 키스 형과 하겸 형, 단우 형이었다.
‘나 요정계 다녀옴.’
그때까지 우리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꼬리를 살랑이던 포잉은 바로 도망칠 것을 예고했다.
‘포잉! 이렇게 날 버린다고?!’
‘난 이 난장판을 지켜볼 자신이 없다, 계약자야.’
‘포잉! 이건 배신이야!’
‘놉. 우린 언제나 이어져 있음.’
포잉은 평소엔 절대 내뱉지 않을 낯부끄러운 말을 툭 하고 내뱉고는 정말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누워있을 수 있던 거실이 꽉 차버렸다.
이건 악몽이야….
* * *
여태까지는 아이들을 배려해 되도록 사생활 공간인 숙소는 방문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무색하게 새벽 멤버들은 툭하면 숙소로 쳐들어간다는 말을 들은 하겸은 참을 수 없었다.
자꾸 그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서 뭉개고 있으니 그 착한 애들이 질질 끌려다니지.
한가영은 정말이지 예의와 배려라고는 한 톨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하겸은 혀를 찼다.
가뜩이나 멤버들이 걱정돼서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하나 하던 차였다.
소현 팀장에게 언래블이 오늘은 일찍 숙소로 돌아갈 거라는 걸 들었다.
새로 촬영했던 프로그램의 첫 방송 날이기도 해서 맛있는 것 먹으면서 쉬라는 의미로 보냈다고 했다.
소현에게 멤버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열심히 구워삶은 하겸은 결국 지하 주차장의 비밀번호를 받아냈다.
현관 비밀번호는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문 앞에서 전화하면 되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단우가 제발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살라며 치를 떨기에 작은 병아리에게 메시지도 미리 보냈다.
그 사이 어차피 숙소에 있을 테니 가서 얼굴 보자고 단우를 꼬여냈다.
안 그래도 걱정을 태산같이 하던 단우는 손쉽게 넘어왔다.
스케줄 때문에 나가 있는 인하와 얀이 배신자라고 냥톡으로 욕을 보냈지만, 가렵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저런 메시지쯤이야 그들에게는 일상 대화 같은 것이니까.
그렇게 멤버들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떠올리며 주문을 넣은 하겸은 주차장에서 보고 싶지 않은 차를 발견했다.
“젠장.”
“왜?”
차에서 내리던 단우의 의문에 답을 하기도 전, 익숙한 차에서 익숙한 미친놈이 내렸다.
“안녕하세요.”
“어라, 여기서 뵙네요? 병아리들 보러 오셨어요?”
단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새벽 멤버들 중 가장 사람다운 세비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지환이 봤다면 왜 우리 집인데 형들이 그러고 있냐고 한숨을 내쉬었을 풍경이었다.
“나보고 매너는 어디다 팔았냐면서?”
“난 회사에도 물어봤고 병아리한테도 미리 연락했다.”
히죽거리는 가영에게 하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애들이 오라고 했어?”
이어진 가영의 질문에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아직 답은 못 받았으니까.
그렇게 둘이 아웅다웅하든가 말든가 단우는 세비와 키스와 인사를 나누며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막내야, 이렇게 형을 버린다고?”
“애당초 주운 적도 없으니까 저리 가요.”
그래도 다른 그룹 앞이라고 욕하지 않은 단우 모습에 하겸은 히죽거렸다.
“왜 니들끼리 가!”
“미쳤어? 조용해. 신고당하기 전에.”
“한가영, 쉿. 목소리가 너무 커.”
떨거지 취급당하는 가영에 비하면 자신이 낫다고, 하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정신 사납게 숙소가 있는 층에 도착한 순간, 지환에게 답장이 왔다.
삐약이 [갑자기요?]
삐약이 [왜요?]
하겸은 어리둥절해 할 병아리가 떠올라, 한가영 때문에 곤두박질쳤던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